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의 전투는 모두 장난이었다는 것처럼 10개의 구슬이 일제히 검으로 변해 허공으로 떠올랐다. 가디언의 등 뒤에서 시퍼런 날을 세운 검들은 시계 방향으로 둥글게 회전하며 우릴 위협했다. 심판의 시간이라고 했던가. 그렇다면 당장 끝을 보겠다는 거겠지.
직감적으로 게임 속 보스 레이드로 가정하면 공략 타임이 끝나 보스 맵에 주둔한 모든 이들을 내쫓거나 죽이는 전멸기가 오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노인처럼 구부정하게 서 있던 가디언이 몸을 곧추세웠다. 그러곤 검들과 함께 허공으로 붕 날아올랐다. 반 시체나 다름없었던 몰골도 아름다운 드라이어드의 외형을 거의 되찾은 후였다. 성별을 가늠할 수 없는 중성적인 외형에, 마치 미의 신이 현신한 듯한 거룩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마지막까지 드라이어드의 어느 곳에도 모체를 나타내는 꽃이 피지 않았다. 그렇기에 미리 드라이어드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 않았다면 그저 인간이라고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드라이어드를 중심에 두고 회전하는 10개의 번쩍이는 검들은 흡사 태양을 형상화한 것처럼 보였다. 태양이 비추지 않는 음습한 지하 깊숙한 곳에서 부자연스럽게 떠오른 모습이 꼭 거짓 태양 행세를 하는 듯했다.
가디언이 손을 들자 그 손끝과 바닥의 문양에서부터 찬란한 금빛이 터져 나와 공동을 가득 채웠다.
명예를 나타내고 생명력이 충만한 봄을 형상화하며 무르익어 수확을 기다리는 결실의 빛을 표현기도 하는 찬란하고 영롱한 금빛이, 아이러니하게도 이치를 배반하고 죽음의 냄새를 풍기며 살아 있는 것들의 시간을 빼앗아 되살아난 치욕스러운 존재에 의해 피어나고 있었다.
한땐 오롯이 믿는 존재의 대표되는 빛깔이기에 보는 것만으로도 충만함을 느꼈던 금빛이지만 이제는 무척이나 끔찍하게 느껴졌다.
저 금빛은 아름다우나 매번 너무나도 음험한 비밀이 얽혀 있었다. 그 추악한 속내를 들키지 않기 위해 되레 화려한 겉모습으로 눈을 속이는 꼴처럼 느껴졌다.
쿵! 쿵!
허공을 떠다니던 검들이 하나둘 땅으로 내리 꽂혔다. 꽂힌 땅에선 번쩍이는 섬광이 튀었고 충격으로 인해 땅굴이 무너져 내릴 것처럼 크게 흔들렸다.
이대로 천장이 무너져 내린다면 땅굴에 있는 모든 생명들이 그대로 생매장을 당할 터였다. 물론 공격의 주체가 되는 가디언은 홀로 살아남을 것이다. 그리고 모두가 파묻힌 땅을 딛고 일어나 자신의 주인이었던 카수스를 찾아가겠지.
저 엄청난 힘은 카수스가 다시금 과거의 영광을 재현해 내는 데에 큰 기여를 할 터였다. 어쩌면 이 세계는 또다시 종말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
쿵!
바로 눈앞에 내리 꽂힌 검을 간신히 피했다. 이번에도 검이 땅에 강하게 꽂히며 금빛 섬광이 튀었는데, 그 파편 속에서 나는 무언가를 목격했다.
그건 어떠한 기억의 편린이었다.
정상에 우뚝 선 카수스의 모습이 보였고 그 아래로 신의 기사들처럼 그를 비호하며 서 있는 10그루의 드라이어드들이 보였다. 그중엔 익숙한 얼굴들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실루엣만 간신히 확인할 수 있는 정도였다.
그 모습은 은둔자의 정원에서 봤던 벽화의 내용을 떠올리게 했다. 10그루의 가디언을 모두 모은 카수스의 결말을 새겨 놓았던 벽화 말이다.
“여기서 빠져나가야 해!”
엘더가 다급하게 날 이끌었지만 이미 가디언의 타깃이 우리로 지정된 상황에서 도망치는 건 늦었다. 더구나 가디언은 최후의 기술을 선보이기 직전에 우리의 탈출구를 이미 봉쇄한 후였다.
쿵!
이를 되새겨 주려는 듯 나와 엘더의 사이로 검이 꽂혔고 절체절명의 순간에 엘더가 나를 밀치며 겨우 공격의 사정권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날 밀치기 위해 범위 내에 들었던 그의 팔이 검날에 깊게 베였다. 더불어 터져 나간 섬광의 파편이 엘더의 눈에 영향을 끼친 것인지, 그가 한쪽 눈을 가리며 괴로워하는 모습이 보였다.
“엘더!”
“큭….”
엘더는 자신의 치유를 뒤로 한 채 급한 대로 데이지를 일으켜 내 곁으로 보내려는 시도를 하다 실패했다. 부상 때문에 움직임이 성치 않은 듯했다. 아니, 그는 큰 혼란에 빠진 것처럼 몸을 비틀거렸다.
이런 위기를 숱하게 겪어 왔기에 그가 패닉에 빠졌다고 생각되진 않는다. 다른 무언가가 엘더를 방해하고 있었다.
엘더의 시선은 나와 데이지가 있는 곳이 아니라 그 너머에 닿아 있었다. 나는 볼 수 없는 무언가를 목도한 것처럼 불확실하게 흔들렸다. 또한 이따금 듣기 싫다며 고개를 세차게 흔드는 모습도 보였다.
그러고 보니 전투 도중 그에게 이상이 생겼던 것이 떠올랐다. 그는 청각에 문제가 생긴 것처럼 시끄럽다고 소리쳤었다.
팀 내 유일한 힐러에게 생긴 문제는 전투의 기세를 단번에 기울게 만들었다.
가디언이 엘더에게 특수한 공격을 보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엘더!”
그가 정신을 차릴 수 있도록 애타게 이름을 불렀으나….
“…….”
내 부름에 고개를 든 그의 얼굴은 죄책감이 가득해 보였다. 마치 나쁜 짓을 하다 들킨 어린아이와 같은 표정으로….
엘더의 눈에 박힌 섬광의 파편이 그의 한쪽 눈을 녹음을 가득 담은 색에서 형형한 금빛으로 만들고 있었다. 엘더는 바뀐 그 눈을 통해 현실과 왜곡된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쿵!
이번엔 데이지가 있는 곳에 검이 내리꽂히며 섬광을 터뜨렸다. 나와 그녀 사이에 거리가 있었기에 데이지는 곧바로 날 지키러 오지 못했고, 대신 움직일 수 없는 야생 꽃을 보호하며 가까스로 몸을 피했다.
난 또다시 터져 나온 섬광에서 기억의 편린을 목격했다.
10개의 필드를 재패하며 초월적인 힘을 가지게 된 카수스가 불사를 꿈꾸며 자연의 이치를 깨뜨린 이야기는 벽화를 통해 이미 알고 있었다. 10그루의 필드의 가디언들 또한 자신들의 드루이드를 위해 기꺼이 규율을 내던지고 힘을 모았다는 사실도.
그 장면이 기억의 편린에 담겨 있었다.
‘드루이드를 그 무엇도 해할 수 없는 신으로 만든다.’
10그루의 가디언이 하늘을 향해 무기를 치켜들었고….
그들은 자신들이 다스리는 필드의 시간들을 한데 모았다. 살아 있는 드라이어드들의 시간을… 말이다. 그리고 그 시간들은 오롯이 카수스의 영생을 위한 제물이 되어…. 균형을 이루던 자연의 이치가 모두 깨졌다.
난 반사적으로 시체에서 부활한 노멀 필드의 가디언을 바라봤다. 저 가디언의 부활은 생명들의 시간을 제물로 바쳤기에 가능했다. 이미 과거에 행해졌던 일의 원리와 동일했다. 저건 자신의 주인이 부활했던 방법으로 다시 살아났다.
땅굴 전체에 깔린 제단, 제물이 된 희생양들 그리고 가면을 쓴 교단원들….
그 가면의 문양에서 포인세티아를 발견한 건 우연이 아니었다. 식물의 문양이 있는 가면을 쓴 교단원들은 정확히 10그루의 가디언을 흉내 내고 있었던 것이다. 좀 더 주의 깊게 살펴봤다면 메스키트와 실새삼의 문양을 발견했을 것이다.
내가 정체를 알지 못했던 가면의 문양 또한 어떤 필드의 가디언을 상징하는 문양이었을 터.
카수스에 대한 일화는 폐쇄된 섬인 은둔자의 정원에 꼭꼭 숨겨져 있었고 정확한 사정 또한 기억의 편린에서 겨우 습득할 수 있었다. 그런 기밀이 어째서 드루이드도 아닌 평범한 사람들의 손에 들어간 건지 의문이 생겼다.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나조차 알지 못하는 10그루 가디언의 모체를 정확히 알아내 가면에 새기고 카수스가 부활한 방식을 입수하고 노멀 필드 가디언의 시체를 공수해 올 수 있었던 거지?
하지만 이런 의문은 전멸의 막바지에 달하는 순간 앞에서 무의미했다. 우리에겐 더 이상 저 무자비한 공격에 대응할 수단이 존재하지 않았고 피할 수 있는 방법도 달리 존재하지 않았다.
내 손목의 푸른 고리는 얇은 팔찌와 다름이 없어졌고, 마치 얼마 남지 않은 수명을 뜻하는 듯했다.
이건 <테라리움 어드벤처>로 다시 돌아와 세계수를 위시한 신이 되고자 했던 내게 어울리지 않는 결말이었다. 땅에 내리 꽂히는 검이 곧 10개에 달할 것이고 그때가 되면 전체를 쓸어버릴 수 있는 막강한 무언가가 터져 나올 테지. 그럼 끝이었다.
엘더는 알 수 없는 혼란에 빠진 상태였고 데이지의 상태도 좋지 않았다. 이곳을 빠져나간 사람들이 안전히 지상 위까지 도달했을 거란 보장도 없었고, 그러니 지원을 바라는 것도 무리였다.
길을 헤매던 룽카와 민들레가 가까스로 이곳에 도착하더라도 상황을 뒤바꿀 무언가는 없을 것이다.
난 땅굴에 도착한 직후 바곳이 데리고 왔던 제이를 떠올렸다. 금빛의 오라를 두른 내 아바타는 똑같이 금빛으로 빛나는 핸드폰을 들고 있었다. 호시탐탐 내게로 합쳐질 기회를 노리는 그 영혼의 조각은 어떠한 계시를 담은 금빛 핸드폰을 보여 주며 날 유혹했었다.
어쩌면 내가 아닌 제이의 모습으로 이곳에 당도하는 루트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의 나처럼 전멸 엔딩을 맞이할 수도, 운이 좋아서 이런 상황이 되기 전 노멀 필드의 드라이어드를 포섭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
한 가지 확실한 건 그 과정에서 세계수의 비호와 개입이 상황을 제이에게 유리하도록 도왔을 것이다.
내가 이 상황에서 또 한 번 초월적인 존재에게 기대게 된다면 영혼의 조각인 제이가 바라는 상황이 될 것이다. 내가 아바타와 똑같은 길을 걷게 된다면 우린 다시 합쳐지게 된다. 그리고 내 길은 다시금 세계수의 대리자의 위한 길이 되어 버린다. 그렇게 둘 순 없었다.
“모든 일의 원인은 결국 시간….”
이 공간을 움직이는 원천도 결국 가디언이 부활할 수 있게 만든 시간이었다. 죽음을 되돌리며 존재해선 안 될 것이 존재하게 된 시간. 하나도 뺏기지 말라는 조언이 비로소 크게 와닿는다. 최대한 뺏기지 않아서 가디언의 구슬이 활성화되는 걸 막았더라면….
난 인삼 군락지를 떠올렸다. 그곳 역시 이곳처럼 기괴한 시간의 흐름이 만든 공간이었다. 다만 그곳은 시간이 고여서 멈춘 곳이었다.
시간 정지는 세계 멸망의 여파로 혼란이 생긴 공간에 인삼 드라이어드들의 어긋난 소망이 뭉쳐 악화된 것으로 결국 그 공간을 지배하는 자들이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었다.
여기 멸망의 산물인 노멀 필드의 드라이어드가 존재하니 혼란이 도사리고, 공간을 지배할 가능성이 있는 드라이어드가 있었다. 무려 ‘역전의 전설’을 가지고 있으며, 나와 엘더의 푸른 고리와 다르게 고리의 회전 방향이 마치 시간을 거스르듯 반시계 방향으로 도는 드라이어드.
언젠가 내 드라이어드들을 만나게 된 것이 마치 게임을 즐겨 하는 날 위해 적재적소에 배치한 세계수의 안배처럼 느껴진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나와 가장 먼저 만났어야 할 인삼 드라이어드는 ‘일시 정지’, 메스키트는 ‘셧다운’, 마거리트는 ‘세이브 포인트’, 바곳은 ‘리셋’, 실새삼은 ‘로그인’. 그리고 다른 드라이어드들에게도 어쩌면 어떠한 부여된 역할 같은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지.
하지만 마거리트까지는 세계수의 안배였을지 몰라도 바곳과 실새삼은 오롯이 내가 찾아낸 날 위한 역할이었다. 이미 부여된 역할을 내가 알아낼 때까지 기다리는 게 아니라 내가 역할을 부여하는 것이다.
데이지는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는 꽃으로 되살아나는 부활의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녀가 피워낸 전설도 거스르는 역전의 위명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주특기 또한 공격을 다시 되돌리는 역재생 능력이었다.
이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희망이 데이지에게 있었다. 데이지는… 나의 ‘리플레이’였다.
쿵! 쿵!
10개의 검이 비로소 모두 땅에 꽂혔다.
콰아앙!
그리고 검들은 지체 없이 위험한 빛을 뿜어냈으며 일제히 폭발했다. 일대에 폭탄이 수십 개는 터진 것처럼 날카로운 검의 파편이 튀었고 사방이 막힌 공간에 피할 곳은 없었다.
난 폭발하기 직전, 위기를 느낀 내 영혼이 떨리는 것을 느꼈고 동시에 나도 모르는 새에 내 손 안에 까만 빛을 피워 냈다. 빛 무리는 빠르게 형체를 빚었고 곧이어 동그란 유리 구가 되었다. 언젠가 보았던 테라리움을 이루는 그 동그란 유리 용기가 떠오르는 물건이었다.
직감적으로 이것이 ‘보호’의 역할을 해 줄 수 있음을 알아차렸다. 내가 원한다면, 난 이 유리 용기 안에 숨어 폭발로부터 날 지킬 수 있을 것이다. 다만 크기가 작아 안에 담길 수 있는 건 고작 한 명 정도로 보였다.
폭발 소리가 들리자 난 데이지에게로 뛰어갔다. 그리고 유리 구를 야생 꽃에게 던졌다. 겉에 까만 빛을 띄는 유리 구는 내 손을 떠난 후부터 크기를 키우더니 이내 야생 꽃을 아담히 담아낼 수 있을만한 크기가 되었다.
잠깐 사이에 야생 꽃은 폭발에서 가장 안전한 유리 구 안에 존재하게 되었다.
등에 날카로운 칼날의 파편들이 다닥다닥 박히는 고통스러운 감각이 느껴졌다. 야생 꽃은 유리 구 안에서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날 바라봤다.
데이지는 희망이 맞다. 다만 그 희망을 피워 낼 수 있는 또 다른 기회이자 희망이 존재했다.
난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야생 꽃과 마주 보며 한 자 한 자 또렷하게 말했다.
“네가 우리의 마지막 희망이야. 다시 일어날 거라 믿고 있어.”
온몸을 찢기는 고통에 정신을 잃으며 내 마지막 말에 대한 야생 꽃의 대답이 무엇이었는지 듣지 못했다.
다만….
“이거… 일이 이렇게 될 줄은… 송구스럽습니다. 도움이 되기는커녕 짐만 되고.”
난처한 룽카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난 제자리에 우뚝 서서 밀려드는 기시감에 볼을 매만졌다.
대답을 듣지 못했으나 무엇인지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