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라운 녀석이 흔적을 남겼을 수도 있으니 땅을 잘 봐야겠어요. 그것보다…. 지역이 너무 넓으니.”
룽카는 커다란 조명석이 박힌 램프를 꺼내 땅에 내려놓았다. 램프에서 푸르스름한 빛이 너르고 둥근 원을 그리며 뿜어져 나왔다.
“딱 이 주변만 살짝 흩어져서 살펴보면서 차근차근 구역을 클리어하는 걸로 하죠. 이 램프의 빛이 밝히는 범위까지만 훑고 다시 돌아오는 걸로 합시다. 절대 범위 밖으로 나가시면 안 됩니다. 실종자를 더 늘려서 좋을 건 없잖습니까?”
내 이상 증상이 더욱 심해진 걸 본 룽카는 아무래도 라운에 대한 걱정이 더 커진 게 분명했다.
“이곳에 우리를 제외한 다른 자가 있다면 족적을 남겼을 겁니다. 최근 생긴 족적만 찾는다면 대략적인 행로를 알 수 있으니 전 그걸 찾는 걸 최우선 목표로 하겠습니다.”
난 룽카가 가리키는 반대 방향을 바라보며 램프의 발광 범위를 확인했다. 연금술로 만든 조명석이 내는 빛은 횃불이나 보통의 램프보다 발광 범위가 넓었다. 이리스 파티와 함께 44번째 테라리움 주변의 동굴을 수색했을 때도 덕을 톡톡히 봤던 물건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넓어도 범위의 끝과 끝에 선 두 사람의 실루엣을 확연히 확인할 수 있는 범위였다.
“그래요.”
난 룽카의 제안을 수락한 후 그가 가는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혼자 떨어져서 행동해야 하니 드라이어드는 필수였다. 이왕이면 수색에 도움이 되고 이 상황에 잘 맞는 드라이어드들로.
“아… 냄새가 더욱 심해졌어요. 드루이드 님, 괜찮으세요?”
먼저 이번 사건의 키포인트라 여기는 데이지. 악취 페널티를 겪게 하는 건 미안했지만 데이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날 바라봤다. 유일하게 나와 같은 이상 현상을 겪고 있는 그녀라면, 내가 아닌 드라이어드의 관점으로 새로운 단서를 얻어 낼 수 있지 않을까?
“이곳에선 포인세티아의 잎 한 장도 찾아볼 수 없겠지만 날 부른 건 잘했어.”
한창 카수스의 행방을 쫓고 있을 포인세티아의 도움도 빌렸다. 아직 그녀의 능력을 많이 확인해 보진 않았으나 내 드라이어드 중 수색과 추격에 가장 특화된 능력을 가지고 있음은 분명했다.
더구나 일시 무적 상태가 될 수 있는 능력도 있으니 추격을 위해 그녀 홀로 떨어질 일이 있어도 안심이었다.
“…….”
“…….”
그리고 한창 사춘기를 겪고 있는 민들레 아이들…. 날 보는 시선이 상당히 삐딱했다. 뾰로통하게 나온 입술은 귀찮게 왜 불렀냐는 뜻이 담겨 있는 듯했다.
유치원생 크기의 묘목일 때 내게 온 아이들은 다른 드라이어드들과 다르게 28번째 테라리움에서 데이지2와 함께 머물며 정석적인 성장 시기를 보냈다.
전투에 자주 참가할 수 있을 만큼 성장한 상태도 아닌 데다 아이들을 영입한 이후 혹독한 전투들이 계속 이어지다 보니, 훈련과 교육은 대부분 데이지2를 비롯한 아티팩트에서 대기 중이던 드라이어드들이 틈틈이 맡게 되었다.
즉 실전에 나설 일이 적으니 성장 속도는 자연에서 머무는 다른 드라이어드들보다 조금 더 빠른 수준이었다는 거다. 어린 묘목에서 성장한 경우는 실새삼도 있긴 하지만 이미 속은 늙을 만큼 늙은 꼰대였으며 제외다.
민들레 아이들은 유치원생 정도의 크기에서 초등학생 크기로 자랐고 어느덧 막 중학교에 입학한 크기가 되어 이렇게 내 앞에 서게 되었다. 그리고 지독한 사춘기를 앓고 있었다….
“오랜만이지? 그동안 많이 못 돌봐 줘서 미안해.”
“아, 뭐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요.”
아직 애티가 나는 목소리가 웅얼웅얼 반항기를 표출한다.
나무들도 사춘기를 겪나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메스키트가 말하길 엘더와 마거리트는 아직도 사춘기인 것 같다고 했었다.
드라이어드는 인간과는 사춘기라는 개념이 조금 달랐다. 성목이 되어 가며 버팀목이 되어 주던 성목들로부터 자립하고 싶어 하는 욕구와 막 자리 잡기 시작한 미성숙한 자아와 가치관이 충돌하는 시기라고 했다.
반항기도 최고, 자만심도 최고, 자기만의 세계 안에 갇히기 아주 쉬운 시기. 민들레들은 둘이니까 이 모든 게 두 배.
마거리트는 이 시기에 세계수 밖으로 나가고 싶어서 그렇게 떼를 썼다고 했던가….
섬세하게 다뤄야 할 아이들을 부른 이유는 이들의 꽃씨 퍼트리기 기술이 수색에 아주 탁월했기 때문이다. 가막살나무 군락지를 찾을 적 넓은 지역에 하늘하늘 날아다니는 민들레 씨를 퍼뜨려 단 시간에 많은 지역을 살필 수 있었지.
“어머, 이 묘목들은 처음 보는데! 정말 귀엽잖아? 스노우 필드의 드라이어드들이 떠오르는 걸.”
민들레 아이들을 보며 포인세티아가 화색을 띠며 반겼다. 스노우 필드의 체구가 작은 드라이어드들이 떠올라 더욱 기뻤던 모양인데 민들레 아이들의 심기를 제대로 거슬리게 만들 것인지 그들의 눈빛이 곱지 않았다.
포인세티아는 그동안 바삐 움직이느라 아티팩트에 거의 머물지 못한데다 28번째 테라리움을 제집처럼 드나드는 다른 드라이어드들과 달리 내 곁에 머무르는 걸 더 선호했기에 민들레 아이들과 안면이 없었나 보다.
같은 영혼의 연결을 한 드라이어드라도 서로가 존재한다는 건 인식하지만 직접 만나 보는 건 또 다르니까.
“흥, 귀엽다뇨? 저희를 묘목 취급 하시는 거예요?”
“그런 거예요? 저희 이제 묘목 아니거든요?”
머리 끈 하나로 티격태격 귀엽게 싸웠던 아이들이건만…. 지금은 그 머리 끈은 온데간데없었다.
“세상에! 성격도 우리 스노우 필드의 드라이어드들이 떠올라서 더 깜찍해!”
하지만 찬 바람이 쌩쌩 날리던 스노우 필드 출신의 포인세티아에겐 아이들의 툭툭 내뱉는 말도 그리움을 자극하는데 그쳤다.
확실히… 눈산의 드라이어드들은 포인세티아에게 상당히 매몰찼으므로 오랜 시간 그 성격들을 버텨 오며 발랄하게 지냈던 그녀에겐 민들레 아이들은 정말 애들 장난 수준으로 보일 터였다.
난 셋에게 느껴지는 의외의 케미에 살짝 즐거운 마음이 들었다.
“샛노란 색도 너무 사랑스러워! 복수초 드라이어드들이 떠오르는 사랑스러운 색이야!”
와락!
본래 인간들을 무척 사랑한 나머지 필드의 가디언이 될 정도였던 포인세티아는 항상 애정이 넘쳐났고, 결국 스노우 필드의 드라이어드들도 너무 사랑한 나머지 그들과 비슷한 모습을 한 민들레 아이들에게까지 애정 공세를 펼치고 말았다.
난데없이 진한 포옹을 받은 민들레들은 질색하며 포인세티아를 떨어뜨려 놓으려 발버둥 쳤다.
“음… 데이지2는 저렇게 살가운 성격이 아니고…. 아이들의 교육을 자주 책임졌던 메스키트도…. 엘더는 묘목들에게도 평등하게 싹수없이 굴었으니….”
어쩌면 민들레들은 저렇게 무한정 애정을 방사하는 드라이어드는 처음 만나 봤을지도 모른다.
“이거 놔! 혼내 줄 거야!”
“맞아! 따끔하게 혼내 줄 거야! 우리도 다 컸다고!”
“묘목이라고 우습게 보는 거면 이렇게!”
화아아.
아이들이 솜뭉치를 닮은 스태프를 들어 올려 능력을 사용하자 그 끝에서 새하얀 민들레 꽃씨를 닮은 빛 무리들이 터져 나와 사방에 흩날렸다.
사실 민들레 아이들은 회복형 드라이어드였으므로 특별한 공격 스킬이 있진 않았다. 그들의 포레스트 왕이었던 단델리온도 파괴적인 공격 스킬을 사용한다기 보단 군락지 일대를 뛰어난 은신 안개를 사용해 숨기는데 그쳤으니까.
그러므로 하얗게 터져 나온 빛은 포인세티아에게 조금도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모 게임의 잉어 몬스터가 튀어 오르기 기술을 사용한 격이었다.
“어머! 나도 비슷한 거 할 줄 알아!”
그저 재롱으로 보이는 민들레 아이들의 기술에 포인세티아는 방방 뛰며 두 손을 하늘 위로 올렸다.
살짝 벌린 손 안에 그녀의 무기인 투명한 크리스탈 오브가 번쩍 나타나더니 둥 떠올랐다. 그러곤 민들레 아이들이 사용한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눈부신 빛이 터져 나왔고…. 순식간에 일대의 기온을 빠르게 떨어뜨렸다.
곧이어 포인세티아의 머리 위로 몽글몽글 뭉친 빛 무리가 커다란 구름 형태를 띠더니 어두운 하늘에서 반짝반짝 빛이 나는 눈송이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거 스노우 필드에서 가져온 눈이야!”
설마 그 설산에서 펑펑 내리던 눈이…. 하긴 어떤 드라이어드가 눈을 내리는 기술을 쓸 수 있겠는가. 결국 포인세티아가 여태 써 왔던 눈과 관련된 기술들이 스노우 필드에서 빌려 오는 형태를 취한 것이었음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난 해맑게 웃으며 아닌 밤중에 눈을 내리는 포인세티아의 행동에 이마를 쳤다. 조금은 환장할 노릇이었다.
“추워!”
“추워! 이게 무슨 짓이야?”
노멀 필드 출신의 민들레 아이들에게 이런 추위는 처음이었을 거다.
테라리움은 사계절이 뚜렷하지 않고 12월에 가까워지면 기온이 조금 떨어지는 정도인데다 기후 특색을 띄는 필드가 따로 나뉘어져 존재하고 있으니 어쩌면 눈 자체를 처음 봤을 수도 있다. 더구나 저 아이들은 봄의 대표 꽃이지 않는가?
민들레 아이들은 삐딱한 자세로 한껏 건들거리다가 눈송이를 맞고는 화들짝 놀라 서로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그리고 눈을 펑펑 내리는 포인세티아를 향해 악랄하게 저주를 퍼부었다.
“어머, 노멀 필드에겐 너무 가혹했나?”
그녀가 황급히 오브를 쥐고 하늘 위에 떠 있는 작은 눈구름을 회수했다. 그러자 일대에 내리던 눈도 멈추었다. 바닥에 희끗희끗 남은 눈들이 조금 전 어떤 소란이 있었는지를 알려 줄 뿐이었다.
“의뢰인 님!”
결국 세 그루의 드라이어드가 벌인 소란을 알아차린 룽카가 황급히 이쪽으로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난 수색을 하기 위해 그저 드라이어드들을 소환했을 뿐이다. 그리고 소환된 드라이어드들이 내가 뭘 어떻게 해 보기도 전에 사고를 쳤을 뿐이다….
필드로 나오자마자 착착 자리를 찾아 이동하고 일할 준비를 끝내는 기존의 드라이어드 조합만 상대하다가 생판 다른 조합을 사용했더니… 밀려 있던 인연 퀘스트가 일제히 오픈 되는 걸 겪는 기분이었다.
“방금 눈이 온 건가요?”
“아… 그게 제가 스노우 필드 드라이어드를 데리고 있긴 한데….”
민들레 아이들은 눈이 그쳤어도 여전히 포인세티아를 째려보는 걸 멈추지 않았다.
“덕분에 단서를 찾았습니다. 눈송이에서 빛이 나서 잠시간 시야 확보가 된 데다 눈들이 움푹 파인 곳에 집중적으로 쌓여서 족적을 빨리 찾을 수 있었습니다.”
소 뒷걸음치다 쥐 잡는 격이라고 했던가. 그래도 단순히 소란으로 끝날 뻔한 일이 좋은 결과를 내서 다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