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64화 (464/604)

가죽만 남기고 죽은 호랑이처럼 그들이 덜렁 남기고 간 로브를 집어 들었다. 찝찝해 죽을 맛이었다. 누가 봐도 수상한 사람이요, 엄청난 모략과 사건을 꾸몄을 사람들이었다. 혹시나 로브에서 소지품이라도 하나 떨어질까 기대했으나 탈탈 털어도 먼지만 나올 뿐이었다.

“아, 가면!”

과거의 데이지가 잡아 온 사람도 식물 문양 가면을 쓰고 있었다. 얼핏 봤을 땐 포인세티아가 아닌 다른 식물 문양이었지. 땅에 떨어져 있는 가면을 주워 들고 자세히 살폈다.

“이건… 무슨 식물이지?”

단번에 떠오르지 않는 걸 보면 처음 보는 식물이었다.

“혹시 이 식물 뭔지 알아?”

데이지와 엘더에게 가면을 보여 주며 물으니 데이지는 고개를 저었고 엘더는 고민에 빠진 얼굴이 되었다.

“나도 본 적은 없는 식물인데…. 나라고 모든 식물들을 다 알지는 못하니까. 아마 노멀 필드는 아닐 거야.”

포인세티아가 스노우 필드 드라이어드니까 같은 스노우 필드 식물이려나? 아니, 스노우 필드의 포인세티아는 오직 한 송이뿐이니까 본래 포인세티아의 자생 필드인 열대 필드의…?

하지만 여긴 노멀 필드 가디언이 다스리는 지역 아니었나? 아, 머리가 깨질 것 같다.

걸어 다니는 전투력 측정기 엘더는 드라이어드들의 등급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툭하면 쟤는 노멀 등급이라며 얕잡아 보는 말이 튀어나올 정도였으니까. 그런 엘더도 모를 정도라면…. 메스키트나 실새삼은 알고 있지 않으려나?

혹시나 싶어서 가면들을 챙겨 주머니에 넣었다.

“많이 희귀한 식물일 수도 있어. 세계수 안에서도 종이 희소한 드라이어드들은 잘 마주치기 힘드니까.”

“하나는 포인세티아에 하나는 어쩌면 희귀도가 높은 식물이라…. 여긴 정말 알면 알수록 수수께끼투성이인 공간이네.”

이곳에 당도한 지 아직 한 시간도 안 지난 것 같은데 벌써 지친 기분이다. 특히나 정신이.

“하, 겨우 사람을 찾아서 단서를 얻나 싶었는데 제물이라는 알 수 없는 소리만 내뱉고 도망가 버리고. 시간을 많이 지체하긴 했는데 원래 가려던 방향으로 가자.”

우린 다시 불길한 바람이 불어왔던, 데이지가 어떠한 목소리를 들었다는 방향으로 향했다.

일련의 사고로 내게 드라이어드가 둘만 남았다가 기적적으로 과거의 데이지가 합류하며 셋이 되었다. 참한 공격형 데이지가 둘이라 꽤나 든든했다. 두 데이지는 나란히 서서 발맞춰 걸으며 틈틈이 서로를 보고 배시시 웃었다.

나라면 또 다른 나를 마주하게 된다면 소름이 끼쳐 대하기 힘들 텐데 마치 짝꿍처럼 붙어 있는 둘의 모습이 신기했다. 난 나의 아바타인 제이를 마주할 때마다 껄끄러운데 말이야. 괜히 도플갱어와 마주치면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한다는 말이 생긴 게 아닐 거다.

“꼭 제게 포인세티아의 분신 능력이 생긴 것 같아요. 둘이니까 기술도 두 배로 쓸 수 있겠죠?”

포인세티아는 분신 능력으로 혼자서도 군대를 지휘할 수 있는 드라이어드였다. 현재는 그 능력의 9할을 카수스 수색에 쓰고 있지만.

“미래엔 역시 드라이어드 동료가 더 많이 늘어난 거죠? 어떤 드라이어드들일지 기대돼요.”

과거 데이지의 들뜬 목소리에 현재의 데이지가 웃으며 말했다.

“정말 어린 묘목의 모습으로 다 늙은 고목같이 구는 드라이어드가 있는데 말이야….”

그녀는 웃는 낯으로 과거의 자신에게 실새삼 뒷담을 까고 있었다. 나와 드라이어드 사이의 호감도 외에도 드라이어드들끼리의 상호 호감도도 존재했는데, 아무래도 데이지의 실새삼에 대한 호감도는 처참한 수준인 모양이다.

그런데 실새삼과 원만한 호감도를 유지하는 드라이어드가 있긴 하는 걸까? 설마 왕따라도 당하는 거 아냐? 엘더만 해도 포레스트 권속인 짭신 엘더 때문에 실새삼을 곱게 보진 못할 테고…. 물론 실새삼 성격이라면 혼자 모두를 왕따시킬 테지만.

아무리 걸어도 어둑어둑한 땅굴만 계속되다 보니 살짝 경계가 풀린 건지 두 데이지의 수다가 틈틈이 이어졌다.

“엘더도 포레스트의 왕이 된 거예요?”

속닥속닥, 엘더의 뒤통수를 보며 과거의 데이지가 묻는다. 하긴 그녀의 여정은 딱 16번째 테라리움의 연금탑까지였고 그 이후엔 데이지의 성장 이외에도 수많은 일들이 일어났었지.

그때의 내게 지금까지 일어난 일을 설명하면 믿을 수나 있을까? 네가 사실 세계수의 묘목이었대.

그 시기는 아직 <테라리움 어드벤처>라는 게임 안에서 다이아를 펑펑 쓰면서 플레이하는 게 마냥 신기하고 즐거울 때였으니까.

“그러고 보니… 혹시 데이지가 들었다는 누군가 애타게 부르는 목소리, 과거 데이지의 목소리였던 거 아냐?”

문득 충분히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요? 아뇨, 전 저 말고 다른 데이지가 있다는 건 꿈에도 몰랐는걸요.”

“아니에요. 제 목소리였다면 바로 알아차렸을 거예요. 다른 목소리예요.”

대체 데이지를 부른 건 누구일까?

“이상해. 계속 같은 자리만 맴도는 것 같아. 저기 봐. 우리가 민들레들과 헤어졌던 장소 아니야?”

땅굴은 특별한 이정표가 있는 것도 아니고 벽과 바닥, 기둥이 전부 똑같이 생겨서 분간이 어려웠다. 우린 그저 데이지만 따라 특정 방향을 향해 걸을 뿐이었다.

다만 우리가 본래 출발했던 자리로 도착했음은 그 근방에 몰려 있던 사람들을 보고 알 수 있었다. 허공만 보며 제자리에 있었기에 의외의 이정표가 되어 준 것이다. 전혀 반갑지 않았지만.

내가 처음에 말을 걸었던 사람을 다시 본 후에야 엘더의 말에 동의했다. 우리는 마치 무슨 주박에 걸린 것처럼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었음을. 그래, 우린 어떠한 상태 이상에 걸린 게 분명하다. 아니면 이 공간 전체에 기묘한 트릭이 설치되어 있다거나.

“목소리도 계속 들려오는 거리가 같아요. 아무리 가도 가까워지질 않아요.”

“이래선 자칫 잘못하다간 평생 이곳에 갇히겠어.”

오래 걸었기에 다리가 아파 왔다. 제이로 움직이던 거에 비하면 체력이 훌쩍 줄었다. 의미 없이 떠도는 걸 멈추고 쉬며 생각으로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았다.

상당히 까다로웠다. 이게 만약 디버프와 연관된 거라면 해제할 수 있는 바곳이 있으면 좋을 텐데. 하다못해 민들레라도. 엘더와 데이지는 우수한 전투 인력이었으나 파훼나 해제 능력이 있는 건 아니었다.

“조금 쉬면서 방법을 모색해 보자.”

난 드라이어드들에게도 휴식을 명령하고 좀비처럼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과거의 데이지처럼 이들 중 내 전생의 모습을 한 사람이 있을 수도 있으니, 공허의 복도를 걸었을 때를 떠올려 보며 아는 얼굴이 있나 대조해 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스치듯 본 거기 때문에 아는 얼굴을 발견할 거라곤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날 좀 닮았나? 맙소사 어린애들도 있었잖아? 데이지, 이리 좀 와 볼래?”

“네, 갈게요.”

“네!”

여기에 데이지2도 있었다면 데이지를 부를 때 셋이 동시에 대답하려나?

“어때? 나랑 좀 닮은 사람이 있는 거 같아?”

“음… 잘 모르겠어요. 제게 제희 님은 제희 님인걸요.”

내 물음에 두 데이지 모두 고개를 갸우뚱하며 어렵다는 얼굴을 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데이지2에게 어닝의 인상착의를 확인했을 때가 떠올랐다. 과거 28번째 테라리움의 보좌관과 어닝의 상관관계를 모를 적, 그녀의 얼굴을 유일하게 알고 있던 데이지2에게 인상착의를 물을 때였지.

그는 머리카락도 눈 색도 완전히 다른 팸플릿 속의 어닝을 보고 단번에 그녀가 보좌관이었음을 알아봤다.

“다른 드라이어드들도 제이 님의 머리와 눈 색이 바뀐다 해도 바로 알아차릴 수 있을걸요.”

그렇다는 건 외형에 아무리 변화를 줘도 드라이어드들에겐 그게 그거라는 뜻이었다. 그들이 타인을 분별하는 관점은 우리 인간들이 보는 관점과 달랐다.

“하, 그 이상한 인간들은 잘만 돌아다니는 것 같던데.”

한참을 전생의 내가 맞냐 아니냐로 씨름하고 있는데 짜증이 오른 엘더의 투정이 들려왔다.

“그러게. 무려 평범한 인간들이면서도 오랫동안 이곳에 지낸 것처럼 보였지? 그들은 어떻게 여길 자유롭게 오갔던 걸까? 어떠한 장치라도 있는….”

퍼뜩 주머니 속에 있는 가면이 떠올랐다. 혹시?

그들의 로브는 질 나쁜 천으로 만들었고 더럽다는 것 외엔 아무런 특이점이 없었다. 숱하게 모험가 장비를 만져 봤으니 그저 천을 기워 만든 옷과 특수 효력을 갖는 장비와의 차이점은 잘 알았다. 그렇다면 그들이 쓴 기이한 가면이 어떠한 장치 같은 게 아닐까?

가면을 꺼내 얼굴이 닿는 부분을 박박 문질러 닦았다. 오랜 시간 남의 얼굴을 감쌌을 그걸 그대로 내 얼굴에 쓰자니 무척이나 찝찝했기 때문이다.

“한번 써 볼게.”

모두의 우려 가득한 시선 속에서 천천히 가면을 얼굴에 썼다. 가면은 하관이 뻥 뚫린 구조였고 눈 부분은 지름을 크게 파 둬서 누가 써도 앞은 잘 볼 수 있게 만들어져 있었다. 겉면의 양 볼엔 꽃이 활짝 핀 식물의 문양이 조각되어 있지만 안쪽은 민무늬였다.

가면을 쓰고 앞을 보자… 놀랍게도 시야가 바뀌었다. 좀 더 주위가 밝아지고 주변 가득 널브러져 있던 사람들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깜짝 놀라 가면을 벗고 앞을 보니 다시 사람들이 나타났다.

“시야가 달라져. 가면이 장치가 맞았나 봐!”

나는 포인세티아의 가면을 쓰고 나머지는 엘더를 향해 건넸다. 그는 가면을 건네받고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살짝 얼굴에 썼다. 그러곤 재빠르게 도로 벗어 버렸다.

“정말이네.”

믿을 수 없다는 눈을 하면서 들고 있는 가면에 온갖 힐링 스킬을 쏟아붓고 있는 엘더의 모습이 보였다.

“네 것도 줘. 정화해야 돼. 이렇게 더러운 걸 쓰라고?”

난 엘더의 호들갑은 내버려 두고 다시금 가면을 쓴 채 앞을 봤다. 쓰기 전엔 단순히 장식으로만 보이던 바닥의 문양에도 변화가 생겼다.

모든 문양이 빛을 내는 것이 아니라 마치 어두운 밤 공원의 통행로를 밝히는 서치라이트처럼 특정 방향들로 향하는 부분들만 색이 다른 빛을 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길을 찾았구나. 저 문양을 밟고 따라가면 이번엔 길을 헤매지 않아도 될 것 같아.”

“끔찍해.”

말은 곱지 않았으나 웃기게도 가면을 쓴 엘더는 제법 잘 어울렸다.

길을 읽는 법을 알게 된 우린 휴식을 끝내고 다시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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