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체가 몸을 일으키자 교단원들의 울부짖음은 더욱 격렬해졌고 빛을 내는 바닥의 문양도 크게 웅웅 소리를 내면서 진동했다. 머리가 울릴 정도로 심한 소음 공해에 멀쩡히 사고하는 것이 힘들 지경이었다.
분명 사냥 시작이라고 했다. 그렇다는 건 지금부터 저 드라이어드가 가담하겠다는 뜻이었다.
이대로 밖으로 나가면 바로 인질들이 머무르는 공동이 나왔다. 아마 제일 먼저 타격을 받을 건 그들일 테다.
파앗!
갑자기 바닥이 진동하는 걸 멈추고 시야가 눈부신 빛으로 인해 점멸했다. 간신히 눈을 떴을 땐 주변의 모든 교단원들이 전부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드라이어드의 등 뒤에 전에 없던 10개의 빛나는 구슬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7개는 찰랑이는 붉은색의 액체로 가득 차 있었고 남은 3개는 텅 비어 있는 투명한 유리구슬처럼 보였다. 직감적으로 저 10개가 모두 차 버리면 비극적인 일이 일어날 거란 생각이 들었다.
사냥을 시작하겠다고 했으나 드라이어드는 제단에서 몸을 일으킨 채 가만히 서 있었다. 무언가를 기다리는지 아니면 아량을 베푸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건 유일하게 쓰러지지 않고 서 있는 나와 데이지를 바라봤다. 이글거리는 붉은 안광이 소름끼쳤다.
전투를 해야 될 타이밍이라 깨달은 데이지가 로브를 벗어 던지고 무기를 꺼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라이어드는 움직이지 않았다.
“너는… 내 필드의 아이로구나….”
말하는 걸 보면 역시나 노멀 필드의 가디언이 맞았나 보다.
드라이어드의 중성적인 목소리가 좁은 방 안을 웅웅 울렸다. 입은 움직이지 않았고 마치 전음을 하는 듯했다.
“당신을 내 필드의 가디언이라 생각하지 않아.”
엄청난 꼴을 하고 있는 드라이어드 앞에서도 데이지는 기죽지 않았다.
근육과 피부가 반 이상 재생되었으나 아직 형태는 흉측했고 그것이 대체 어떤 모체를 가지고 있는지 전혀 특정할 수 없었다. 드라이어드라면 반드시 몸 어딘가에 모체를 장식하고 있는데 아무리 살펴봐도 보이지 않았다.
영혼의 연결을 맺기 전 힘이 쇠퇴했던 데이지처럼 말이다.
“넌 대체 뭐지? 모체가 뭐야? 이름 정도는 가르쳐줄 수 있겠지?”
대화를 할 수 있는 정도의 이지가 있다면 도박을 걸어 볼 만했다.
드라이어드의 모체를 알아낸다는 건 그 드라이어드에 대해 대부분의 정보를 알 수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가디언인 만큼 희귀한 식물일 테지만 어느 정도 유추를 할 수 있었다. 간혹 특성을 그대로 나타내는 이름을 가진 식물이 있기도 하고.
이런 질문은 약간의 시간 끌기 정도밖에 되지 않겠지만 지금으로선 당장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기에 별수 없었다. 저건 노멀 필드의 가디언이다. 데이지 혼자선 당해 내기 힘들 것이다.
“글쎄… 이제 와서 그런 게 중요하겠는가…. 나는 이미… 오래전에… 이름을 잃은 자이니라…. 나조차도…. 내가 무엇인지… 알 수 없노라….”
“…….”
자신의 정체를 모른다고? 드라이어드란 자각만 있고 근원이 되는 모체를 잊어버렸다니. 상태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다시… 피어났다는 거지.”
그 말을 시작으로 드라이어드가 베푸는 잠깐의 아량이 끝난 것이 분명했다. 엄청난 위압감이 어깨를 짓누르며 칼날을 머금은 듯한 거센 바람이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여기 계속 있으면 위험해요!”
데이지가 다급하게 날 감싸고 드라이어드가 있는 방을 빠져나갔다.
스르륵….
방을 빠져나가면서 방 안의 모든 쓰러진 교단원들이 로브만 남기고 연기처럼 사라지는 걸 보았다. 그리고 텅 비어 있던 3개의 구슬 중 한 개에 약간의 붉은 액체가 차오르는 것도 확인했다.
그들은 드라이어드가 부활하면 자신들에게 영생을 줄 거라 굳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그들 역시 제물이 되는 길은 피할 수 없었다. 그들은 깨워선 안 될 것을 깨웠다.
툭, 투두둑, 툭.
손목의 푸른 고리가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속도로 끊어져 사라지고 있었다. 내 전생의 시간들이 한낱 제물이 되어 바쳐지고 있는 것이다.
방 안의 교단원들이 모두 제물이 되어 채워진 붉은 액체의 양과 내 전생의 시간들이 사라지는 속도로 계산해 보면… 10개의 구슬이 모두 채워지는 건 금방이었다.
“이런….”
애초에 이곳에 내가 온 것이 최악의 결과를 낳은 걸지도 모른다. 엄청난 시간이 누적된 나는 그 무엇도 대체할 수 없는 최고의 제물이었다.
“라운 씨! 괜찮아요? 움직일 수 있어요?”
“읍! 읍!”
아직까지 가면과 로브로 정체를 감춘 나를 적이라 생각했는지 라운은 격한 반응을 보였다. 옆에 데이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황이 고조되자 바로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
“진정해요. 저예요.”
손도 대지 못하도록 심하게 몸부림을 쳤으나 데이지가 가뿐하게 단검으로 줄을 끊어 냈다. 이어서 다른 인질들을 포박하고 있던 줄도 풀어냈다.
엄청난 기운이 우리가 지나온 등 뒤의 통로를 통과하며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얼른 도망가요!”
내 말에 주저앉아 있던 사람들이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나 통로 반대편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 동안 묶여 있던 탓인지 제대로 뛰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다가오는 공포는 그들을 무릎걸음으로라도 도망가게 만들었다.
데이지가 쓰던 가면을 라운에게 넘겨줄 때도 그는 얼떨떨한 표정을 풀지 못했다. 아직까지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보다.
“저… 다른 분들은….”
“룽카 씨와 함께 왔는데 헤어졌어요. 드라이어드 부를 수 있어요?”
“아니요. 갑자기 아티팩트로 돌아가서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습니다.”
“이런… 역시나 노멀 필드 드라이어드가 없구나. 룽카 씨도 그렇고, 어째서 두 분 다 가장 흔한 노멀 필드 드라이어드 하나 없는 거예요?”
“설마 지금 노멀 필드만 소환이 가능한 건가요?”
고개를 끄덕이자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하냐며 놀라워했다.
“어쨌든 지금은 도망가요.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요!”
대체 어쩌다 잡혀 왔는지도 묻고 싶었지만 그럴 겨를이 없었다. 라운은 황급히 제대로 걷지 못하는 사람들을 부축해 가며 이동했다.
“아, 데이지!”
인질 중엔 야생 레드 데이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상황이 좋지 않았지만 데이지의 포레스트에 포함시킨다면 힘이 되어 줄 것이다.
사람들이 기어서라도 도망가는 와중에도 주저앉은 채 일어나지 못하는 붉은 머리의 소녀가 보였다. 다 해진 옷과 축 처진 어깨가 다시금 데이지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오르게 만들었다. 그때의 데이지보단 체구가 좀 더 컸지만 역시나 방치된 지 오래된 걸로 보였다.
야생 데이지는 고개를 들어 불안한 눈으로 날 보고 있었다. 그 눈엔 두려움과 불신이 가득해 보였는데 내게서 자신을 버린 드루이드를 겹쳐 본 걸지도 모른다.
레드 데이지들은 기본적으로 웃음이 많았다. 비록 본 건 둘뿐이지만 언제나 봄처럼 따스한 미소를 달고 있었다.
우리 데이지가 아이의 모습으로 테라리움을 떠돌 적에도 힘든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미소를 잃지 않았었지. 밝고 명랑한 기운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좋은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그렇기에 밝은 미소는 레드 데이지의 트레이드마크라 생각했었는데, 눈앞의 야생 레드 데이지의 얼굴엔 무기력만 가득했다. 오래전에 웃음을 잃어버린 것처럼 어떠한 표정도 존재하지 않았다.
“데이지, 지금이라도 저 아이를 포레스트로….”
포레스트의 왕으로서 동종의 드라이어드를 권속으로 두려면 힘으로 굴복시켜 우위를 보여 주면 됐다. 하지만 저 야생 데이지는 대항할 힘이나 의지가 전혀 없어 보였다.
“그러고 싶지만 거부의 의지가 보여요. 이러면 일이 복잡해져요.”
포레스트에 들어가길 거부한다고? 분명 데이지에게 애타게 도움을 요청했던 목소리는 저 야생 꽃일 테다.
과거 열매 안에 있던 데이지2의 경우도 떠올려 보면 어쩌면 ‘부른다’는 개념은 드라이어드 자신의 의지로 행하는 것이 아닌 왕이 될 덕목이 있는 드라이어드들의 이끌림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정작 왕을 불러 놓고도 포레스트에 들어가기를 머뭇거리는 거다.
어쩌면 저 야생 꽃이 거부의 의사를 보이는 건 나 때문일 수도 있다. 드루이드에게 받은 배신이 아직까지 마음속에 남아 있어 함께하기를 두려워하는 거겠지. 하지만 여기서 그 마음이 풀리도록 기다려 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사냥….”
그리고 그 시간은 확연히 줄어들었다. 아주 느릿한 걸음으로 끝끝내 우리가 있는 곳까지 노멀 필드의 가디언이 당도했다. 등 뒤에 원을 그리며 떠오른 10개의 구슬은 벌써 붉은 구슬이 8개가 된 참이었다.
“제희!”
인질들이 빠져나가며 이상함을 느낀 건지 엘더와 과거의 데이지가 뛰어 들어왔다.
“저건… 말도 안 돼.”
그리고 눈앞의 추악한 모습을 한 드라이어드의 정체를 눈치채고 믿기지 않는다는 반응을 보였다.
“설마 저게 노멀 필드의 가디언이라고…?”
엘더는 특히나 충격이 아주 커 보였다. 그는 메스키트를 아주 잘 따랐다. 메스키트는 데저트 필드의 가디언으로, 엘더는 은연중에 그녀로 인해 자신의 필드의 가디언을 무척이나 기대했었다.
실새삼을 만났을 때도 포인세티아를 만났을 때도 틈틈이 노멀 필드의 가디언을 언급했을 정도였으니까.
그렇게 기대했던 가디언이 저런 모습을 하고 있으니 얼마나 충격이 클까.
“저건 부활했어. 마치 카수스처럼 말이야.”
“카수스…?”
기이하게도 내 말에 대한 반응은 노멀 필드의 가디언이 보였다.
“그가 살아 있나…?”
감정을 알기 힘든 목소리였지만 기쁨의 떨림이, 측은함의 울림이, 슬픔의 고동이 느껴졌다. 역시나 저 이름 모를 드라이어드는 카수스와 함께했던 10그루의 가디언 중 하나였나 보다.
“그렇군…. 그렇다면… 이번엔 내가…. 맞으러 가야겠군….”
카수스와 재결합하는 걸 두고 볼 순 없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만 했다.
“전투를 피할 순 없겠어.”
가디언을 상대로 내 드라이어드를 둘만 데리고 덤벼야 했지만 피할 순 없었다. 어쩌면 10개의 구슬이 붉은색으로 모두 채워지기 전인 지금이 기회일 수도 있었다.
“다들 대비해.”
내 말에 과거의 데이지를 포함한 모두가 전투태세를 갖췄다. 다만 야생 꽃은 멀뚱히 앉아 모든 광경을 관망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