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62화 (462/604)

푸른 고리는 빛이 만들어 낸 홀로그램과 같아서 만질 수 없었다. 만져 보려 해도 손가락이 그대로 투과해 손목에 닿았다. 그런 와중에도 착실히 선은 끊겨서 사라지고 있었다. 아직도 고리는 두꺼웠지만 이렇게 빠른 속도로 사라진다면 머지않아 손목이 텅 빌 것 같았다.

“하나도 뺏기지 말랬는데!”

하지만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원인도 모르고 더구나 푸른 고리가 의미하는 바도 모른다.

나와 함께 안절부절못하며 내 손을 바라보고 있던 데이지가 갑자기 홱 고개를 치켜들더니 매서운 눈빛으로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혹시 적이 나타난 건가 싶었는데 그녀가 바라보는 방향엔 딱히 적이라고 할 게 없었다.

“불안하게…. 데이지, 뭔데 그래?”

“누군가 애타게 부르는 소리를 들었어요.”

데이지의 그런 태도에서 기시감을 느꼈다. 그녀가 바라보는 방향은 본래 우리가 목적으로 했던 불길한 바람이 불어온 방향이었다. 그러자 고민이 되었다. 룽카와 헤어진 지점에서 멀리 가는 건 좋지 않다는 판단을 내렸으나 당장 뭐라도 해 보려면 원래 가려던 방향으로 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민들레 아이들에게… 그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드라이어드가 잘못된 거라면 네가 가장 먼저 알아차릴 테니까 진정해. 어때? 뭐라도 느껴져?”

엘더의 말은 우린 영혼과 영혼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바로 알아차릴 수 있을 거란 뜻이었다. 다행히 민들레 아이들은 아직 안전한 듯했다.

“어쩌면 묘목들이더라도 드라이어드를 소환할 수 없는 룽카의 곁에 함께 남아서 다행인 걸지도 몰라. 대신 지켜 줄 거야.”

사춘기에 접어들어 반항기가 생긴 아이들이라도 상황이 이러하니 제대로 움직여 주겠지.

“더구나 네 드라이어드잖아. 같은 묘목이라도 수많은 버팀목들에게, 특히나 메스키트에게 훈련을 받은 묘목들이라 호락호락하게 당하진 않을 거야. 어쩌면 그들은 가던 길을 그대로 가려는 선택을 했을 수도 있으니 움직이는 게 어때? 운이 좋다면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그래, 여기서 가만히 있어 봤자 좋을 건 없을 테니까.”

난 혹시나 싶어 다른 힘없이 축 처진 사람들에게 말을 더 걸어 봤지만 소득은 없었다. 아, 완전히 없는 건 아니었다. 그들 모두 손을 대면 체온을 넘어선 강한 열기를 가지고 있다는 점?

“가자.”

우린 결국 자리를 떴다. 이젠 바닥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어둠을 충분히 밝히고 있어서 조명등이 필요하지 않았지만, 시야가 확보되었다고 올바른 길까지 알아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데이지는 뚜렷한 목적지가 있는 것처럼 앞장서서 망설임 없이 나아갔고 나와 엘더는 그런 데이지의 뒤를 착실히 쫓았다.

이 기시감 대체 어디서 유래된 거지? 어디서 이와 같은 상황을 느껴 본 거지?

“거기!”

한참을 걷던 데이지가 별안간 어딘가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그곳을 바라보자 확연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타닥, 탁, 탁.

바닥을 울리는 소리, 저건 틀림없는 발소리였다. 공동엔 아직도 사람답지 않은 사람들의 모습이 많이 보였으나 다들 한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을 뿐 움직임을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발소리라니!

발소리는 데이지의 발견 이후로 빠르게 멀어지고 있었다. 데이지에게 들킨 것이 큰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도망을 치는 것이 분명했다. 발소리의 주인이 은신에 실패한 적이든 아니면 우리처럼 갇힌 처지이든 상관없었다.

어쩌면 아무리 말을 걸어도 반응이 없는 사람들보다 도망가는 저자가 우리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었다.

“어떻게 할까요?”

“데이지, 잡아 와!”

“네!”

데이지는 내 말에 바람처럼 튀어나가 발소리가 사라진 곳으로 달렸다. 그녀가 추격을 위해 멀어지는 걸 보며 난 갑자기 머리가 멍해지는 걸 느꼈다.

“방금….”

마치 눈앞에서 상황에 맞지 않은, 전혀 모순되는 장면을 목격했을 때의 느낌이 이러했다.

“엘더, 방금 데이지가 대답한 거 맞아?”

“왜? 뭐 문제 있어?”

엘더는 발소리가 난 곳을 계속 바라보느라 눈치채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난 봤다. 데이지는 입을 움직이지 않았다. 내 명령을 받고 곧바로 튀어 나갔단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귀는 선명히 데이지의 목소리를 한 “네!”라는 대답을 들었다.

“데이지가 방금 ‘네!’라고 대답하지 않았어?”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데이지는 대답을 안 했는데? 입이 안 움직였는데?”

엘더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한껏 걱정된다는 눈으로 날 바라봤다.

“여긴 어둑어둑하니 네가 잘못 본 거겠지. 거기다 지금 상황에 예민해져 있어서 뭔가 착각한 걸 수도 있어.”

그런가… 내 착각인가? 하긴, 잘못 들었다면 오히려 데이지 본인이 그 목소리에 반응을 했을 것이다.

오래 지나지 않아 데이지는 발소리의 주인을 잡아 왔다. 그는 데이지의 손에 짐짝처럼 질질 끌려오다시피하고 있었다. 데이지가 그렇게 대하는 걸 보면 그다지 좋은 기운을 가진 사람은 아닌 게 분명했다.

그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까만 로브를 두르고 얼굴엔 선명한 문양이 그려진 나무 가면을 쓰고 있었다. 나무 가면을 보니 1번째 테라리움의 고위급 관료들이 착용하고 다니던 가면이 떠올랐지만 어딘가 결이 달랐다.

가면에 그려진 문양은 꽃과 잎을 나타냈는데 놀랍게도 내가 아는 식물이었다. 색이 칠해져 있다면 더욱 확실했을 테지만… 문양은 포인세티아였다.

가면은 갑자기 끈이 끊어지며 툭 떨어졌고 우리는 그 안의 기괴하게 웃음을 짓고 있는 얼굴과 마주했다.

“낄낄낄….”

“정신이 이상한 사람인가 봐.”

난 떨어진 가면을 주워 들고 실성한 것처럼 웃고 있는 여자를 착잡한 심정으로 바라봤다.

“이봐요.”

“저항은 없었어요. 아니 못 한 것 같아요. 드루이드도 아니고 그냥 평범한 사람이에요.”

데이지는 발소리를 쫓아간 후 벌어졌던 일을 내게 설명해 주었다. 혼신의 힘을 다해 도망갔지만 애초에 민첩의 드라이어드인 데이지를 따돌릴 순 없었다. 잡혔을 때 저항을 할 줄 알았으나 오히려 이미 힘 차이를 느끼고 결과에 순응한 사람처럼 순순히 잡혔다고 한다.

날 보며 미친 듯이 웃고 있긴 하지만 적어도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사람들과는 달리 대화는 가능할 것 같았다. 여자의 얼굴은 표정을 담으며 시시각각으로 변했고 데굴데굴 굴리는 눈도 제법 내게 시선을 마주해 오고 있었다. ‘제대로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

“여긴 대체 어디예요?”

“킥킥.”

“동료가 있나요?”

“푸후훗.”

무슨 질문을 하든 웃기만 할 뿐이라 성질을 살살 건드렸지만 난 그 웃음이 내 질문에 대한 비웃음임을 확실히 느꼈다. 즉, 내 말을 알아듣기는 한다는 건데….

“이 가면에 그려진 문양, 포인세티아가 맞죠?”

“…….”

그러자 웃음이 뚝 멈춘다. 자물쇠에 맞는 열쇠를 고른 것처럼 방어적으로 굴며 웃음만 실실 흘리던 그 자가 떨리는 눈으로 나와 가면을 번갈아 봤다. 그 시선 안엔 두려움과 분노가 공존해 있었다.

“왜 하필 포인세티아가 그려진 가면을 쓰고 있는 거예요?”

하필 포인세티아인 점이 중요했다. 평범한 꽃이 아니라 스노우 필드의 가디언의 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질문에 대한 답을 듣지는 못했다. 우리의 대화에 누군가 끼어들었기 때문이다.

“드루이드 님, 잡아 왔어요.”

그 목소리를 들은 순간 다시금 머리는 망치에 얻어맞은 것처럼 멍해졌고 양어깨엔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그 목소리를 이상하게 느낀 것은 이번엔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엘더도 그리고 데이지도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다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데이지가 있었다. 내 앞에도 데이지가 멀쩡히 있는데 말이다.

“저항은 없었어요. 평범한 사람이에요.”

또 다른 데이지 역시 새까만 후드 로브를 입은 사람을 질질 끌고 있었다. 역시나 식물 문양이 그려진 나무 가면을 쓰고 있었는데, 이번엔 문양이 포인세티아가 아니었다.

“어… 어떻게 데이지가… 둘?”

내게 가까이 다가온 데이지는 또 다른 데이지를 보며 놀란 눈을 했다. 두 데이지가 서로 눈을 마주했고 둘 다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저쪽 데이지를 자세히 봐. 뭔가 다르지 않아?”

엘더 역시 당혹스럽다는 얼굴로 내게 속삭였다. 그는 나중에 온 데이지를 지적했다.

다르다고? 하지만 둘은 마치 도플갱어를 보는 것처럼 데이지 판박이였다. 얼굴도, 나를 보는 올곧은 눈빛도 전부 데이지였다. 그러다 엘더가 말하는 뭔가 다른 점이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이 너무 익숙한 나머지 나도 모르게 받아들일 뻔한 것이었다.

그 데이지는 지금의 데이지보다 덜 성숙한 모습이었다. 더구나 장비도… 지금의 데이지보다 한 단계 이전 장비였다. 그러고 보니 화관도 보이지 않았다. 하나하나 따지고 보니 현재의 데이지와 다른 점이 상당히 많이 보였다.

결론은 나중에 온 데이지는 마치 과거의 데이지를 보는 듯하다는 거였다. 나와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한 시절의 데이지 말이다.

“어떻게 이게… 가능하지? 데이지?”

“네, 드루이드님.”

“네!”

내 부름에 두 데이지가 동시에 대답했다.

“누가 진짜 데이지야?”

설마 모습을 흉내 내는 드라이어드가 아닐까? 놀라운 기술을 사용하는 드라이어드들이니 어쩌면 모습을 흉내 낼 줄 아는 드라이어드도 충분히 있을 법했다. 아니면 환각이라든가.

난 나중에 온 데이지에게 용기 내어 손을 뻗었다. 환각이라면 만질 수 없을 것이란 단순한 논리였다. 그때 엘더가 내 행동을 저지하며 자신이 대신 확인하겠노라 손을 뻗었다. 그는 곧장 데이지의 손을 붙잡아 들었다.

데이지가 항상 불멸의 다이아몬드 반지를 끼는 손이었다. 아마 차이가 있다면 그곳에서 발생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손을 확인한 게 분명했다.

“뭐야? 반지도 있잖아?”

엘더가 데이지를 만질 수 있을뿐더러 데이지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반지도 그대로였다. 모습을 흉내 내는 드라이어드라면 데이지 손가락의 반지를 놓칠 법했는데…. 그렇다면 환각이 아니라 정말 도플갱어인가?

“진짜 저예요.”

그 말은 현재의 데이지에게서 들려왔다. 그녀는 나를 지나쳐 과거의 모습을 한 데이지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리고 한 바퀴 빙 돌며 살폈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가만히 서 있는 데이지의 시선도 흥미로움을 가득 담아 따라다녔다.

“정말 저예요. 드루이드님. 투영된 것도 아니라 과거의 제가 맞는 것 같아요.”

“쟤가 가짜면 어떡해?”

이번엔 엘더가 현재의 데이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럼 둘에게 물을게. 내 진짜 이름이 뭐야?”

“제이요.”

“제희요.”

비슷하게 들리나 결국 내 진짜 이름을 맞힌 건 다행히도 현재의 데이지였다.

“후…. 넌 그럼 대체 뭐야? 데이지가 어째서 둘이야? 그리고 어떻게 너라고 확신하는 거야?”

현재의 데이지는 과거의 자신을 살피다 말고 푸른 고리가 채워진 손을 들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거요. 이게 정체 같아요.”

그러고 보니 과거의 데이지에게도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손목에 푸른 고리가 없다는 점이었다.

“여기 선 중의 하나가… 이걸 뜻하는 것 같아요.”

데이지는 빙글빙글 돌아가는 실선을 가리키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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