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63화 (463/604)

말을 끝낸 데이지는 잡아 온 두 인질을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게 줄기로 꽁꽁 묶어 버리곤 후련한 표정을 지었다. 다만 감정이 실린 것처럼 힘이 너무 과했는지, 인질들에게서 끅끅 하는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리다가 이내 고요해졌다. 기절했나 보다.

푸른 고리가 데이지의 정체라고? 조금은 멍청해진 기분으로 멍하니 푸른 고리를 바라봤다.

“어…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알려 줄 수 있어?”

“죄송해요. 문제가 있다면 손목의 이게 원인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아니 탓하는 게 아니라 궁금해서 그래.”

데이지는 부끄러움을 느끼는지 빨개진 볼로 머뭇머뭇 설명을 이어 갔다.

“노멀 필드의 드라이어드들 중에서도 왜 민들레를 제외한 우리가 남은 건지 고민했어요. 만약 등급으로 따지는 거면 저 역시 민들레와 다를 바 없으니 등급은 아닐 테고.”

데이지는 민들레처럼 노멀 등급 드라이어드이므로 이상 현상을 일으킨 조건은 등급이 아닐 것이다.

“그 결과 저와 엘더는 포레스트의 왕이기 때문에 남은 거라고 판단했어요. 여기 선 중 점선은 아마도 그걸 의미하는 걸 거예요.”

데이지가 자신의 손목과 엘더의 손목에 있는 푸른 점선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녀의 추리에 절로 감탄이 나왔다. 왜 난 그걸 바로 생각하지 못했지?

“선이 하나인 건 각자의 영혼의 그릇에 위탁된 영혼이 한 개씩이라….”

그녀의 말에 데이지2와 짭신 엘더가 떠올랐다.

“점선이 위탁된 영혼을 뜻하는 거라면 실선은 뭘까 계속 고민했는데 제 과거의 모습을 한 데이지를 보고 알아차렸어요. 이건 제 부활 횟수와 다를 바 없다는 걸.”

“와, 생각해 보니 그렇네. 왜 그걸 놓쳤지?”

이야기를 끝낸 데이지는 쑥스럽다는 눈빛으로 두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저… 원래 이런 역할은 메스키트 님이나 엘더의 역할이라… 저는 잘 못하기도 하고 틀렸을 수도 있어요.”

“아냐, 정말 잘했어.”

내 말에 데이지가 환하게 웃어 보였다. 옆에서 이를 보고 있던 과거의 데이지도 덩달아 해맑게 웃었다. 심장이 아팠다.

데이지가 가진 두 개의 실선이 그녀의 잠재 능력인 부활과 관련이 있다는 건 아주 적절한 추리였다. 그래야만 과거의 데이지가 이곳에 있는 게 설명이 되기 때문이다. 만약 데이지가 죽은 시점을 기준으로 한 모습이라면….

“설마… 다른 하나, 그러니까 우리가 막 만났을 때의 아기 데이지도 여기 어딘가에 있는 거 아냐? 어떡하지? 찾아야 되겠지?”

“아기… 는 아니었어요.”

데이지가 처음 죽음을 맞이했을 때, 비로소 그녀가 개량종의 잠재 능력인 부활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이는 다른 드라이어드의 공격에 날 감싸다가 결국 마지막 남은 생명력이 바닥이 되며 열매로 돌아가 버렸다. 그때의 일을 떠올리는 건 아직도 가슴이 시렸다.

“그럼 이쪽이 제 미래의 모습이란 건가요?”

조용히 듣고 있던 과거의 데이지가 현재의 데이지를 보며 천진난만한 목소리로 물었다.

“음, 따지고 보면 그렇지.”

“와… 내가 이렇게 멋지게 성장하는구나. 화관도 생기는 거예요?”

데이지는 성장 욕심이 그 누구보다도 많았다. 엘더의 물욕에 비견될 정도였다. 그런 그녀가 눈부시게 성장한 자신의 미래를 보았을 때 얼마나 기쁠까.

더구나 현재의 데이지의 모습은 더 이상 이름을 이어받은 꽃도, 합쳐 태어난 꽃도 아닌 오롯이 레드 데이지만의 정체성을 이룩한 모습이었다. 무려 모체의 신화를 틔우는 전 단계인 전설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스스로 신화가 되는 길을 걷는 꽃.

“머지않아 그렇게 될 거야.”

데이지는 슬쩍 자신의 화관을 매만지기도 하고 옷매무새를 단정하게 잡으며 아닌 척 자랑을 했다. 그 모습이 꼭 과거 민들레 군락지에서 자신을 우러러보는 민들레 묘목들에게 기술 시연도 하고 쉴 새 없는 질문에 죄다 답변을 해 주던 때를 보는 것 같았다.

“기쁘지? 네가 곧 저렇게 멋지게 성장할 거란 사실을 알게 되니 말이야.”

내 말에 과거의 데이지는 해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다시 고개를 젓고는 나를 똑바로 보며 웃었다.

“아뇨, 제가 정말 기쁜 건 미래에도 제가 제이 님의 곁에 있다는 사실 때문이에요.”

데이지는 정말 데이지였다. 지금 혼란스러운 상황에 처해 있다 하더라도 그녀의 맑은 미소에 모든 걱정이 사르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문득 데이지가 둘 있어도 행복 더하기 행복은 더 행복한 것처럼 너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 땅굴을 나가게 된다면 과거의 데이지들과는 작별 인사를 해야겠지.

“이해가 안 가. 난 실선이 없는 이유가 죽었다 살아난 적이 없어서 그렇다 쳐.”

그때 엘더가 분위기를 깨며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데이지가 두 개인 건 두 번 부활해서라고? 그럼 넌 그렇게 무수히 많은 실선이 존재하는 이유가 뭔데?”

엘더의 지적에 뜨끔해졌다. 그러고 보니 내 드라이어드들에게 본래 세계에 갔다 오며 알게 된 사실들은 털어놨으나 딱 하나 털어놓지 않은 사실이 있었다.

그건 바로 전생의 내가, 아니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 수없이 많은 죽음을 반복했다는 사실이었다. 그것도 날 쫓아온 불에 의해.

데이지의 추리를 듣고 나 역시 내게 무수한 개수의 고리가 존재하는 이유가 납득이 되었다. 부활의 개념이라면 내 영혼이 지금의 공제희라는 육체를 갖기까지 수많은 죽음을 반복하며 살아왔기에 그만큼 많은 고리가 존재하는 것이었다. 난 테라리움 어드벤처 세계로 향하는 공허의 복도를 걸을 때, 무수히 많은 내 전생의 모습들을 봤었다.

당산나무를 통해 보았던 과거가 나의 몇 번째 삶인지는 모른다. 그게 첫 번째일 수도 있고 아니면 이미 몇 번 죽은 후의 모습일 수도 있다.

“데이지의 추리가 맞을 거야. 생을 반복한 만큼 고리가 생긴 거라면 나 역시 지금이 있기까지 많은 죽음을 겪어서….”

내 말에 엘더가 경악하는 얼굴이 되었다.

“네가 죽었었다고…?”

“물론 데이지처럼 이전을 다 기억하는 건 아냐. 내 영혼이 그런 일을 겪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뿐이야. 내가 제희로서 죽은 적은 없어. 정말이야.”

“…….”

“내 영혼은 세계수가 대를 잇기 위해 퍼뜨린 묘목이라고 했었지? 그 영혼이 내가 본래 살던 세계까지 넘어와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났고 그 생명이 죽으면 다시 태어나는 걸 반복하다 결국 내가 된 거야.”

영혼은 하나, 하지만 그 영혼이 겪어 간 삶은 몇 개나 되는지 모른다. 그저 굵은 팔찌로 보일 만큼 선이 모인 걸 보면, 수를 헤아린다는 건 머리카락 수를 세는 것처럼 의미 없는 행동일지도 모른다.

“아마 제 명에 살다 간 건 얼마 안 됐을 거야. 만약 그랬다면 나 말고 다른 모습으로 지금보다 훨씬 더 빨리 이 세상에 넘어왔겠지.”

인삼 드라이어드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저희는… 전생의 당신을 기다려 왔습니다. 이제라도 이곳에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같은 종의 식물들도 꽃잎의 크기와 잎의 개수가 저마다 다르지만 하나의 모체 신화를 이어 본질을 잊지 않는 것처럼… 오랜 시간 겉모습이 변모를 거듭해도 변하지 않는… 당신의 영혼을 기다려 왔습니다.”

“네, 저희는 애타게 당신을 기다려 왔습니다. 이 세상이 본래 당신의 영혼이 있어야 할 곳입니다.”

그렇다는 건 불의 위협을 겨우 견뎌 내어 테라리움 어드벤처로 떠날 준비가 된 전생의 내가 한 번은 있었다는 거고, 결국 인삼은 전생의 나를 만나지 못했으니 떠나기 직전에 죽음을 맞이한 걸지도 모르겠다.

“전생의 네 육체들은 전부 수명이 짧았다는 거야?”

수명이 짧기 때문에 무수한 삶을 반복하여 쌓을 수 있었던 거겠지.

“응, 그건….”

날 바라보는 맑은 눈들이 내 마음을 젖게 만드는 것 같다.

“다음에 이야기해 줄게.”

이야기를 끝내려는데 엘더가 다급하게 붙잡는다.

“그렇다면 이거 하나만. 지금의 넌 상관없는 거야?”

지금의 나도 수명이 짧은 거냐고 묻는 것이다. 수명이 짧은 걸 유전이나 병 때문으로 보는 걸까?

전생의 수명들이 짧았던 건 결국 불이 쫓아와서 죽였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지금 내가 있는 이 세계는 항상 불의 위협이 도사리는 곳이니 상관없다고 볼 수 없진 않을까?

“응, 지금의 난 아냐.”

지금의 난 불을 무찌를 수 있는 힘이, 드라이어드가 있으니 상황이 다르다.

“그래, 그럼 그거면 됐어.”

엘더가 순순히 물러났다. 하지만 오늘 킵한 이야기는 아마 이야기해 줄 때까지 계속 잊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푸른 고리가 의미하는 점은 대강 알았지만…. 그 선이 나타내는 과거의 데이지 중 하나가 여기에 있다는 말은…. 혹시 전생의 나도 여기에 있을 수 있다는 뜻 아냐?”

그 생각까지 미치자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이 수많은 선들만큼 전생의 내가 여기 어딘가에 바글바글 있을 수도 있다고?

그러자 문득 지나쳐 왔던 힘없는 사람들이 떠올랐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던 좀비 같은 사람들. 처음 만난 것이 분명한데 묘하게 낯이 익다는 느낌을 받았었지.

“설마….”

설마 그 사람들이 전부 전생의 나인 건 아니겠지?

“뺏겨선 안 된다던 경고도 중요해.”

엘더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지적했다.

푸른 고리는 어쩌면 이전 생을 의미하는 걸지도 모른다. 정확히 말하자면 영혼이 겪었던 죽음. 과거의 데이지는 연금탑에서 하얀 데이지와 맞서 싸우다 부활을 썼을 때의 모습이었다. 그러니 현재 이 공간엔 그 이전 생의 모습이 떠돌아다니고 있는 듯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자가 내게 단 하나도 빼앗겨선 안 된다고 말했다. 그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경고를 들은 직후 푸른 고리가 하나씩 사라졌으니 정황상 푸른 고리를 의미하는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모순이 발생한다. 푸른 고리는 단순히 생을 반복한 횟수를 나타내는데 이건 빼앗아 간다는 표현과 그리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푸른 고리가 끊어지는 게 현재 이 공간을 떠돌아다니는 이전 생의 모습이 죽거나 사라지는 걸 의미한다면 더더욱.

혹시 푸른 고리가 의미하는 좀 더 명확한 뜻이 있는 게 아닐까?

“킥킥…. 엄청난 제물이 제 발로 기어들어 왔구나.”

비웃음을 가득 담은 목소리는 현재의 데이지가 잡아 온 사람에게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데이지가 과하게 포박하면서 기절한 줄 알았는데 우리의 이야기를 전부 다 듣고 있었나 보다.

“제물?”

“킥킥킥….”

데이지들이 잡아 온 기묘한 자들은 계속 뜻 모를 웃음만 짓더니 갑자기 그들이 걸치고 있던 로브와 가면만 두고 사라져 버렸다. 마치 갑자기 사라진 룽카와 민들레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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