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71화 (471/604)

이미 경험한 적 있는 기이한 느낌을 받는 걸 데자뷔라고 하던가. 나는 땅굴에 막 떨어졌을 때의 시간대를 걷고 있었다. 야생 꽃의 대답을 직접 듣지 못했으나 지금 현상이 충분히 그 답이 되어 주었다.

야생 꽃은 다행히도 드루이드를 믿지 못하는 불신과 두려움을 버리고 내 영혼에 와 주었다. 그리고 절체절명의 순간, 데이지가 이 공간의 혼란에 재시작의 힘을 틔워 냈다.

전설의 힘을 일깨웠을 때처럼 요란한 알람도 효과도 존재하지 않았지만 이곳에서는 그 어떤 때보다도 놀랍고 신비로운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시간을 되돌린다는 건 정말로 신의 영역에 가까웠다. 과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이곳에 과학을 대신한 마법에 가까운 연금술이 존재해도 이루지 못한 것이 바로 시간과 관련한 일이었다.

그런데 단 하나, 그 개념이 평범하게 통용되는 곳이 있으니 그건 바로 게임이었다. 실패하면 유저에게 끝을 알리는 게 아니라 재도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 그게 바로 ‘리플레이’이다.

게임에선 공략을 몰라도, 준비가 부족해도, 쓰러져도 다시 일으켜 또다시 도전할 수 있게 만들었다.

모든 순간이 최초 공략이나 다름없는 나에겐 아주 간절한 기능이기도 했다.

물론 아무 때나 쓸 수 있는 기술은 아니었다. 내가 깨달은 원리에 의하면 특정 장소가 자연의 이치로 설명되지 않는 커다란 혼란이 도사리고 있어야 했다. 예를 들자면 ‘버그’가 생긴 시스템처럼 말이다.

버그는 대부분 불편함을 야기하지만 가끔은 유저로 하여금 말도 안 되는 플레이를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 따지고 보자면 지금 순간은 버그 악용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래도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테니….”

원래대로라면 룽카의 난처한 목소리에 위로를 했을 타이밍이지만, 난 그보다 더 신경 써야 할 곳이 있었다.

“데이지, 엘더.”

내 드라이어드들도 과거로 되돌아온 것을 알아차릴까?

“…….”

엘더는 어쩐 이유에선지 아무 대답이 없었다.

“네.”

평소보다 조금은 높은 톤으로 답하는 데이지를 돌아봤다. 그리고 평소와 다른 모습의 데이지와 마주했다.

“데이지… 날개가 생겼구나.”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화관과 특별함을 상징한다는 날개.

처음으로 날개가 달린 드라이어드인 단델리온을 만났을 땐 내 드라이어드에게도 날개가 생기는 날이 올까 싶었었다.

화관과 날개는 드라이어드의 육성도를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길과 다름없었고 최종 진화란 느낌이 강했다. 그리고 드디어 수많은 모험 끝에 내게도 날개를 단 드라이어드가 생겼다.

데이지의 날개는 상상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내 드라이어드들에게 날개가 생긴다면 어떤 형태일지 상상했던 적이 있었다. 드라이어드들의 날개는 잎과 꽃, 가지가 날개의 형태로 형상화된 것이 전형적이었으므로 데이지의 날개는 그녀의 화관을 닮아 수수한 푸른 줄기에 붉은 데이지 꽃이 드문드문 피어 있는 형태로 상상했다.

그런데 막상 목도한 데이지의 날개는 장식과 무늬가 없어 밋밋한 검은색 반투명 날개였다. 3쌍의 타원형 날개는 데이지의 체구처럼 작았고 셀로판지를 잘라 붙인 듯하기도 하고 결이 없는 곤충의 날개 같기도 했다.

혹은 아직 완성 전의 단계를 보는 것 같기도 했다.

데이지는 몸을 꼬아 제 등을 보곤 부끄럽다는 듯이 살포시 웃었다.

“네, 제게도 날개가 생겼어요.”

모양이 어떻든 그녀는 진심으로 기뻐 보였다. 나 역시 아직 조잡한 모습의 날개지만 데이지가 성장한 결과이므로 무척이나 기뻤다.

“어? 원래 날개가 없지 않았나요? 어떻게 갑자기… 생겼지? 날개는 울창한 포레스트의 상징이라 길을 걷다가 바로 생길 수 있는 게 아닌데요.”

뒤늦게 룽카가 데이지를 보고 놀란 반응을 보였다. 하긴 조금 전까지만 해도 데이지의 등엔 아무것도 달려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는 나와 날개 구경에 삼매경인 데이지를 번갈아 보며 룽카가 뒤통수를 긁었다.

“그것보다… 데이지, 너에게 왜 날개가 생겼는지 알고 있어?”

내 물음에 데이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제게 한 번 더 기회가 생긴 거예요. 제희 님이 다시 일어날 거라 믿고 있다고 말해 주셨고 전 다시 일어났어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손목을 들어 내게 보여 주었다. 아직 푸른 고리를 확인할 수 있는 시점이 아닌데도, 그녀의 손목엔 푸른 고리가 존재하고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나와 엘더와 달리 반시계 방향으로 돌던 푸른 고리가 그중에 하나는 시계 방향으로 도는 것이 보였다. 더구나 고리의 수도 늘어나 있었다. 점선이 하나 더. 그리고 뚜렷한 실선이 하나 더.

‘다시 일어날 거라 믿고 있었어.’, 특별한 이의 믿음에 보답하는 일, 그건 역전의 전설이 품은 꽃의 존재의 가치였다.

다행히 데이지는 상황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녀는 또박또박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최후의 상황을 설명했다.

내가 야생 꽃에게 희망을 맡기며 보호막을 양보한 걸 본 데이지는 내 모든 의도를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이 이 비극을 돌이킬 수 있는 마지막 희망임을 굳게 믿었다. 드루이드가 죽어 가는 순간에도 드라이어드는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혼란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야생 꽃에게 간절히 그리고 단호히 손을 내밀었다. 너와 처음 만난 드루이드는 너를 하찮다고 말했을지 몰라도 네 눈앞의 드루이드는 널 희망이라 부르는 자다.

믿기지 않는다 하더라도 날 보아라. 내가 바로 희망이라 불리며 이 자리까지 온, 이만큼 성장한, 너와 똑같은 레드 데이지 꽃이다. 우리는 이대로 역경에 굴하는 꽃이 아니라 믿음을 보인다면 다시 일어나 보답할 수 있는 꽃이다.

결국 야생 꽃의 마음을 굳게 잠근 불신의 벽이 허물어지고, 내민 손은 맞잡아지며 하나로 이어졌다.

모두가 동시에 생명의 마지막에 달한 시점이었으나….

“제가 제희 님보다 먼저 죽어야 했어요.”

그래서 자결했노라고 덤덤하게 말하는 그녀를 똑바로 보는 것이 힘들었다. 이번에도 그녀의 죽음을 전략의 일부분으로 삼게 된 것에 마음이 찢어질 듯이 아팠기 때문이다.

데이지는 드루이드인 나보다 먼저 죽어서 그걸 발동해야 된다고 여겼다. 바로 그녀가 가진 특별한 잠재 능력 ‘부활’을 말이다. 내가 먼저 죽으면 부활은 불가능했고 모든 것이 끝이었다. 그러니 반드시 부활을 발동하기 위해 일부러 죽음을 앞당긴 것이다….

그녀는 전투 도중 내게 이어진 마음으로 물었었다. 우리가 이길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냐며.

그래서 난 그녀에게 지금의 데이지와 같은 성장 수준의 데이지가 하나 더 있다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고 답했다. 그저 과거 시간대의 데이지가 존재하니 떠올려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 중 하나였을 뿐이다.

그런데 데이지는 그 방법을 선택했다. 죽음과 부활을 통해 현재의 성장도를 가진 자신의 시간을 이곳 어딘가로 불러낸 것이다.

끝이 가까워지는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다시 태어난 데이지는 강력하게 염원했다. 그녀가 원한 것은 다시 한번 도전할 기회였다. 인내와 인고의 신화가 맺힌 꽃말을 가졌던 드라이어드의 왕이 강하게 염원하여 시간이 붙들린 것처럼, 희망의 전설이 맺힌 꽃말을 가진 드라이어드의 왕이 강하게 염원하여 시간이 되돌아왔다.

그 염원이 혼란이 빚어낸 자리에 대체된 새로운 퍼즐 조각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안심하기엔 이르다.

염원이 이루어지도록 세계가 최대한 실현 가능한 방향으로의 흐름을 일으키게 된다.

인삼 드라이어드의 왕은 아이들이 모두 죽지 않는 시간을 간절히 염원했다. 그 결과 뒤틀린 힘이 죽음으로써 떠났어야 할, 인삼 군락지에 살았던 아이들의 영혼과 시간을 붙잡아 그곳에 있던 드라이어드들의 영혼에 껍데기처럼 덧씌워 아이 행세를 하게 만들었다.

겉보기엔 아이들이 모두 죽지 않고 뛰노니 그토록 원하던 그림이 완성된 것처럼 보이나 실상은 아예 다른 그림인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단순히 시간이 되돌아온 것처럼 보여도 어쩌면 생각보다 그렇게 단순한 상황이 아닐 수도 있었다. 지금의 상황이 되기 위해 대체 어떤 방향으로 흐름이 일어나게 된 걸까? 어떻게 꼬여 버렸을까?

버그 악용이 정상적인 플레이라 불릴 수 없는 것처럼 그로 인해 발생하는 여파도 고스란히 유저가 떠맡아야 한다. 우리가 떠맡아야 할 여파가 짐작이 되지 않아 조금은 두려운 기분이 들었다.

본래 우린 불길한 바람이 불어왔던 방향으로 걷던 중이었으나 나의 의도로 멈추게 되었다. 이미 그곳에 다녀왔기에 무엇이 있는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잘 알고 있었다. 이대로 계속 가다간 갑자기 룽카와 민들레들과 헤어지게 된다. 그러니 헤어지기 전 대비를 해야 했다.

“지금부터 제가 하는 이야기를 잘 들으세요.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저는 우리가 저 방향으로 계속 걸어갔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있어요.”

우리가 갑자기 헤어지게 된 후의 일을 적당히 룽카에게 전달했다. 그가 우리와 헤어지고 나서 어떤 일을 겪었는지 알면 더 좋을 텐데, 안타깝게도 그는 과거로 돌아온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일단 라운은 안전해요. 포로로 잡혀 있긴 하지만 상태가 아주 나쁘진 않았어요.”

“대체….”

“만약 우리가 헤어지게 된다면 기이한 나무 가면을 쓴 사람들을 찾아요. 그리고 그들에게서 가면을 빼앗아 쓰면 옳은 길이 보일 거예요.”

가면은 우선적으로 구해야 할 중요한 아이템이었다.

“그리고…. 허공만 보며 석상처럼 가만히 움직이지 않는 사람들을 발견한다면 반드시 보호해 주세요.”

과거로 돌아온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일들이 있었다. 첫째, 노멀 필드의 가디언에게 시간을 빼앗겨선 안 됐다. 하나도 뺏기지 않는 건 어려운 일이니 최대한 뺏기지 말아야 했다. 시간을 빼앗기게 되면 가디언이 강해지기 때문이다.

둘째, 어딘가에 있을 과거의 데이지들과 합류해야 했다. 특히나 데이지의 마지막 부활로 인해 생성된 과거의 데이지와 말이다.

시간을 빼앗기는 걸 최대한 막고 지금의 데이지가 둘이 된다면 가디언을 상대로 승산이 있을 터였다.

“그러니까 가면을 쓴 사람을 발견하면 가면을 뺏고… 이상 행동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으면 반드시 보호하고, 저 드라이어드와 똑같이 생긴 드라이어드를 발견하면….”

룽카는 혼란스러워하면서도 열심히 내가 말한 주의점을 되새겼다.

겨우 얻은 또 한 번의 기회였다. 전처럼 허망하게 날려선 안 됐기에 가디언을 만나기 전 만반의 준비를 해야 했다. 이렇게 계획대로 진행하면 모든 게 잘될 것 같았다.

엘더가 갑자기 이상 행동을 보이는 걸 뺀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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