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61화 (461/604)

룽카는 실종된 라운이 걱정되어 남은 것이긴 했지만, 혼자 남을 내가 걱정되어 함께 남기로 한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현재 상황에서 드라이어드를 단 하나도 소환할 수 없게 된 그는 본인이 아무리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더라도, 솔직히 말하자면 짐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렇다고 다시 땅 위로 돌려보내기엔 이 드라이어드 강제 귀환 효과가 어느 범위까지 지속되는지 알지 못했다. 심할 경우 Z축을 무시할 수도 있었기에 혼자 내버려 둘 수도 없었다.

“제게 잘 붙어 계세요.”

“이거… 일이 이렇게 될 줄은… 송구스럽습니다. 도움이 되기는커녕 짐만 되고.”

그 역시 그런 점을 알고 있기에 난처한 목소리의 사과가 이어졌다.

“드루이드가 혼자 남을 경우 패닉에 빠지는 일도 더러 있으니 서로 상태를 잘 챙기면 되죠. 더구나 제 몸 상태가 지금 정상은 아니니.”

그래도 인삼 군락지에서 있었던 일처럼 홀로 남겨졌을 때보단 드루이드가 둘이라면 더 나아질 상황이 있겠지.

“그나저나 어느 쪽부터 수색하실 겁니까? 땅굴은 테라리움 전체를 아우르는 듯한데, 지상이나 지하나 대책 없이 수색해야 하는 건 똑같군요.”

“좀 전에 기이한 바람이 불어온 쪽, 그쪽으로 향하려고요.”

이상하게도 구멍이 뚫린 밖이 아닌 안에서 불어왔던 불길한 기운을 담은 바람. 그 바람에 노출된 후 드라이어드들이 일제히 귀환했으니 힘의 원천은 그 방향에 있을 확률이 높았다.

룽카는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고 우린 바람이 불어온 방향으로 발을 뗐다.

잘 포장된 돌바닥에 타박타박 여러 명의 발소리가 울렸다. 룽카의 램프와 뒤늦게 내가 꺼낸 조명등의 불빛으로 사방을 밝히며 천천히 전진했다. 빛이 밝히는 공간 곳곳에 지반이 무너지지 않도록 세운 기둥들이 보였고 기둥에도 바닥에 있는 것과 같은 기이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어둠 속에서 빛을 내는 건 시야를 밝히기 위해 필수 불가결이었지만 반대 여파로 적에게 우리의 위치를 노골적으로 노출하는 작용을 했다. 지금부턴 우리가 어디에 있든 적들의 눈에 띌 것이다. 우리에게 들키기 싫다면 불빛을 보고 자리를 피할 것이고 우릴 노린다면 불빛이 닿지 않는 지점에서부터 천천히 접근해 올 것이다.

“대체 여긴 뭐 하는 공간일까요?”

“글쎄요. 던전이나… 신전?”

갑자기 이리스 파티가 발견했다던 신전형 던전이 떠올랐다. 설마 이곳이 그 던전과 관련이 있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그들이 발견했던 건 겨우 입구였고…. 아직 정신에 혼란을 일으키는 특이한 작용이 일어난 것 같지는 않은데.

“하나 더 조심해요. 혼란 작용. 제 길드원들은 분명 이 테라리움에 방문 후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 상태 이상 효과에 당했어요. 더 깊숙한 곳에 있는 우리는 어쩌면 더욱 위험할지도….”

위잉.

왜 안 좋은 일은 항상 자각하자마자 다가오는 걸까?

텅 빈 공동(空洞)이 웅웅 울리며 기이하게 진동했고 사방이 점차 밝아졌다. 광원은 바로 바닥 아래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바닥에 기묘하게 자리한 문양이 음울한 푸른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무언가 일어나려는 징조였다.

“하… 함정이라도 밟은 걸까요?”

룽카는 다급하게 마지막으로 밟은 지점에서 발을 떼며 무기를 꺼내고 경계 태세를 취했다. 만약 함정이라면 밟은 상황에서 이미 늦었다. 더구나 함정을 미리 경계했더라도 모든 바닥엔 빠짐없이 문양이 그려져 있었기에 얕은 지식으로 일일이 살피며 지나가려 해 봤자 무리였을 것이다.

“뭐가 올지 모르니 조심…!”

은은하게 올라오던 빛이 갑자기 두 눈을 계속 뜨고 있기 힘들 정도로 번쩍였고, 잠깐 눈을 감았다 떴을 땐 룽카가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민들레 아이들도 보이지 않았다. 확 뒤바뀐 시야에 남은 건 나와 데이지 그리고 엘더뿐이었다.

“룽카 씨! 민들레….”

“쉿.”

장갑을 낀 단정한 손가락이 내 입에 조심히 내려앉았다. 불안한 눈을 한 엘더였다.

“침착해.”

엘더의 녹음의 생명력이 가득한 눈을 바라보며 겨우 떨리는 마음을 진정했다. 심호흡을 하며 주변을 돌아보자 그제야 룽카와 민들레 아이들이 사라진 것 외에도 달라진 점들이 눈에 들어왔다.

“저들은… 다 어디서 나타난 거야?”

분명 텅 빈 공동엔 우리뿐이었다. 어떠한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는데…. 지금 내 시야엔 수많은 사람들이 축 처진 어깨를 하고 땅바닥에 앉아 있었다. 무릎을 끌어안고 얼굴을 파묻은 사람도, 살아 있는 건지 의심이 될 정도로 가만히 누워 있는 사람도 있었다.

공통점이라곤 모두 영혼이라도 빠져나간 것처럼 멍하니 허공을 주시하고 있다는 거였다. 우리가 있든 말든 전혀 상관하지 않는 태도로. 난 문득 저 사람들이 실종 사건으로 사라진 사람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드루이드님, 이것 좀 보세요.”

데이지가 작은 목소리로 날 불렀다. 그녀가 가리킨 것은 자신의 왼쪽 손목이었다. 세 개의 푸른빛을 내는 고리가 반시계 방향으로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다. 두 개의 고리는 실선으로 이뤄져 있었고 하나는 점선으로 이뤄져 있었다.

“그게 뭐야?”

“저 말고 드루이드님께도… 엘더에게도 있어요.”

그 말에 깜짝 놀라 왼쪽 팔을 들어 확인해 보니 아티팩트가 있어야 할 자리에 데이지의 것과 비슷한 푸른 고리가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다. 데이지와 다른 점이라면 아주 두껍고 넓은 고리가 시계 방향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점이었다.

자세히 보니 수많은 실선이 한데 모인 탓에 하나의 굵은 선처럼 보였던 것이다.

엘더의 손목도 확인했다. 그는 순순히 왼손을 내밀었고 그의 손목엔 희미한 점선 고리가 시계 방향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푸른 고리는 마치 수갑이나 족쇄처럼 보였다.

“이게 대체 뭐지?”

난 갑자기 땅굴에 나타난 다른 이들의 손목도 살폈다. 하지만 그들에겐 푸른 고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왜 난 이렇게 희미한….”

엘더가 아주 불안한 목소리로 자신의 손목과 내 손목을 번갈아 살폈다. 나와 데이지에 비하면 겨우 점선 하나에 불과했기에 상대적으로 빛이 희미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내겐 꼭 족쇄처럼 보이는데 차라리 빛이 희미한 네가 더 나은 상황인 게 아닐까?”

“너와 정반대인 게 불안한 거야.”

그는 그걸 꼭 말해야 알겠냐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게 희미할수록 좋은 거라면 반대로 네가 위험한 상태란 거잖아.”

그 말에 딱히 반박 같은 건 할 수 없었기에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나타난 저 사람들… 그리고 이 고리. 룽카 씨와 민들레들은 대체 다 어디로 사라진 거지?”

상황은 단번에 받아들이기엔 너무 갑작스럽게 변했고 불안은 커져 갔다.

“바깥에 연락을 해야….”

난 핸드폰이 제발 있기를 기도하며 주머니를 뒤졌다. 다행히 핸드폰은 있었으나….

[주인님!]

이상하게도 핸드폰을 통해 이용 가능한 서비스는 무한 다이아뿐이었다. 화면은 무한 다이아에서 전혀 넘어가지 않았으며 평소엔 잘만 밖으로 뛰어나오던 난쟁이들도 잠잠했다.

[주인님! 갑자기 너무 추워졌어요!]

“춥다고…?”

무한 다이아를 켜면 항상 다이아를 가져가라고 성화였던 난쟁이들이 날씨나 기온에 대해 이야기를 꺼낸 건 처음이었다.

“그러고 보니… 좀 추운가? 그런데 왜 핸드폰 속에 있는 난쟁이들이 추위를 느끼지?”

더구나 무한 다이아는 단순한 방치형 게임이라 계절 설정이 없기 때문에 사시사철 따뜻한 배경이었다. 추위를 신경 써 줄 필요가 없다는 말이었다.

지직, 직.

갑자기 핸드폰 화면이 일그러지며 뚝 꺼졌다. 놀라서 전원 버튼을 눌렀는데 다행히도 무한 다이아 화면이 정상적으로 떴지만 그 이후로도 불편할 정도로 스스로 화면이 꺼져 버려서 계속 켜는 시도를 멈췄다. 이곳은 너무 기이한 곳이었다.

“말을 걸어 봐야겠어.”

지금 서 있는 곳에서 룽카, 민들레들과 헤어졌으니 어쩌면 자리를 뜨는 게 좋은 선택이 아닐 수도 있었다. 그러니 일단 가던 길을 멈추고 이 자리에서 수집할 수 있는 단서는 모두 수집하는 게 나을 듯했다.

갑자기 나타난 기운 없어 보이는, 좀비 같은 사람들은 마치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이곳에 갇혀 있던 것처럼 보였다. 어쩌면 그들은 뭔가 알고 있는 게 있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모두 유령이면 어떡하지?

“저기요.”

난 그중 가장 가까이에 있는, 기둥에 기대어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는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괜찮으세요? 혹시 어떤 연유로 이곳에 계시는지 알 수 있을까요?”

“…….”

내가 말을 걸어도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마치 내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이봐요.”

이번엔 과감히 어깨에 손을 얹으며 물었다. 그런데 분명 조금의 생기도 느껴지지 않는 사람이었음에도 어깨에 맞닿은 손으로부터 엄청난 열기가 타고 넘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도저히 체온이라고 볼 수 없는 기이한 열기에 깜짝 놀라 손을 뗄 뻔했다.

그리고 이 반응이 효과가 있었는지 허공만 바라보던 이가 드디어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을 마주했다.

“절대….”

똑바로 마주한 얼굴은 어째서인지 아주 낯설지만은 않았다. 달싹이는 입술이 힘겹게 말을 잇는 것이 보였다.

“절대… 하나도 뺏기지 마.”

그건 나를 향한 경고였다.

“무엇을요? 뭘 뺏기지 말라는 건데요?”

“…….”

그자는 다시 허공을 바라보며 입을 다물었고 멍한 눈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찰나였지만 그 시선이 내 왼쪽 손목에 감긴 푸른 고리를 향했던 것을 눈치챘다. 푸른 고리를 뺏기지 말라는 건가?

그런데 만약 이 자가 수많은 실종자 중 한 명이라면 반응이 이상했다. 나에게 도와 달라고, 구해 달라고 먼저 반응해야 하는 거 아냐? 어째서 날 먼저 신경 쓰면서 내게 경고를 한 거지?

툭.

그때였다. 갑자기 팽팽히 당겨지던 실이 뚝 끊기는 소리가 들렸고 손목에 미약한 통증이 느껴졌다.

“어라?”

내 손목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던 푸른 고리 중 하나가 툭 끊겨서 사라진 것이다. 하지만 고리를 이루는 실선은 아주 무수히 많았던지라 겨우 선 하나가 사라진 정도로는….

툭, 투툭, 툭.

안일한 마음을 가진 것도 잠시 선들이 연이어 끊겨 사라지기 시작했다. 데이지나 엘더의 손목에 있는 고리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오직 내 손목의 고리들만 빠른 속도로 끊겨 사라지고 있었다.

이것이 무엇을 잃는다는 뜻인지 알 수 없었으나 방금 전의 대화로 깨달은 건 잃어서 내게 좋을 일이 없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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