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60화 (460/604)

불길한 기운을 담은 바람은 드라이어드들을 아티팩트로 돌려보낸 후 사라졌고, 그 이후로 어떠한 증상도 나타나지 않았다. 공격도, 위협도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게 오히려 폭풍 직전의 고요처럼 느껴져 우린 섣불리 장소를 이동한다거나 정찰을 보내는 등의 행동을 취할 수 없었다.

대체 어느 필드의 가디언이 이곳에 있는 걸까? 생기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곳에 한 필드의 생명들을 대표하는 꽃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팠다. 지독한 악취를 풍기는 불길한 장소, 어쩌면 곧 만나게 될 가디언도 많이 엇나가 좋지 못한 일을 겪고 있는 게 아닐까?

“이곳 어딘가에… 필드의 가디언이 있을 거 같아.”

“가디언이요…?”

내 말에 데이지가 깜짝 놀라 물었다.

“응, 조금 전 제이의 모습을 보고 단서를 얻었어. 그리고….”

“필드의 가디언이요? 그건 뭐죠?”

은둔자의 정원에서 실새삼을 만나 싸웠던 것처럼 아주 힘든 일을 겪게 될지도 모른다고 주의를 주려는데 룽카가 내게 물었다. 설마 가디언을 모르는 드루이드일 줄은 몰랐기에 되레 내가 당혹스러웠다.

“혹시 들어 본 적 없으신 건가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그를 보며 생각했다. 하긴, 가디언은 결코 평범한 드라이어드가 아니었다. 이리스 파티도 처음엔 전설 속에 있다고 믿었었지. 하물며 메스키트의 정체를 알아보지 못하는 드라이어드들도 있을 정도였으니까. 더구나 메스키트는 초반엔 거의 자신에 대한 정체를 일부러 숨기기까지 했었다.

“드라이어드들의 자생 필드를 대표하는 꽃이에요.”

“포레스트의 왕과 같은 겁니까?”

“왕보다 더 위에서 군림하는 꽃이지요. 하나의 군락지가 아닌, 군락지를 전부 아우르는 필드를 대표하는 거니까.”

“그런… 드라이어드가 존재한단 말입니까? 제 드라이어드에게도 그런 이야기는 들어 본 적 없는데. 아니, 생각해 보면 얼핏 그런 전설을 들은 것 같기도….”

크게 당황하는 그를 보며 나 또한 필드의 가디언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을 때 많이 당황했었던 걸 떠올렸다.

“그런 드라이어드가 대체 이런 곳에서 뭘 하고 있는 거죠? 필드를 대표한다면서 왜 이런 곳에….”

“그걸 지금부터 알아봐야 할 것 같아요. 물론 이곳에 가디언이 있다는 걸 완전히 확신할 순 없어요. 다만 높은 확률로 있을 것 같다고 추측 중이에요.”

“만약 발견한다면 엄청난 업적이 되겠군요.”

룽카는 지금의 처지를 잊고 한 명의 모험가로서 흔하지 않은 업적을 두고 설레는 마음을 표출했다. 필드의 가디언은 직접 경험하지 않는 자들에겐 그저 전설 속 이야기일 뿐이니 설레는 것도 이해가 갔다. 다만 그는 조금 전까지 이미 두 그루의 가디언을 이미 만나 봤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을 뿐.

“지금부턴 그 대단한 가디언이 우리의 적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며 아주 조심해야 해요.”

“필드를 대표하는 드라이어드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왜 적으로 생각해야 하는 거죠?”

난 만났던 가디언들이 모두 규율을 잊은 채 괴로워했던 걸 떠올렸다. 그리고 그동안의 여정과 세계수의 신언에 의하면 메스키트, 실새삼, 포인세티아뿐만 아니라 어쩌면 나머지 다른 필드의 가디언들 역시 전부 직무 유기 상태일 터.

“룽카 씨가 의문을 느꼈던 것처럼 한 필드를 대표해야 할 드라이어드가 이런 생기 하나 없이 죽음의 기운이 풀풀 풍기는 곳에 있다는 것부터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닐 테니까요.”

꿀꺽, 그가 침을 삼키며 내 이야기를 경청했다.

“자생 필드엔 각 필드마다 드라이어드들이 지켜야 할 규율이 있고 이걸 가디언이 수호해요. 하지만 어떠한 연유로 직무를 유기하는 가디언들이 생겨났고….”

그 시초는 카수스가 최초의 순례자로서 필드의 모든 가디언을 모은 후 본인의 영생을 위해 세계에 재앙을 불러오며 시작되었다.

“제가 모험하면서 깨달은 바론 오히려 제 역할을 하는 가디언이 아예 없을지도 모른다는 거예요.”

그렇기에 세계수는 다시금 가디언들을 모아 자신을 대신해 그들을 일깨워 줄 순례자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10그루의 필드의 가디언을 모두 모으는 일, 그것이 제이일 적 내가 이 세계에서 클리어해야 했던 메인 퀘스트였다.

“좀 더 쉽게 표현하자면… 다들 어딘가 고장 나 있을 거라는 거예요.”

“포레스트의 왕보다 더 대단한 드라이어드가… 적이 된다면….”

그는 곧 마주하게 될지도 모를 암담한 현실이 눈앞에 그려지는지 절망에 가득 찬 표정이 되었다.

“그러니 조심해야 해요. 혹시 좀 전에 아티팩트로 귀환된 드라이어드 외 다른 드라이어드들을 불러낼 순 없나요?”

내겐 드라이어드 셋이 아직 필드에 남아 있으니 보호를 받을 수 있지만 룽카는 아니었다. 혹시 이 셋이 남은 건 우연이 아니라 무슨 이유가 있는 게 아닐까 싶어 아티팩트를 들여다보며 그에게 물었다.

“드라이어드가 강제로 아티팩트로 돌아가는 경우는 처음이라 당황했습니다. 얼른 다른 드라이어드들도 확인해 보겠습니다.”

그가 나처럼 황급히 아티팩트를 들여다보는 사이, 난 아티팩트에 생긴 이상 현상을 알아차렸다. 유리 돔 안이 뿌연 안개로 가득 차 있었다. 평소라면 안을 들여다보며 내 드라이어드들의 안위를 확인했을 텐데, 안개는 내가 다른 드라이어드들과 소통하는 걸 차단하고 있었다.

다시금 인삼 군락지에서의 악몽이 떠오르며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드라이어드들과 접촉을 통제시키며 아티팩트까지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힘이라…. 혹시 이곳도 세계 멸망의 여파가 남아 있는 건가?

암울한 생각이 끝없이 이어지던 그때, 뿌연 안개 속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제희!”

그건 엘더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마치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제 역할을 해내지 못하던 아티팩트가 빛을 내뿜으며… 엘더를 토해 냈다.

“너… 어떻게….”

필드로 나온 엘더는 나를 꽉 끌어안은 후 초조한 얼굴로 날 살폈다. 이곳에 있는 한 아티팩트에서 다시 드라이어드를 소환하지 못할 줄 알았는데….

“어떻게 된 거야? 다들 강제로 아티팩트로 돌아왔다고….”

그러곤 덩그러니 남겨진 데이지와 민들레들을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바라봤다.

“그 메스키트마저 강제적인 힘으로 끌려들어 갔는데 어째서 저들은 그대로 남은 거지?”

“난 그것보다 네가 아티팩트 밖으로 나올 수 있다는 게 놀라워. 다른 드라이어드들은 못 나오는 건가? 메스키트에게 뭐 들은 이야기 없어?”

“이곳이 아주 강한 힘을 가진 드라이어드의 영역일 거라고 했어. 메스키트가 그렇게 말할 정도라면 필드의 가디언이겠지.”

영역을 다루는 드라이어드라…. 그 말에 두 드라이어드가 떠올랐다. 주어진 환경에서 완전히 자신에게 이득이 되도록 통제하여 죽음의 늪은 운영하던 바곳과 스스로 현실과 동떨어진 공간을 창조해 내 다루던 포인세티아.

이 중 메스키트가 말하는 영역은 후자에 가까울 것이다.

“저는 틀렸습니다. 의뢰인님께선 또 다른 드라이어드를 밖으로 불러내는 데 성공하신 것 같은데 어째서 저는 되지 않는지….”

룽카는 쩔쩔매며 먹통이 된 아티팩트를 툭툭 두드렸다.

난 그 모습과 필드에 나온 내 드라이어드를 번갈아 보며 고찰했다. 왜 나는 되고 룽카는 안 되는 걸까? 내게 특별한 힘이 있기 때문에?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다른 드라이어드들은 소환할 수 없다는 사실이 말이 되지 않잖아?

어쩌면 원인은 드루이드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드라이어드들에게….

데이지, 민들레, 엘더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 자생 필드가 노멀 필드라는 점이었다. 이를 떠올리자 갑자기 머릿속에 번쩍 벼락이 쳤다.

“혹시…! 룽카씨, 노멀 필드 드라이어드는 없으신가요?”

“아, 노멀 필드요? 하하, 그러고보니 제가 유일하게 노멀 필드 드라이어드가 없긴 합니다. 혹시 그게 이유인 겁니까?”

드디어 이 현상에 대한 원인을 찾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필드에 남을 수 있는 드라이어드는 오직 노멀 필드의 드라이어드뿐. 내겐 다행히도 노멀 필드의 드라이어드가 꽤 됐지만 안타깝게도 룽카에겐 노멀 필드의 드라이어드가 없기 때문에 전력이 떨어지게 되었다.

노멀 필드를 자생 필드로 삼는 종은 상당히 많았다. 가장 보편적인 필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많은 경우의 수를 뚫고도 단 하나의 노멀 필드 드라이어드를 데리고 있지 않은 룽카가 놀라울 따름이었다.

“현재 필드에 있는 드라이어드들의 공통점이 전부 노멀 필드이기 때문에 의심해 봤어요. 그래서 말인데. 어쩌면 노멀 필드의 가디언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추가 단서까지.

자생 필드 간의 우열은 존재하지 않았다. 해당 필드의 드라이어드가 특이한 환경에서 더 잘 버틴다는 보너스가 존재했지만 특정 필드가 어떤 필드를 이겨 먹는 식의 틀에 박힌 우열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노멀 필드의 드라이어드가 반작용을 이겨 내고 남았다기보단 노멀 필드만 허락되었기에 남을 수 있었다고 보는 게 맞았다. 강한 힘을 가진 드라이어드가 영향력을 행세하는 영역, 그리고 그 영향력에 속해 허락된 드라이어드.

“하, 이런 곳에서 보게 될 줄이야.”

기대 반 두려움 반이었다. 솔직히 노멀 필드의 가디언은 10그루의 가디언 중 가장 만나 보고 싶은 가디언이었다. 내가 가장 전투에 많이 기용하는 엘더와 데이지의 필드인 데다 10그루의 필드 중 가장 많은 수의 종을 관할하는 필드였기 때문이다.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에서 두 가디언이 활약했던 최후의 전투를 떠올렸다. 가디언의 지휘 아래 필드에 속한 드라이어드들이 군대처럼 가디언을 따르며 움직였던 그날. 그때 생각했었다. 만약 그 상황에서 내게 노멀 필드의 가디언이 있었다면 어쩌면 우왕좌왕하는 야생 상태의 드라이어드들 중 반 이상을 통제할 수 있지 않았을까?

다른 자생 필드에 비해 특별한 점은 없으나 그렇기에 많은 종들이 속할 수 있기에 가장 두려운 힘을 가진 가디언이라고 볼 수 있었다. 카수스가 발견하기 전에 먼저 발견해서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노멀 필드의 가디언은 어떤 드라이어드일까?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