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72화 (472/604)

엘더의 표정을 보면 그 또한 우리가 과거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는 우리가 전멸하기 직전까지 정신을 온전히 다루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었다.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고 했던가.

“엘더, 괜찮아?”

좀처럼 입을 열지 않고 땅만 바라보는 그에게 다가가자 날 본 그의 어깨가 움찔 튄다.

그러고 보니 혼란에 빠졌던 그의 얼굴에 죄책감이 가득해 보였었지. 지금도 마치 잘못을 들킨 것처럼 어쩔 줄 모르는 시선이었다.

“난….”

엘더는 나와 여전히 시선을 마주하지 못한 채 손을 들어 입을 가렸다.

그 모습을 보며 혹시 가디언과 맞설 당시 전투에서 제대로 활약하지 못했다고 생각해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닌가 싶었다. 그는 자의식이 비대하고 자존심이 아주 센 드라이어드였으니까.

하지만 그 전투는 당연한 패배를 앞둔 것처럼 엘더가 아무리 애를 써도 승리하는 게 불가했다. 데이지를 백 번 일으켜도 백 번 일어난 데이지가 마주할 한계는 똑같았을 테니까.

“그 전 전투 때문이라면….”

“나… 이번엔 빠지는 게 좋을 것 같아.”

그가 한 말은 의외였다. 엘더가 빠진다고?

“그게 무슨 소리야? 네가 빠진다니.”

엘더가 자신을 제외시키라고 말하는 건 처음이었다. 항상 나설 순간만을 기다리며 어떤 어려운 상황이 닥쳐도 물러나지 않고 꿋꿋하게 제 자리에서 할 일을 다했던 드라이어드이기 때문이다.

“이번엔 나 때문에 모든 걸 망칠 수도 있어. 그러니까… 내가 빠져야 해.”

데이지 역시 그의 발언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녀 또한 우리 모험의 초기 멤버로 나 다음으로 엘더와 많이 얽혔었다. 특성과 등급이 달라도 엘더는 데이지에게 묘한 라이벌 의식 같은 걸 가지고 있어서 초반에는 상당히 많이 부딪히기도 했었다.

무슨 일이든지 의욕적으로 행동하는 데이지를 라이벌로 삼을 정도니 엘더 또한 자신의 힘을 보여 주려 부단히도 애써 왔는데….

“뭐 때문에 그러는지 자세히 말해 주면 안 될까? 이전 전투에서 우리가 고전했던 걸 이야기하는 거라면, 네겐 잘못 없어. 그 상황에선 우리가 그래프트를 펼쳐도….”

“아니, 말할 수 없어.”

그에게 비밀이 생겼다. 그것도 나에게 말할 수 없다는 비밀이….

엇나가는 자식을 보는 부모의 심정이 이러할까? 믿기지 않는 그의 행동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가디언이 건 혼란이 네게 무슨 짓을 한 거야?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고 했지?”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는 걸 보면 그게 원인이 맞는 듯하다.

“말할 수 없어. 말해선… 안 돼.”

“엘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엘더는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혹시 아직도 혼란의 여파가 이어지는 거야? 그렇다면 그건 단순히 가디언의 공격에 당한 것뿐이니까 너무 마음 쓰지 마. 혼란은 애초에 네가 제대로 된 사고를 하지 못하는 걸 의도한 기술이잖아. 그러니까….”

“…….”

아무리 달래 봐도 한번 닫힌 입은 열릴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이대로 매몰차게 아티팩트로 돌아가지 않는 걸 보면 아직 개선의 여지는 있는 것처럼 보였다. 빠지겠다고 단호히 말했으면서도 엘더는 갈등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노멀 필드의 가디언은 아주 높은 수준의 혼란 기술을 사용할 수 있는 걸로 보여요.”

애초에 이 지역을 의심하고 찾고자 했던 이유도 이리스 파티가 걸렸다고 추정된 혼란을 찾기 위해서였으니 새삼 특별하지도 않다. 다만 엘더처럼 이지가 높은 드라이어드에게도 강하게 작용한다는 점이 놀라울 뿐이다.

“그렇군요. 조심해야겠습니다.”

룽카가 침울한 표정의 엘더를 안쓰럽다는 얼굴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일단 가면을 먼저 입수해야 하는데, 어떤 적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고 있으니 사릴 필요는 없을 듯해요. 오히려 그쪽에서 우릴 발견해서 먼저 다가와 주는 게 이득이에요. 그러니까….”

멀뚱멀뚱 날 바라보고 있는 민들레들에게 땅굴에 꽃씨를 뿌릴 것을 부탁했다. 가면이 없는 상태에서 우린 길을 헤맬 위험이 크지만 민들레들이 뿌린 꽃씨는 달랐다.

꽃씨를 조종하는 건 드라이어드지만 꽃씨 자체엔 이지가 없기 때문에 그저 바람을 따라 흘러가기만 하면 될 뿐이었다. 즉, 꽃씨는 혼란에 걸리지 않는다.

가면을 쓰니 올바른 길이 보였다는 건 벽이 움직이거나 막힌 길이 생기는 장치가 따로 없다는 걸 뜻했으니 잘만 하면 가면을 습득하지 못해도 길을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민들레들의 빛 가루가 둥둥 떠다니는 듯한 아름다운 기술은 화려한 만큼 적에게 발각될 확률도 컸지만 이젠 그걸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민들레들도 반항하지 않고 순순히 꽃씨를 퍼뜨렸다. 우린 민들레들이 퍼진 꽃씨에 집중하여 무언가를 감지할 때까지 차분히 기다렸다.

“과거의 데이지를 만났던 곳이 멀지 않았던 것 같은데….”

하지만 기이하게도 오랜 시간을 기다렸으나 민들레들은 어떠한 것도 감지해 내지 못했다. 분명 이전엔 가면을 쓴 교단원들이 침입자가 있음을 알고 있었고 직접 찾으러 나오기도 했었다. 우린 그 과정에서 그들을 붙잡아 가면을 얻었고.

하나 상당히 멀리까지 꽃씨를 퍼뜨렸음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인기척도 잡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왜 갑자기 이런 변화가 생긴 거지?

“가면을 얻지 못하면 옳은 길을 찾을 수 없을 텐데….”

“가면을 쓰기 전엔 같은 길만 계속 헤맸다고 하셨죠? 그렇다면 꽃씨를 따라 이동해 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그렇다면 최악의 경우 이전처럼 저희가 헤어지게 될 수도 있어요.”

아직 갑자기 룽카와 민들레들과 헤어지게 된 원인에 대해선 알지 못했다. 전멸을 맞이하는 순간까지 끝내 그들과 합류하지 못했었다.

“최소한 돌아다니는 교단원들을 찾지 못해도 포로들이 몰려 있던 공동은 찾을 수 있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꽃씨가 구석구석 퍼져 나가도 그곳을 발견하지 못한 게 이해가 되지 않아요. 혹시…. 노멀 필드의 가디언은 바람도 다룰 수 있는 걸로 보이던데 수를 쓴 걸까요?”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만약 그렇다면 민들레들의 노력이 헛수고가 된다.

“편법은 허용하지 않겠다는 건가.”

“데이지 혹시 이번엔 소리가…. 아냐.”

데이지에게 이번에도 부르는 소리가 들리지 않느냐고 물으려다가 멈췄다. 그때 데이지를 불렀던 목소리의 주인은 야생 꽃이었으나 그 야생 꽃이 현재 데이지의 포레스트에 있으니 미래가 바뀌었다고 볼 수 있었다.

본래라면 포로들을 붙잡아 둔 공동에 야생 꽃도 함께 있었어야 했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으니….

“혹시 부르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느냐고 물으신 거라면, 들리지 않아요.”

“과거의 데이지들이 찾는 목소리도 들리지 않겠지?”

내 물음에 데이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과거의 데이지와 만난 건 우연이었다. 한 가지 희망적으로 볼 수 있는 건 최근 생겼을 과거의 데이지는 기억을 그대로 가지고 있을 테니 어쩌면 그쪽에서도 우릴 찾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을 거란 점이었다.

“이정표가 없으니 이젠 어떻게 해야 하지?”

답답한 마음에 땅을 발로 차다 문득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이 땅굴 전체가 하나의 커다란 제단이었지. 나는 그 순간 떠오른 생각을 룽카에게 전했다.

“제단을… 망가뜨리는 건 어떨까요?”

“제단이요?”

“네, 바닥에 있는 이 문양들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었어요. 제단을 만들기 위한 주문처럼 느껴졌어요. 그러니 박살 낸다면 뭔가 달라지지 않을까요?”

“자칫 잘못했다간 땅굴이 무너질 것 같습니다만….”

하지만 가디언의 대규모 공격에도 제법 오랜 시간 버텼던 걸 보면 단순히 바닥을 망가뜨리는 정도라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전이었다면 이 땅굴 전체가 제단이란 걸 몰랐으니 섣불리 망가뜨린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제단을 박살 내서 제물을 바치는 걸 막는다면 우려되는 일을 하나 제거할 수 있을 거예요.”

솔직히 땅굴 곳곳에 퍼져 있는 내 전생의 시간들을 전부 지켜 내는 건 무리였다. 무엇보다도 한곳에 몰려 있다면 모를까 그 많은 수를 지켜 내기엔 전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예 원천 차단을 한다면?

제물을 바치는 건 제단이 전제되어야 했다. 그러니 아예 수단을 막아 버리는 거다.

“괜찮겠습니까? 저는 당신의 결정을 따르겠습니다.”

룽카는 바닥의 면적을 재단하는 날 불안한 눈으로 바라봤지만 딱히 제지하지 않았다. 그에게 결정권이 없다는 점도 컸지만 미래의 일을 알고 있다는 점에서 내 결정이 좀 더 타당할 거라 생각하는 듯했다.

“데이지, 여기부터 저기까지 바닥의 문양들이 온전하지 못하도록 망가뜨려 줄 수 있어?”

무자비하게 박살 내는 건 메스키트에게 좀 더 어울렸다. 데이지는 날카롭게 도륙한다는 느낌이고. 그녀가 아무리 힘이 세더라도 단검이란 무기로 바닥을 깨부수는 건 어울리지 않….

“네!”

콰드드득!

내 부탁에 데이지는 바닥을 향해 힘껏 발을 굴렸고, 그녀의 발이 땅에 움푹 꽂히자 순식간에 바닥 곳곳에 균열이 일어났다.

하긴, 무엇을 부수는 데 굳이 무기가 필요 없을 만큼 데이지는 전신이 무기였다. 애초에 작은 체구로도 아스팔트를 뚫고 피어나는 꽃이 아닌가?

파괴의 여파로 작게 지진이 발생하자 룽카는 최대한 안전 지점을 찾아 이동하며 천장을 살폈다. 흙먼지가 떨어져 내리고 있으나 무너질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저쪽도. 중앙과 가장자리를 완전히 박살 내 놓으면 될 것 같은데.”

내 부탁을 따라 바닥 곳곳을 헤집어 놓던 데이지가 어느 지점을 건드렸을 때였다.

키이이잉.

귀가 찢어질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잠깐 터져 나왔다가 사라졌다. 그러곤 데이지가 마지막으로 밟은 지점의 문양이 붉은빛을 띠다가 점멸하는 것이 보였다. 우린 직감적으로 제단을 유지하던 주술이 파훼됐음을 알아차렸다. 주문을 푸는 별다른 복잡한 과정 없이 물리로 해낸 것이다.

그리고 제단을 박살 낸다는 계획이 먹혀 들었다는 사실에 입꼬리가 실실 위로 솟았다. 무엇보다도 가디언을 엿 먹였다는 점이 기뻤다.

“이렇게 제단을 부수면서 가면 길을 헤맬 염려도 없겠네요.”

나와 데이지는 어디부터 박살 낼지 고민하며 먹이를 찾는 눈으로 땅굴 곳곳을 훑었다.

“저기, 이번엔 저기를 부수자.”

“네!”

단순히 문양을 엉망으로 만든다고 끝나는 게 아니라 좀 전처럼 주술의 코어가 되는 지점을 찾아야 하는 듯했다. 물론 굳이 찾지 않고 전부 다 엉망으로 만들면 저절로 박살 나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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