제단을 망가뜨린 효과 때문인지 길을 헤매지도 않았고, 룽카와 헤어지는 일도 없었다. 하지만 필연적으로 발생해야 될 사건이 자꾸만 늦춰진다는 느낌을 떨쳐 낼 수가 없었다. 우리가 알던, 이때쯤 일어났어야 할 사건들은 모두 어그러졌다.
나비 효과라고 했던가. 지금 일으키는 작은 변화가 미래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알 수 없다. 그건 긍정적일 수도 부정적일 수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대로 당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테라리움의 반에 해당되는 면적을 죄다 박살 내고 다닌 것 같다. 이 정도의 손상도라면 더 이상 제단이라고 볼 수 없지 않나 싶었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내 전생의 시간들은 땅굴 곳곳에 퍼져 있었는데 제단이 파괴된다면 그 시간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
시야를 바꿀 수 있는 장치인 가면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당장 그들이 눈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제단이 파괴되어도 그 자리에 좀비처럼 앉아 있을지, 아니면 사라졌을지 의문이었다.
더구나 푸른 고리가 나타난 데이지와 달리 나와 엘더의 손목엔 아직까지 푸른 고리가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그러니 더더욱 시간들이 잘 있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이렇게 요란하게 일을 벌이는데도 마주치는 사람이 단 하나도 없을 줄이야. 전부 도망가 버린 건가? 하지만 근처에 있다면 데이지가 인기척을 감지했을 텐데…. 그리고 과거 데이지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고.”
“말씀하셨던 포로들이 모여 있다던 공동도 발견하지 못했고 말입니다. 저희가 진입 방향을 잘못 잡은 걸까요?”
룽카의 말처럼 반대 방향을 향해 진행하고 있는 건 아닌가 의심도 되었다. 산발적으로 제단을 박살 내며 걷다 보니 처음 불길한 바람이 불어왔던 방향을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길을 헤맬 요소를 없앴으나 다시금 가디언이 바람을 보내지 않는 한 결국 길을 잃게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다.
멀쩡한 바닥을 딛자마자 습관처럼 발에 힘을 줘 부수던 데이지가 갑자기 퍼뜩 고개를 치켜들더니 인상을 구겼다. 마치 무척 불쾌한 일을 경험한 것처럼 얼굴이 좋지 않았다.
“데이지?”
그녀는 한동안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노려보며 가만히 있더니 돌연 귀를 마구 문질렀다. 그녀의 행동에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다.
귀를 만진다고? 전투 도중 끊임없이 어떠한 소리에 시달렸던 엘더의 모습이 떠올랐다. 설마 데이지도 혼란의 영향을 받게 된 건가?
이내 고개를 세차게 흔든 데이지는 힘이 잔뜩 들어간 눈빛으로 엘더를 바라봤다.
“당신도 들은 거죠…? 그래서 그렇게 행동하는 거죠?”
그녀는 확신에 가까운 목소리로 엘더에게 물었다.
“당신에겐 뭘 약속했나요? 가디언이 뭘 해 주겠다고 한 건가요? 그리고… 당신은 그 제안에 마음이 흔들렸던 게 맞죠?”
나는 묻지 않고 데이지의 물음을 차분히 곱씹었다. 가디언이 제안을 했다고? 그리고 그 제안에 일순 엘더가 마음이 흔들렸다는 건가?
“그래요. 흔들린 거죠? 그래서 그렇게…. 죄책감이 들었던 거죠?”
그런데 같은 혼란에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데이지와 엘더의 반응이 천차만별이었다. 데이지는 자신이 들은 내용을 밝히며 저항하는데 거침없었고 엘더는 이를 숨겼다.
“데이지, 가디언의 목소리를 들은 거야?”
“네, 단순한 목소리가 아니었어요. 그건 제 마음을 엿봤어요. 그리고… 끊임없이 속삭이는 목소리로 엿본 마음을 뒤흔들며… 상상을 하게 만들었어요.”
혼란은 생각보다 훨씬 더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마음을 엿봤다고?
그런데 데이지의 설명이 이어지자 이를 듣고 있던 엘더의 표정이 참혹하게 굳어졌다. 그의 표정이 데이지의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이 되었다. 엘더는 가디언의 제안에 마음이 흔들렸고 이로 인해 죄책감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전투에서 빠지겠다는 식의 이상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대체 가디언이 그의 마음의 어떤 부분을 들춰냈기에 저렇게 과민 반응 하는 거야?
“네게 뭘 제안했어?”
“제겐… 투항한다면 제희 님과 영원토록 함께 할 수 있게 해 준다고 했어요. 세상이 멸망해도 헤어지지 않게 만들어 준다고.”
그 제안이 상당히 기이했다. 우리가 함께하는 건 가디언이 관여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었다. 그자가 제안하지 않아도 우리는 함께였다. 굳이 특이점을 꼽자면 ‘세상이 멸망해도’라는 부분이었다.
“제안이 이상한데요? 영혼의 연결을 한 드루이드와 드라이어드의 관계는 이미 생의 전반을 함께한다고 볼 수 있지 않습니까?”
룽카 역시 내가 느끼는 이상한 점을 집어냈다.
“자신의 힘으로 제희 님은 영생을 살게 될 거고 그렇게 된다면 언제나 함께한다고….”
“영생이라고? 그런 건 카수스나 집착하는 거야.”
그런 제안이 나오게 된 배경이 짐작이 갔다. 내가 카수스처럼 영생에 집착할 거라 생각한 건가?
“제 마음을, 소망을 읽었기 때문이에요.”
데이지의 소망은 오래도록 나와 함께하는 것. 단적으로 말하자면 드라이어드의 수명은 영혼이 연결된 드루이드에 의해 정해지니 드루이드가 오래 살면 살수록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지긴 했다.
그녀의 소망은 우리가 가디언과의 전투에서 전멸을 맞으며 더욱 짙어졌다. 또다시 내가 죽을 뻔한, 아니 사실만 놓고 보자면 죽는 결말이 나왔다. 하지만 드라이어드라면 누구나 드루이드가 안전하기를 바라지 않는가.
데이지의 소망은 당연한 것이었다. 나 역시 드라이어드들과 오랫동안 함께하기를 소망하고 있었다.
“자신과 함께한다면 제희 님은 영원히 죽지 않고 늙지 않으며 병들지 않는 시간을 살게 될 거라고 말했어요. 그런데 그건 실체로 느껴지지 않았어요. 가디언이 말하는 건 자신이 만든 환상 속에 가두겠다는 뜻일 거예요.”
실제로 내게 영생을 부여하는 게 아닌, 환상 속에 가둬 대리 만족을 느끼게 한다?
“환상 속에 가둔다는 말은 이 지역이 통째로 노멀 필드 가디언의 영역이란 점과 관련이 깊을 것 같습니다.”
룽카가 가디언의 영역임을 짚었다. 가디언의 의지대로 노멀 필드를 제외한 모든 드라이어드들을 돌려보낼 수 있을 정도로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역.
“비슷한 능력을 알고 있어요…. 행정 관리원이 쓸 수 있는 가드너 스킬 중에 가상 아티팩트 공간을 만들어 내는 능력이 있어요. 따지고 보면 드루이드들의 영역 선포 능력과도 비슷하긴 한데….”
어쩌면 이 영역에 대해 단순히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닌 심화하여 생각해야 될지도 모르겠다.
파필리온이 16번째 테라리움을 관리하는 행정 관리원일 적 사용했던 고유 기술이 가상 아티팩트 공간이었다.
지금 내가 사용하는 기술과는 결이 조금 달랐는데, 나는 인공 개량 드라이어드들이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룸을 만들어 주는 것에 치중한 데 반해 그는 공간을 통째로 드라이어드의 영역으로 만들어 주는 방식이었다.
불특정 공간에 단 하나의 드라이어드를 위한 필드를 재현하는 것. 이 역시 ‘힘을 가진 환상’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러니 노멀 필드 가디언이 사용하려는 환상은 가상 공간으로 치환되는 자신의 영역에, 가두는 대상을 드루이드까지 확장시킨다고 이해하면 될 듯했다.
영생을 사는 건 불가하다. 더구나 사는 동안 늙지 않고 병에 걸리지 않는 건 더욱. 카수스 또한 10개 필드의 생명들의 시간을 제물로 시도하려 했던 일이므로, 노멀 필드의 가디언이 투항 조건으로 덜컥 내놓을 수 있을 만한 게 아니었다.
그러니 데이지가 실체가 아니라고 알아차린 것처럼 늙거나 병들지 않고 영원히 살아간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방법을 쓸 것이다.
“가디언이 하는 헛소리는 그게 전부야?”
“소망을 빛나게 하기 위해 불안을 지속적으로 건들며 두려운 마음을 들게 하는 방법을 쓰긴 했어요. 하지만 정말 그게 두려웠다면 애초에 제희 님이 여행하지 못하게 제가 막았을 거예요. 그런 건 말이 안 돼요.”
‘드루이드가 죽을까 봐 두렵지 않아?’, ‘네 곁을 떠날까 봐 두렵지 않아?’, ‘정말 날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해?’, 하는 말들로 마치 뱀의 혀처럼 데이지의 귓가에 속살거리며 그녀를 유혹했다고 한다.
하지만 상대를 잘못 골랐다. 어쩌면 모험 초반부였다면 데이지도 혹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는 수많은 시련을 이겨내며 이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런 단순한 방법은 통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이상한 점이….”
제물들의 시간을 흡수해 부활한 가디언은 당연히 카수스를 찾아갈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자신이 영향력을 끼치는 이 영역을 떠나야 할 것이다. 하나 말하는 걸 들어보면…. 영역을 떠날 생각이 없어 보이는데…? 어째서지?
어쨌든 혼란을 금방 떨쳐 낸 데이지가 기특해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러다 엘더에 대한 의문이 불쑥 커졌다.
“엘더, 설마 넌 내가 영생을 살 수 있게 만들어 준다는 꼬임에 갈등한 거야?”
엘더가 겨우 이 정도 유혹에 갈등했다는 사실이 말이 되지 않았다. 데이지는 신념이 확고해 통하지 않았다 치더라도 엘더는 옳고 그름을 따져볼 수 있는 통찰력이 있었다. 더구나 메스키트 밑에서 자란 드라이어드가 아닌가?
“난….”
그는 고민하는 얼굴이 되었다.
“내게 온 제안은… 그게 아니었어. 미안해. 네가 실망할 거야.”
엘더에게 온 제안은 다른 거였다?
“내 영생도 아니라면 대체 뭘….”
그는 손으로 눈을 가리며 말을 머뭇거렸다.
“인간이… 인간이 되고 싶지 않으냐고 했어.”
“뭐?”
전혀 예상하지 못한 대답에 일순 할 말을 잃었다. 드라이어드인 엘더에게 인간이 되고 싶지 않냐고 제안을 했다고? 여태 엘더를 갈등하도록, 이로 인해 죄책감을 느끼게 만들었던 제안이 그거라니….
엘더가 눈을 가린 손을 내리자 붉어진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는 나와 시선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다가 이내 결심한 듯 입술을 짓씹었다. 까만 장갑을 낀 손이 내게 내밀어진다. 그 손을 맞잡자 굳게 이어진 영혼을 통해 그의 마음의 소리가 흘러 들어온다.
“드라이어드는 할 수 없는 게 있지. 종족이 다르다는 건 무슨 짓을 해도 고칠 수 없는 사실이니까.”
엘더가 들었던 가디언의 뱀의 혀가 내 귓가에 속살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