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전생의 시간들을 잃는 것이 무한 다이아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가할 줄이야…. 이 변화는 그 어떤 때보다도 직관적으로 와닿았다.
나의 모든 능력의 원천은 이 무한으로 생성되는 다이아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러니 무한 다이아가 더 이상 무한이 아니게 되었다는 말은 내 모든 능력들도 심각한 너프를 당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상황을 대체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하지?
“제희 님….”
맹렬하게 머리를 돌리던 와중에 데이지의 힘겨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팀의 메인을 데이지로 돌리며 연결된 마음과 마음 사이로 들리는 전음이었다.
“제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어떻게 해야 이길 수 있을까요?”
데이지의 목소리에 포기는 어디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항상 그랬다. 그녀는 어떤 힘든 상황이 와도 포기하는 법이 없었다. 그녀가 성장 한계를 맞닥뜨렸던 하얀 데이지와의 전투에서도 죽음을 하나의 전략으로 염두에 두면서까지 결국 승리를 거머쥐었었다. 그리고 끝내 전설이 되었고 이 자리에 서 있기까지 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데이지는 계속해서 밀려나면서도 3자루의 검과 끈질기게 맞서 싸우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우리가 이길 수 있을까?
난 본체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 역시나 끈질기게 서포트를 하고 있는 과거의 데이지를 바라봤다. 열심히 노력하고 있지만 그녀가 참여하기엔 이 전투에서 레벨 차이가 너무 많이 났다. 저레벨이라도 수가 많다면 달라질 수 있었을까?
문득 아직 찾지 못한 어딘가에 있을 어린 데이지를 떠올렸다. 그녀 역시 데이지의 과거 시간의 일부였으나, 저레벨이 아닌 막 시작한 초보 단계 수준이었다. 아마 이 자리에 과거 데이지가 모두 모였어도 도움은 되지 않았겠지.
그렇다면…. 다시금 현재의 데이지 수준의, 3자루의 검을 홀로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의 데이지가 하나 더 있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게 된다.
그리고 그 생각은 고스란히 전투 중인 데이지에게 전해졌다.
“지금의 제가 하나 더….”
하지만 지금의 데이지가 하나 더 생긴다는 건, 그녀에게 포인세티아와 같은 분신 능력이 없기 때문에 무리였다. 그렇다면 단순하게 데이지가 지금보다 훨씬 더 강해지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것도 아니라면 아티팩트 안에 있는 다른 드라이어드들을 불러오거나…. 지원 요청이 온다거나….
하나 같이 가능성이 희박한 방법들이라 다시금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든다.
쿵!
공동의 벽에 아프게 처박히는 소리가 들리며 엘더의 힐링이 다급하게 터져 나갔다. 그는 데이지의 회복에 딜레이가 생기지 않도록 과도하게 힘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가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엘더의 힐링은 단번에 끝날 전투에 계속해서 코인을 넣는 것처럼 기회를 만들어 주고 있었다. 지금도 충분히, 아니 그 이상으로 잘해 주고 있었으나 그의 기술은 단일 회복보단 전체 회복에 특화되어 있으므로 현재의 전투 포맷은 그렇게까지 시너지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더구나 엘더 역시 포레스트에 동종의 꽃을 영입함으로써 전체 회복 기술이 더욱 보너스를 받게 되어, 같은 힘을 소모하여 기술을 사용하는 거라면 그가 맡는 회복 대상이 하나가 아닌 여럿인 것이 훨씬 효율이 좋았다.
데이지는 쓰러진 자리에서 일어나며 곧바로 검을 향해 뛰어들지 않고 어딘가를 바라봤다. 바로 공포에 질린 눈으로 무기력하게 주저앉아 있는 야생 꽃을 향하고 있었다.
데이지가 생각하고 있는 게 바로 이해되었다. 그녀는 당장 지금보다 더 강해지려면 포레스트에 꽃을 영입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동종의 꽃의 영혼을 위탁 받는 건 카드 게임으로 치면 +1이 더 붙는 강화, 초월 시스템과 같았다.
레벨 업은 한계가 존재하고 그 한계를 뚫는 것이 같은 카드를 밑거름으로 성장하는 방법이었다.
지금이 딱 절실한 상황이었으나 안타깝게도 야생 꽃은 여전히 나와 함께하는 것을, 내 영혼에 자신을 맡기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외따로 떨어져 있어 봤자 가디언의 눈먼 공격이나 떨어지는 잔해에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위급한 상황이었다.
야생 꽃의 능력은 퇴화할 대로 퇴화해 성장도가 역행하고 겉에 모체도 드러나지 않을 정도였으니 그녀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선 우리에게로 오는 것 외에 선택 사항이 많지 않았다.
차라리 제 발로 일어나 도망이라도 갔다면 모를까, 지금은 겁에 질려 다리가 움직이지 않는 건지 주저앉아 있는 게 고작이었다.
하지만 죽음을 눈앞에 두면서까지 드루이드에게 배신당한 감정을 잊지 못하는 야생 꽃의 심정도 이해가 갔다.
드라이어드마다 사정을 다를 테지만 어쩌면 마거리트처럼 세계수 밖을 나오길 무척 고대하던 꽃일 수도 있다. 그토록 기다리던 개화를 이루었지만 기다리는 것이 매몰찬 주인의 버림이라니.
영혼의 연결이 해제되는 고통은 꽃에게 굉장히 참혹한 현실을 선사한다. 그 고통에 야생 꽃은 몸도 마음도 영혼도 다쳤을 테니 이해해야만 한다.
“내 포레스트로 와요. 날 섬겨요.”
데이지가 야생 꽃을 포섭하려는 시도를 보였다. 그리고 그녀가 부재로 인해 망나니처럼 허공을 날아다니는 3자루의 검은 과거의 데이지가 도맡았다.
전혀 상대가 되지 않으나 과거의 데이지는 무리하게 맞서려고 하지 않고 적의 관심이 끊기지 않도록 유도하며 재빠르게 도망 다니는 전략을 취했다. 공격을 버리고 완전히 회피로 돌아서면서, 과거의 데이지는 공동의 천장과 벽을 타고 다니며 데이지의 부재 시간을 메꿨다.
“당신의 영혼을 내게 위탁하면 더 강해진 내가 저 검들과 맞서 싸울 수 있어요. 지금 그 힘이 절실해요!”
데이지는 더 강해져야 한다고 집착적으로 생각했다. 모든 가능성이 희박한 지금 유일하게 기대를 걸어 볼 만한 것이 자신의 성장이었다. 그런데 난 그 방법에 대해 약간은 회의적이었다. 더 강해진 데이지가 현재의 3자루의 검을 넘어서 4자루, 5자루를 상대할 수 있게 된다 하더라도, 그녀는 최종적으로 8자루의 검을 모두 상대할 수 있어야만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내 전생의 시간들을 저 가디언이 제물로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고 있었고, 곧 9개째의 구슬이 완전히 붉은색으로 변할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그렇다면 데이지가 최종적으로 상대해야 할 검의 개수가 9개로 늘어나게 된다.
수많은 동종을 포레스트로 영입하여 가디언급의 실력을 갖지 않는 한….
“이대로 포기할 수 없어요! 난 내 드루이드를 지켜야 해요!”
데이지는 주저하는 야생 꽃을 질책했다. 계속되는 패배가 그녀를 다급하게 만들고 있었다. 데이지는 최악의 경우 자신이 리타이어 되고 상대를 잃은 검이 날 뚫는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야생 꽃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주저앉은 채로 뒤로 물러나며 데이지와의 거리를 벌렸다.
그 모습에 데이지가 아픈 표정으로 이를 악물었다. 모진 말을 내뱉지 못하는 게 그녀의 천성이긴 하나 저 모습에서 과거의 자신을 보고 공감한 걸 수도 있다. 그녀 역시 열매에서 개화한 직후 드루이드에게 버려진 아픈 과거가 있으니까.
야생 꽃을 설득하기 위해 오랜 시간을 소비할 순 없었다. 도망만 다니던 과거의 데이지가 사방에서 조여 오는 검 날에 상처를 입으며 쓰러지기 직전이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데이지가 다시금 전투에 뛰어들며 포레스트 영입이 흐지부지되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오랫동안 맞부딪히다 보니 공격 패턴을 깨달은 것인지 처음보단 비교적 수월하게 대응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3자루의 검의 공격엔 미묘한 시간차가 존재했는데, 한꺼번에 공격하지 않고 첫 번째 검이 공격을 가하면 그 후에 두 번째 검이 공격을 가하는 순이었다.
그 차이가 좁아 평범한 사람이 볼 땐 동시에 공격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기민한 데이지는 이를 알아차리고 미리 공격이 들어올 지점에 단검을 밀어 넣어 방어하는 전략을 취했다.
“큭… 젠장…! 시끄러워!”
전투가 진행되던 도중 엘더에게 이상이 생겼다. 그의 눈은 무척이나 혼란스러워 보였고 이따금 머리를 세차게 흔들며 상념을 털어 내려는 행동을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집중력이 간간히 흐트러지고 있음을 보여 주듯 회복 기술이 드문드문 끊기기도 했다.
“엘더, 괜찮아?”
내 물음에 화들짝 놀라 날 바라본 엘더에 의해 진득하게 이어지던 회복 필드가 잠깐 끊겼고, 때마침 나가떨어진 데이지가 제때에 회복을 받지 못해 딜레이가 생겼다.
3자루의 검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데이지를 향해 쇄도했고 위기의 순간….
콰득…!
과거의 데이지가 방패를 자처하며 뛰쳐나가 본체에 쇄도하던 공격을 죄다 자신이 받았다. 엘더가 다급하게 회복을 이었으나 치명상을 입은 과거의 데이지는 끝내 쓰러지고 말았다.
3자루의 검이 꽂힌 곳에서 투명한 피가 흘러나와 사방으로 튀었고 지척에 있던 야생 꽃이 그 피를 뒤집어썼다. 두려움이 가득한 그 얼굴이 그 즉시 패닉 상태가 되었다.
“데이지!”
사르륵….
엘더의 회복이 재빠르게 상처를 수복하려 했으나 꽂힌 검이 발악하며 신체를 손상시키는 속도가 더욱 빨랐다. 결국 과거의 데이지의 가장자리부터 빛이 되어 조각조각 떨어져 나가 꽃잎처럼 휘날리기 시작했다. 죽음이 가까워진 것이다.
과거의 데이지는 이 땅굴의 기묘한 힘이 만들어 낸 허상이기에 부활 특성이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그때의 데이지에겐 위탁 받은 영혼이 데이지2가 끝이었으므로 더 이상의 부활 기회가 존재하지 않기도 했다.
“드루이드 님, 더 이상 함께하지 못해 죄송해요.”
과거의 데이지는 빛이 되어 사라지면서까지 내게 미안함을 가득 담은 웃음을 지어 주었다. 아픈 미소였으나 자신의 죽음으로 절망하지 말라며 안도하라 위로하는 듯했다.
“제가 없어도… 드루이드 님은 반드시….”
끝내 과거의 데이지는 완전히 빛이 되어 공동을 흩날렸고 이내 빠른 속도로 바닥의 문양을 향해 흡수되었다.
가디언의 남은 2개의 투명 구슬 중 한 개가 완전히 붉은 액체로 가득 차게 되었다. 과거 데이지의 시간을 마지막으로 9번째 구슬을 활성화하기 위한 제물이 완성된 것이다.
그리고 완성되기가 무섭게 10번째 구슬에 붉은 액체가 빠르게 차오르고 있었다.
과거의 데이지가 적재적소에 훼방을 놓았기에 그나마 본체가 3자루의 검에 비등하게 맞설 수 있었다. 지금부터는 데이지 혼자만의 싸움이었다.
“왜… 그렇게까지….”
절망에 찬 아주 작은 목소리가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의문을 표했다. 야생 꽃이 얼굴에 묻은 투명한 피를 발작적으로 닦아 내며 과거 데이지의 선택에 의문을 표하고 있었다.
야생 꽃이 날 믿지 못하고 과거 데이지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며 데이지의 부름을 거부하는 사이, 우리는 체력만 소모할 뿐인 전투를 이어 갔고 끝내 가디언의 10개의 구슬이 모두 붉은색을 띠게 되었다.
“심판의… 시간이다.”
번쩍, 마침내 10개의 붉은 구슬이 모두 활성화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