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66화 (466/604)

드라이어드가 인간과 구분이 힘들 정도의 상태가 됐다는 건 뻔했다. 자연 발생한 드라이어드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성장한다. 하지만 눈앞의 레드 데이지는 성장이 퇴화하고 있었다. 힘을 잃어가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야생 드라이어드가 아닌…. 열매 개화 후 주인에게 강제로 영혼의 연결이 해제되어 버려진 거겠지.

지금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내 데이지의 전 주인 같은 사람이 또 있을 줄이야. 아니 이 세상은 아름다운 판타지 동화 게임 속이 아니었다. 나는 숱하게 다양한 인간 군상들을 만나 왔고 그들이 얼마나 무자비하게 생명인 드라이어드를 다루는지도 봐 왔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개화한 드라이어드를 버리는 짓은 어쩌면 세계 곳곳에서, 지금 이 순간에도 일어나고 있을지도 모른다. 데이지의 전 주인처럼 그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많을 테고 말이야.

난 한숨을 쉬고 싶은 걸 입술을 깨물며 꾹 참았다.

드루이드와 드라이어드가 함께해 온 그 오랜 세월 동안, 개량종의 껍질을 벗어 던지고 오롯이 레드 데이지의 전설을 쓰게 된 건 내 데이지가 처음이라는 점에서 등급이 낮은 꽃들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얼마나 곱지 않은지 잘 알고 있었다.

드라이어드 개화부터 육성까지 수많은 다이아가 들어가니 그들이 왜 그렇게 등급에 목을 매고 효율에 벌벌 떠는지 나 또한 유료 게임들을 즐겨 왔던 유저이기에 이해한다. 하지만 머리로는 이해한다고 해도 마음까지 같은 건 아니었다.

효율을 따지는 사람이 있는 반면 노멀 등급의 드라이어드라도 애지중지 육성하는 드루이드도 많았다. 게임을 접해 본 적이 없을 로웰라도 엉겅퀴 드라이어드를 몹시 아꼈고, 이리스 파티에도 노멀 등급의 드라이어드들이 섞여 있었지.

멋지게 성장해서 큰 힘을 내는 노멀 등급의 드라이어드도 아주 많이 봐 왔다. 그러니 등급에 차별을 두며 버리는 자들은 그저 핑계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테라리움 어드벤처>는 태생 등급에 따라 성장 한계가 제약되지 않는 세계이다. 육성에 따라 얼마든지 멋진 꽃으로 성장할 수 있음에도 효율과 편견을 앞세워 잔인한 짓을 벌이는 거다.

강제로 영혼의 연결이 해제된 드라이어드의 끝은 참으로 비참했다. 그걸 알면서도 모질게 버린 이들에게 더 이상 이해는 하지 않으려고 한다. 이건 게임이 아니라 진짜 세계였으니까.

“가시죠. 시간이 되었습니다.”

갑자기 대화를 끝내고 우리에게 어딘가로 가자고 종용한다. 난 난처한 눈으로 데이지를 바라봤다.

데이지는 동종의 꽃을 조금이라도 더 빨리 자신의 포레스트로 데려와 보살피고 싶은 마음이 가득해 보였다. 그녀는 여린 동종의 꽃을 발견했을 때부터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드디어 때가 되었습니다.”

우리 쪽에서 흔쾌히 답을 하지 않자 재촉이 튀어나왔다.

우린 잠깐 정찰 후 빠질 작전이었기에 당황스러웠다. 이대로 저들을 따라갔다간 제때에 발을 빼지 못할 것 같은 불안감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당연히 동료로 알고 있는데 따로 행동하려 들면 큰 오해를 살 것이 분명해 보였다.

아무런 정보도 없기 때문에 그럴싸한 변명을 만들어 내기도 어려웠다. 엘더가 걱정할 텐데….

결국 난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들의 입가가 만족스럽다는 듯 둥글게 휘어진다.

“얼마나 이 때를 기다려왔는지 모릅니다. 버려진 신을 발견하고 그분을 되살리기 위해 제물을 모으며 아주 많은 시간이 걸릴 거라 생각했지요. 처음에는 사람 하나 잡아 오는 게 그렇게 힘들었는데 말입니다.”

“분명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 게 분명합니다. 그래서 오늘 이렇게 한꺼번에 많은 제물이 제단에 당도할 수 있도록 은총을 베푸신 게지요.”

버려진 신, 제물…. 대체 그들이 지칭하는 건 무엇일까? 포박되어 있는 사람들로 보아 제물은 생명일 테고….

“가시지요.”

그들을 따라 넓은 공동을 지나 자세히 보지 않으면 찾을 수 없는 좁은 통로로 이동했다. 그곳은 다른 공간들과 달리 양면이 차단되어 있었고 일방통행로만 존재하는 걸로 보아 다른 이들의 출입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많이 지쳐 보였던 라운은 끝까지 눈빛만은 살아 있었는데, 죽이고 싶다는 마음을 가득 담아 우리의 뒤를 매서운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그에게 진실을 알리고 싶어도 워낙 가면을 쓴 이들이 가까이에 있어서 할 수 없었다. 이곳에 룽카와 민들레들이 보이지 않는 게 다행이었다.

어쩌면 그들이 운 좋게 이곳을 찾아내 포로들을 구해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밖엔 엘더와 과거의 데이지가 보초를 서고 있으니 마주칠 수 있겠지.

오래 걷지 않아 밀실에 도착했다. 땅굴의 모든 빛을 끌어모은 것처럼 엄청난 밝기의 빛이 터져 나와 시야를 잠시 가렸다. 그리고… 이젠 악취가 견딜 수 없을 지경이 되어 헛구역질이 나왔다. 필사적으로 입을 틀어막고 앞을 바라봤다.

그곳에….

“욱.”

결국 참지 못한 신음이 터져 나오자 그곳에 있던 모두가 나의 이상을 의심이 가득한 눈으로 봤다. 난 될 대로 되란 식으로 땅바닥에 주저앉아 급하게 우는 척을 했다.

“읍… 흑흑….”

모두가 기다려 왔던 순간이라고 했지? 그렇다면 당연히 기쁜 순간이겠지.

기쁨을 주체 못 하고 눈물을 흘리는 척을 하자 감화된 이들이 따라서 우는 소리가 들린다.

“그래요. 참으로 오래 걸렸지요. 여기 있는 모두가 벅찬 마음일 것입니다.”

넘어갔다…. 나를 당연히 동료라 믿으니 격화된 감정이 이성을 흐리게 만든 것이 분명하다.

우는 척을 끝내고 일어나야 할 타이밍이었지만… 난 고개를 들고 차마 다시 그걸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어쩌면 이 밀실에서 노멀 필드의 가디언을 마주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예전에 실새삼도 비슷한 행보를 보인 적이 있으니 사이비 교단원들이 섬기는 ‘버려진 신’ 노릇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내가 본 건…. 드라이어드의 시체였다. 그것도 온몸이 썩어 새까맣게 변한 데다 피부가 녹아내려 형태만 간신히 알아볼 수 있는 드라이어드의 시체 말이다.

드라이어드의 시체는 높다란 제단 위에 양발을 쭉 뻗고 앉아 끈 떨어진 마리오네트처럼 어깨를 푹 숙이고 있었다. 떨군 고개에서 까만 진물이 뚝뚝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드라이어드의 모체를 가늠할 수 있는 형형색색의 머리카락도 없었고 눈이 존재해야 할 곳이 푹 패어 있었다. 떡 벌어진 입엔 치아가 한 개도 존재하지 않았고 혀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저것이 드라이어드의 시체임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시체를 거미줄처럼 감싼 썩은 줄기가 그것의 등 뒤 벽에 얼기설기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덩굴 식물인지, 아니면 흔적만 남은 나무인지 어떠한 것도 알 수 없었다.

“신이시여, 드디어 때가 왔습니다!”

“부디 제물들의 시간을 양껏 취하시고 부활하소서!”

덜덜 떨리는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일어나지 못하는 나를 데이지가 힘을 줘 붙들고 일으켰다. 그러곤 내 허리를 꽉 잡아 쓰러지지 않도록 받쳤다.

“우리에게 영원을 허락해 주소서!”

“우오오!”

우릴 제외한 모든 가면을 쓴 이들이 저 추악한 시체를 향해 양팔을 벌리며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드라이어드의 시체… 를 보는 건 처음이었다. 아니 애초에 드라이어드는 시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죽으면 열매로 화해 세계수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 그들의 순리이기 때문이다.

마치 사람이 죽고 시간이 지나 썩을 때처럼 피부가 떨어져 앙상한 골이 드러난 채로 존재하는 드라이어드라니.

당연하게도 지독한 악취는 저 시체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나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악취를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멀쩡해 보였다. 아니 광기에 사로잡혀 시체가 되살아나라고 부르짖고 있었다.

“데… 데이지…. 욱.”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난 황급히 멀리 떨어져 속을 게워 냈다. 악취와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한 여파로 속이 뒤틀려 견딜 수가 없었다. 광기에 가득 차 소리치는 자들은 내가 뭘 하든 알아차릴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어째서 드라이어드가 저런 꼴을 한 채 이런 곳에 존재하고 있는 걸까? 어째서 여기 사람들은 저걸 신이라 부르며 부활을 기도하는 건가?

“신이시여, 산 자의 시간을 취하시고 깨어나소서! 그리고 우리에게 그 시간을 배분해 주소서!”

산 자의 시간… 시간….

그제야 내가 느끼던 의문들이 퍼즐을 완성하듯 하나둘 짜 맞춰지는 것이 느껴졌다.

우리의 손목에 생긴 푸른 고리가 의미했던 것은 반복한 삶, 정확히 말하자면 그 삶을 살면서 쌓았던 시간이었다. 제물은 단순히 생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시간을 의미했던 것이다.

제물을 바치려면 제단이 필요하다. 그것이 제를 올리는 근간이었다. 난 단순하게 돌을 쌓아 올린 네모난 제단을 생각했지만….

저들이 내내 침입자들이 버티지 못하고 제물이 되어 버렸을 거라고 확신했던 걸 떠올려 보면… 땅굴 전체가 제단이었던 것이다. 바닥에 새겨진 수많은 문양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었고 제단을 위한 일종의 장치였음을.

제단의 크기만큼 필요한 많은 제물과 그만큼 엄청난 규모의 제사.

삐걱삐걱, 고장 난 장치가 엇나가는 듯한 기괴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놀랍게도 석단 위에 앉아 있던 시체가 조금씩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정말… 저게 부활한다고? 생명들의 시간을 제물 삼아?

“부활….”

부활이라는 단어는 생소하지 않았다. 바로 얼마 전에 고대 드루이드인 카수스의 부활을 겪었기 때문이다. 그가 부활한 원리에 대해선 아직까지 모른다. 그저 전대 포인세티아가 큰 역할을 했을 거란 것만 알았다.

카수스 정도나 되는 자가 오늘날 겨우 부활할 수 있었는데 일반인이나 다름없던 저 자들이 어떻게 이런 거대한 제단을 준비하고 더구나 생명의 시간을 바친다는 극악무도한 제사법을 알고 있는 거지?

문득 어떠한 책을 회수하는 의뢰를 받았던 이리스 파티가 떠올랐다. 모든 일의 윤곽이 차근차근 드러나고 있었다.

주르륵, 철벅.

갑자기 석단 위의 시체에서 끈적거리는 검은 액체가 쏟아져 나와 바닥으로 흘렀다. 액체는 마치 물탱크가 터진 것처럼 어마어마한 양이 쏟아져 나왔는데 도저히 저 메마른 시체에서 나올만한 양이 아니었다.

하지만 시체는 끊임없이 꾸역꾸역 액체를 게워 내고 있었다. 그래, 토해 내고 있었다. 꼭 감당하지 못한 무언가를 삼킬 때처럼 울컥울컥 내뱉고 있었다.

“끄르륵… 부족…. 더 가져와. 더. 사냥을… 사냥을 시작….”

검은 액체를 토해 내며 마침내 시체가 입을 열었다. 변화는 단순히 액체를 게워 내는데 그치지 않았다. 썩은 피부와 근육이 재생되어 얄쌍하게 드러난 골을 메꾸고 점차 살을 부풀리고 있었다.

그건 이제 혼자서도 몸을 일으킬 수 있는 수준이 되어 석상 위에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푹 파인 두 눈에 새빨간 안광이 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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