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65화 (465/604)

가면이 가져온 시야 변화는 상당히 극적이었다. 기둥만 있던 땅굴에 아치형 대들보가 생기고 용도를 알 수 없는 받침대도 보였다. 그럴싸한 공간의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이다. 아치 밑을 지나며 우리가 제대로 된 길을 걷고 있음을 느꼈다. 적어도 통로를 지나고 있다는 표식이 되었으니까.

“윽.”

땅굴에 도착한 이후로 그나마 숨을 쉴 수 있을 정도로 약해졌던 악취가 다시금 심해졌다. 데이지 역시 이를 느끼는지 코를 감싸 쥐었다. 다만 그녀와 달리 과거의 데이지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보였다.

어쩌면 본체는 따로 있기 때문에 다른 게 아닌가 싶었다. 데이지가 듣는 애타는 목소리도 과거의 데이지에겐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악취 말이야. 왜 너와 데이지는 느끼고 난 느낄 수 없는 걸까? 혹시 이것도 내겐 없는 푸른 실선처럼 다시 태어난 것과 관련이 있는 게 아닐까?”

엘더는 내가 부탁하기도 전에 먼저 나서서 날 끌어안다시피 하며 걸어 주고 있었다.

솔직히 밖에서와 달리 악취의 근원지나 다름없는 이 땅굴에선 그의 꽃향기가 거의 도움이 안 되었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네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하면 엘더는 분명 상처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 때문이 아니라 아무 도움을 줄 수 없는 자신에게 말이다.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네.”

“그럼… 왜 메스키트는 맡지 못했던 걸까?”

문득 엘더가 궁금증을 가졌다.

“메스키트도 다시 살아난 거나 다름없지 않나? 전 주인을 떠나 다시 세계수의 품으로 돌아왔으니까.”

그러고 보니 메스키트도 따지고 보면 생을 반복한 거나 다름없었다. 주인인 드루이드가 죽을 때 드라이어드도 함께 죽는다. 그리고 드라이어드의 죽음은 세계수의 품으로 돌아간다고 표현했다. 하지만 메스키트는 죽지 않았고 과거의 기억을 간직한 채 다시 내게로 왔다.

“그건… 혹시 죽은 게 아니라고 보는 게 아닐까? 세계수의 품으로 돌아간 건 잠시 다음을 위해 정거장을 경유한 거란 느낌으로 말이야.”

더구나 메스키트와 실새삼, 두 가디언은 주인이 죽으며 함께 죽기 위해 스스로 생을 마감하려고 했다. 하지만 둘 다 실패했다.

가디언은 노화로 정해진 수명이 있는 것도 아니며 죽지 않는다. 아니 죽지 못한다. 그들에겐 필드를 수호해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메스키트가 세계수의 품으로 돌아간 건… 내 가설처럼 본래 살던 집으로 돌아간 느낌이 아닌가 싶었다.

“아니면 특별히 데이지에게 무슨 이유가 있을 수도 있고….”

정말 데이지가 단순히 다시 생을 살기 때문에 나처럼 악취를 맡는 걸까? 악취를 맡는 게 무슨 절차 같은 건 아닌 걸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데이지가 내 팔을 잡고 끌었다. 난 얼떨결에 그녀에게 끌려가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엘더와 과거의 데이지 역시 재빠르게 따라왔다.

“저 앞에서 인기척이 느껴져요. 한두 명이 아니라 아주 많은 인기척이요.”

“혹시 우리가 오던 길에 봐 온 멍하니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아뇨, 그들은 마치 물건이나 허상처럼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어요.”

물건이나 허상 같다는 데이지의 말에 깜짝 놀랐다.

“그렇다면 저 앞에 있는 자들은 정말로 살아 움직이는… 사람들이란 거지?”

“네. 그리고 절 부르는 목소리도 저곳에서….”

어쩌면 데이지가 가리키는 저 앞에 그토록 찾던 보스 스테이지인지도 모르겠다.

“민들레나 룽카 씨의 기운은 안 느껴져?”

“잘 모르겠어요. 아마 이곳에 메스키트 님이 계셨다면 알아볼 수 있었을 텐데…. 죄송해요.”

“아냐, 죄송할 건 없어. 저 앞에 뭔가 있다는 걸 먼저 알아차린 것만으로도 많은 도움이 됐어.”

이제 어쩐다? 기둥 뒤에서 힐끔 살펴보았지만 실내이기에 시야 확보가 어려웠고 주변이 대낮처럼 훤히 밝은 것도 아니었다. 무턱대고 진입하기엔 정보가 너무 없기 때문에 짊어질 리스크가 너무 컸다.

어쩌면 진입과 동시에 노멀 필드의 가디언을 상대해야 될 수도 있는데, 내 전력을 모두 쏟아부어도 걱정될 판에 현재 필드에 나와 있는 드라이어드가 셋뿐이었다. 더구나 과거의 데이지는 아직 성장 전이기도 하고.

지금까지 필드의 가디언을 상대해 왔을 때를 떠올려 보면 어느 하나 호락호락하게 넘어간 적이 없었다. 비록 포인세티아는 내게 적의가 없었기에 다행이지, 그녀에게 빙의된 전대를 상대할 때도 같은 가디언급인 메스키트의 도움이 아주 컸었다.

실새삼은 더했지. 그땐 시들링과 파티를 맺고 있었음에도 정말 애를 많이 먹었었다. 조금이라도 파훼법을 늦게 알아차렸다면 어쩌면 전멸이 났을지도 모른다.

이 앞에 있을 노멀 필드의 가디언이 내게 적의가 있고 또한 과거의 기억을 그대로 보유한 메스키트나 실새삼처럼 노련한 드라이어드라면….

“잠깐… 인기척이 느껴진다는 거면….”

지금 같이 있는 사람들은 괜찮다는 건가? 다들 능력이 없는 일반인이잖아?

난 엘더가 쓴 가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모두가 가면을 쓴 상태라면… 가면 안의 정체는 모르지 않을까? 더구나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로브를 쓰고 있었으니까 더욱.

주머니에서 뉴비 시절 입고 다녔던 검은 로브를 꺼냈다. 청결도에 차이가 좀 있지만 별다른 장식이나 무늬가 없다는 점에서 괜찮을 것 같았다.

난 로브와 가면을 뒤집어쓰고 몰래 잠입해 보겠다고 드라이어드들에게 말했다. 그리고 예상했던 대로 엘더에게 잔소리 어택을 받았다.

“겁도 없이 너 혼자 가겠다고? 만약 들키면 어쩌려고 그래?”

주절주절, 혹시라도 들킬까 봐 크게 소리는 내지 못하고 귓가에 속닥속닥 잔소리를 늘어놓는데 귀는 간지럽고 속은 뭉글거렸다.

“가면이 하나 남는데 저도 함께 갈래요.”

“아니, 내가 같이 갈게.”

검은 로브라면 예비용으로 하나 더 있긴 했다. 다만 내 체형에 맞춘 거라 덩치가 훨씬 큰 엘더가 입으면 아래가 다 드러날 터였다.

“데이지가 같이 가는 게 좋겠어. 넌 여기서 기다려. 둘이 같이 갔다 온다면 괜찮겠지?”

내 말에 엘더의 표정이 몹시 못마땅하다는 듯 잔뜩 구겨졌다.

“내가 물가에 내놓은 애도 아니고. 정말 살짝 살펴보기만 하고 돌아올 거야. 무모한 짓은 안 할 거야. 약속할게.”

여전히 삐친 건 여전했으나 그래도 조금은 누그러졌다.

나와 데이지는 로브를 뒤집어쓰고 가면을 매만졌다.

“혹시나 룽카 씨와 민들레들을 만날지도 모르니 잘 기다리고 있어. 다녀올게.”

이제 가려는데 엘더가 어깨를 붙잡았다.

“조심해야 돼. 허튼짓은 하지 말고. 위험해질 것 같으면 바로 도망가야 해.”

“알았어.”

내가 위험에 처했던 상황이 제법 있었던지라 그의 지나친 걱정도 이해가 됐다. 그리고 내 드라이어드들은 본래 날 과보호하기도 했고.

떨리는 마음을 가다듬고 데이지와 함께 앞으로 나아갔다. 목소리를 내면 정체를 들킬 테니 최대한 입을 열지 말아야지. 그 광인들이 계속 실실 웃기만 하고 말은 잘 안 해서 흉내도 못 내겠잖아?

데이지가 감지한 인기척과의 거리는 꽤 되었기에 예상했던 것보다 조금 더 걷자 나도 인기척을 느낄 수 있을 만큼 가까워졌다. 여러 사람이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갑자기 제물이 풍족해졌어. 이 정도라면 우리의 신께서 드디어 부활하실 수 있을 거야.”

“누가 침입한 게 분명했는데 이렇게 된 이상 다행이라고 볼 수 있겠군.”

우리의 신? 어쩐지 세계수를 말하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이 세계엔 세계수라는 유일신이 존재했다. 그러니 어쩌면 저들은… 정말 사이비 교단원들인 게 아닐까?

문득 불을 숭배하기에 인페르노를 사이비들로 오해했던 게 떠올랐다. 그들을 여전히 교단원이라 부르고 있지만 저 앞의 사람들은 정말로 진짜처럼 느껴졌다.

우린 멈추지 않고 계속 걸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사람들이 몰려 있던 거대한 공동에 들어섰다.

난 놀란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주먹을 꽉 쥐어야만 했다.

우리처럼 검은 로브와 가면을 쓴 사람이 더 있었다. 문양이 있는 가면을 쓴 자들도 있었지만 민무늬 가면을 쓴 자들도 더러 있었다.

멀리 벽엔 눈과 입을 가리고 온몸이 포박당한 사람들이 기대어 앉아 있었다. 하지만 실종자 리스트에 비하면 그 수가 아주 적었다. 비교적 최근에 잡혀 온 사람들인가 본데 저들만이라도 아직 무사하다는 게 다행이었다.

그중엔 익숙한 얼굴도 있었다. 바로 사라졌던 라운이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유독 여기저기 부상이 많이 보였다. 저항이 상당했었나 보다.

그동안 드루이드인 그를 어떻게 잡아갔나 싶었는데…. 만약 이 땅굴까지 유인하는 데만 성공한다면 노멀 필드 드라이어드를 제외한 다른 드라이어드들은 강제로 아티팩트로 귀환당하니 수월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도 룽카처럼 설마 노멀 필드 드라이어드가 단 하나도 없었던 걸까?

“오셨습니까? 침입자는 찾았습니까?”

우리가 다가가자 이야기를 나누던 자들이 우릴 맞이했다. 침입자라면 어쩌면 우리를 말하는 거겠지? 난 목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이미 제물이 됐을 수도 있겠군요. 아니면 아직 헤매는 중이라든가.”

“오래 버티진 못할 겁니다.”

그들은 침입자를 잡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다지 걱정하는 말투가 아니었다. 하긴, 가면이 없다면 같은 자리만 빙빙 돌게 되니 그들이 생각이 이해가 됐다.

“여러 명이 들어온 게 분명합니다. 아마 저자의 동료들이겠지요.“

그들은 라운을 바라봤다. 어째서 여러 명이라고 단언하는지 모르겠으나 라운의 동료인 건 맞았다.

“혹시 어느 테라리움에서 눈치라도 챈 게 아닐까요?”

“그들이 모든 걸 알아차렸을 때엔 이미 세상이 바뀌었을 겁니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우리를 대화에 참여시켰다. 잠깐만 살펴보고 갈 예정이었는데 당혹스러웠다.

툭툭, 그때 데이지가 조심히 내 팔을 두드렸다. 그녀의 손은 살짝 떨리고 있었는데 가면 안의 눈이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실종자들로 추정되는 포박당한 사람들이 있는 곳이었다. 난 대화를 놓치지 않으려 주의하며 데이지의 눈이 쫓는 곳을 바라봤다. 그리고 미처 몰랐는데 라운의 곁엔 상당히 어린 체구의 아이도 함께 있음을 깨달았다.

“아.”

나도 모르게 작게 탄성을 냈지만 다행히도 운 좋게 대화의 흐름에 편승한 것인지 별다른 낌새는 없었다. 그들은 계속해서 대화를 이어 갔다.

탄성을 낼 수밖에 없었다. 매우 지친 것처럼 간신히 라운에게 기대어 있는 작은 체구의 아이는… 새빨간 머리칼을 가지고 있었다. 마치 내 옆에 있는 데이지처럼 말이다.

데이지가 들었다는 애타는 목소리와 붉은 머리칼을 가진 아이. 그제야 모든 정황이 이해가 갔다.

데이지는 28번째 테라리움에서 그랬던 것처럼 동종의 부름을 들었던 것이다. 작은 아이는 내가 아는 데이지들처럼 머리에 데이지 꽃을 달고 있지는 않았지만, 레드 데이지 드라이어드가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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