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68화 (468/604)

등에 무거운 짐을 짊어진 것처럼 구부정한 자세를 취한 가디언은 한 팔을 흐느적거리며 흔들었다. 드라이어드가 가진 위명이 아닌 겉모습만 놓고 보자면 속도가 매우 느리고 방어력도 나빠 보여서 도저히 날렵한 공격을 휘두르는 데이지의 적수가 되지 않을 것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막 부활해서 회복을 다 끝내지 못한 지금 이 순간이 저 가디언의 가장 취약한 순간일 수도 있었다. 데이지도 이를 느낀 것인지 여느 때와 달리 재빠르게 선제 공격에 나섰다.

두 개의 단검을 그러쥔 데이지가 도움닫기를 통해 높이 뛰어오르더니 허공에서 가디언의 머리를 향해 공격을 내질렀다. 데이지의 검이 사정권 내에 닿을 때까지도 가디언은 마땅히 공격 모션을 보이거나 하지 않았다. 이대로 쉽게 선타를 허락하나 싶었는데….

카캉!

철과 철이 크게 맞부딪치는 날카로운 소리가 공동 안에 울려 퍼졌다.

데이지의 공격이 적중하기 직전, 가디언의 등 뒤에 떠오른 10개의 구슬 중 1개의 붉은 구슬이 요사스럽게 빛나더니 장검으로 변해 공격을 막은 것이다.

캉! 카강!

공격이 단번에 막혔어도 데이지는 물러서지 않고 몇 번 더 습격을 시도했지만 갑자기 나타난 검에 의해 번번이 공격이 막혀 어쩔 수 없이 뒤로 물러났다.

허공을 떠다니는 검은 마치 스스로 의지를 가진 것처럼 자유자재로 날아다녔고, 검의 주인인 가디언이 직접 쥐고 움직이지 않아도 공격의 반동을 가뿐하게 막아 내는 파워와 모든 공격의 궤도를 쫓는 민첩함을 가지고 있었다.

데이지가 뒤로 물러서자 가디언의 앞에서 춤을 추던 검도 뒤로 물러나 명령을 기다리는 집사처럼 가지런히 시립했다. 여전히 본체는 제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겉모습은 저래도 역시 가디언은 가디언이라는 건가…. 그래도 다행인 건 우리가 막음으로써 반대쪽으로 뛰어간 사람들의 대피 시간을 벌게 되었다는 거다.

“좀 더 공격적으로 굴어도 괜찮을 거 같아.”

날아다니는 검을 파훼시키면 본체에 손상을 가할 수 있는 구조로 보였다. 물론 가디언의 능력이 겨우 저 검 하나라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공략은 본래 부딪혀 보면서 알아가는 법이다.

데이지는 이번엔 다치더라도 엘더의 회복을 믿고 좀 더 깊숙이 파고들기로 작정했다.

그녀가 다시금 공격을 감행하자 시립하고 있던 검이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를 맞았다. 검은 데이지가 먼저 공격하지 않는 한 움직이지 않았고, 되레 역공을 펼치려는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사냥을 하겠다던 말과 달리 지루할 정도로 방어에만 집중하는 태도가 몹시 수상쩍었지만, 만약 탐색을 위해 여유를 부리고 있는 거라면 허를 찔러 주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다.

여러 차례 검과 맞부딪치던 데이지가 돌연 손에서 줄기를 뻗어 검을 붙잡았고 검이 움직이는 궤도를 둔하게 만든 틈을 타 가디언의 본체에 직접 공격을 시도했다.

그 순간, 남은 9개의 구슬 중 또 다른 붉은 구슬이 요사스러운 빛을 내며 반짝이더니 또다시 검으로 변해 데이지에게 맞섰다.

캉!

호기롭게 내질렀던 그녀의 단검이 다시금 허공에 떠오른 검에 막혀 버렸다.

“아, 젠장. 이런 식이었어?”

두 개의 단도를 든 데이지에게 이젠 두 개의 검이 허공에 떠올라 맞서게 되었다.

“저 붉은 구슬이 전부 무기라고 봐야겠네.”

10개의 구슬 중 붉은 구슬은 8개, 그러니 가디언이 미래에 부릴 수 있는 무기도 6개나 더 남아 있음을 뜻했다. 만약 남은 2개의 투명한 구슬도 활성화가 된다면 무기가 더 늘어나게 되는 셈이었다.

이제야 가디언이 우릴 상대로 얼마나 여유를 부리고 있는지 깨달았다. 한 번에 모든 무기를 활성화시킨다면 진작에 수세가 밀렸을 것이다.

단 한 자루의 검이 드라이어드 한 명을 가지고 놀 수 있는 수준이었다. 10개의 무기가 모두 활성화된다면 10그루의 드라이어드에 버금가는 힘을 홀로 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로써 노멀 필드의 가디언의 특성은 어쩌면 공격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아직 드라이어드의 모든 능력이 드러난 것은 아니나 적어도 실새삼처럼 적절한 파훼법이 필요한 지원형 특성이 우세한 드라이어드가 아니라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검이 두 자루로 늘어나자 기세가 변했다. 이젠 방어에만 주력하는 것이 아니라 공격을 함께 감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데이지는 두 자루를 무리 없이 상대할 수 있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바로 공격 역재생이었다. 데이지가 모체의 전설을 일구며 깨우친 힘으로, 그녀가 공격 기술을 펼치면 그 공격이 고스란히 역재생되며 적에게 2배의 타격을 입히는 기술이었다.

데이지는 두 자루의 검이 모두 자신을 공격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거리를 벌리며 뒤로 물러 났다. 두 검이 같은 궤도에 올랐을 때, 하나의 검을 향해 기술을 펼치며 공격한 후 곧바로 역재생된 공격이 다른 검을 타격하도록 만들었다.

실력 좋은 두 드라이어드를 동시에 상대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으면서도 리플레이 기술을 통해 결국 빈틈을 만들어 냈고 다시금 가디언의 본체를 향해 공격을 가했다.

그러나 우려했던 대로 3번째 붉은 구슬이 빛을 내었다.

“하… 역시나 호락호락하지 않은데.”

어느새 허공에 떠오른 검은 세 자루가 되었다. 가디언은 데이지의 한계를 시험하며 무기를 한 자루씩 차례로 꺼내는 것처럼 보였다.

뒤늦게 틈을 봐 과거의 데이지가 가세했지만 그녀의 실력 역시 과거에 머물러 있었기에 검 하나를 제대로 상대하는 것도 벅차 보였다.

퉁!

과거의 데이지가 던진 부메랑이 검에 부딪혀 공격 방향이 어긋났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데이지 본체에 공격이 몰리지 않도록 공격 궤도에 훼방을 놓는데 그쳤다.

그래도 전투 센스는 실시간으로 흡수하는 학습 능력은 타고난 능력이었던지라 시키지 않아도 최적의 협동 능력을 보여 주고 있었다. 현재의 실력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이었다.

카강! 캉! 촤악!

데이지는 엘더의 회복력을 믿고 좀 더 한계까지 결전을 끌고 갔다. 하지만 결국 부상을 입는 건 피할 수 없었다. 세 자루의 검은 쉴 새 없이 집요하게 데이지를 향해 쇄도했고 공격이 세 가지 패턴으로 늘어나니 동일 궤도로 유도하는 것도 어려워 보였다.

즉, 세 자루부터는 데이지의 리플레이 능력이 잘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만약 이 자리에 16번째 테라리움 연금탑까지의 경험을 가진 데이지가 아닌, 전설의 힘을 피워 낸 은둔자의 정원 방문 시기쯤의 데이지가 있었다면 상대할 수 있는 검의 수가 더 늘어났을지도 모른다.

과거의 데이지는 엘더의 회복력을 믿고 무리하게 공격을 감행할 수준이 되지 못했다. 이건 성장도에 따른 차이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과거 그녀를 극한까지 몰고 갔던 연금탑의 하얀 데이지, 그 드라이어드를 웃도는 공격을 허공을 떠다니는 검 한 자루가 펼치고 있었다.

“이래선 끝이 없겠어.”

데이지가 지금 활성화된 세 자루의 검을 이겨내 봤자 가디언은 기다렸다는 듯이 4번째 검을 활성화시킬 것이다. 그걸 이겨낸다면 또 다른 검이 나타날 테고 이걸 붉은 구슬이 모두 소모될 때까지 반복하겠지.

하지만 데이지의 능력으로는 지금 수준의 공격을 버텨 내는 것이 최선으로 보였다. 여기서 무기가 더 늘어난다면 데이지의 통제를 벗어난 검이 향할 곳은 뻔했다. 나와 엘더였다.

우웅, 우웅….

별안간 공동 안에 불길한 소리가 가득 차며 섬뜩한 바람이 휘몰아쳤다. 춤추는 세 자루의 검이 불길한 기운을 가득 담은 바람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건 순식간에 땅굴 전체를 훑어 노멀 필드를 제외한 다른 필드의 드라이어드들을 강제로 아티팩트로 보내 버린 바람이었다.

“윽!”

바람은 단순히 불길한 기운만 가득 담은 것이 아니라 살기도 담고 있었다. 특수 기술까지 발동하자 데이지는 크게 버거워하며 결국 나가떨어졌다. 급한 대로 과거의 데이지가 일시적 무방비 상태인 본체로 향하는 공격을 막기 위해 몸을 날렸지만 역부족이었다.

공동 안에 달짝지근한 향이 짙게 풍기며 생명력이 충만한 기운이 다급하게 끌어 올려졌다. 엘더의 손가락에 자리한 붉은 보석이 경고등처럼 빛나더니 맑고 깨끗한 새하얀 빛이 터져 나와 쓰러진 데이지를 감쌌다.

엘더의 힘으로 회복한 데이지가 재빨리 자리를 털고 일어나 다시금 전투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가 리타이어에 가까워지는 빈도가 높아지고 있었다.

투두둑, 툭.

공동에 휘몰아치던 바람이 한 바퀴 휩쓸고 빠져나가자, 내 손목의 푸른 고리가 엄청난 속도로 사라지더니 벌써 면적이 반 이상이 줄어든 후였다.

삑, 삑, 삑, 삑.

더구나 불길한 기계음이 내 주머니에서 터져 나오고 있었다. 알람의 출처는 핸드폰이었다. 위급 상황이 발생했을 시 울리는 재난 경보음이었고 핸드폰에서 이 알람을 듣는 건 이 세계로 와서 처음이었다. 그동안 숱한 위기를 겪었지만 재난 경보음이 울린 일은 없었는데….

공격을 강화한 가디언, 쓰러진 데이지, 반 이상 사라진 내 전생의 시간들…. 좋지 않은 기우들이 차곡차곡 탑을 쌓는다.

삑, 삑, 삑, 삑.

경보음이 시끄러울 정도로 울려 퍼지고 있었지만 핸드폰을 꺼내 확인하는 것이 두려웠다. 핸드폰을 꺼내면 대체 무슨 상황을 마주하게 될까? 어떤 최악의 상황이 기다리고 있으려고.

“저건 대체 어떻게 해치워야 하는 거야!”

엘더가 이를 악물고 초조한 기색을 내비쳤다. 말은 그렇게 해도 똑똑한 그이니 깨달았을 것이다. 가디언을 지키는, 예비된 10개의 무기에 모두 맞서지 않는 한 본체를 쓰러뜨릴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현재 있는 전력으로는 기껏해야 4개가 한계임을.

언제까지 외면할 순 없었다. 결국 엘더에게 눈빛으로 응원을 보낸 후 알람이 멈추지 않는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땅굴에 들어온 이후 핸드폰으로 확인할 수 있는 건 <무한 다이아>뿐이었다. 그마저도 마치 에러가 발생한 것처럼 자꾸 핸드폰이 꺼져 버렸지만.

핸드폰을 꺼내 확인하니 역시나 <무한 다이아> 화면이 가장 먼저 나타났다. 그리고 그 화면 속에서 난 도저히 믿기 힘든 걸 발견하고 말았다.

<무한 다이아>는 말 그대로 ‘무한’으로 다이아를 모으는 게임으로 난 다이아의 최대 보유 수치인 9의 향연을 달성한 업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 한계치는 모험을 거듭하며 결국 뚫렸고 난쟁이들은 항상 모아 둔 다이아를 소비해 달라고 날 재촉했었다.

그런데 다이아 보유 수치에… 이상이 생겼다. 있을 리 없는 한계가 생겨 버린 것이다.

최대 보유 가능 수량

있을 리 없는, 있어선 안 되는 단어가 <무한 다이아>의 최상단 UI의 다이아 보유 수 옆자리에 떡하니 자리하고 있었다. 기이하게도 내 <무한 다이아>의 소지 가능 수량에 리밋이 걸려 버렸고 그 리밋 수치는 시간이 갈수록 하락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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