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일찍부터 출발한 마차는 75번째 테라리움부터 78번째 테라리움까지 정주행이 예정되어 있었다. 다들 축복이 더 약해지는 번호로 내려가게 되자 긴장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마부를 제외한 다섯 명의 호위 인원은 모두 드루이드였는데 정확한 실력은 아직 몰랐다. 자신 있게 호위 의뢰에 나선 걸 보면 그래도 꽤 실력이 있을 텐데, 이리스 파티의 실력 정도는 될까?
<테라리움 어드벤처>는 드라이어드가 많다고 무조건 강하다고 보긴 힘들었다. 덱에 소나무만 채운 노토스가 그러했다. 이리스 파티는 4명이 함께하며 서로의 드라이어드를 스톤헨지 모드로 공유하여 서로의 약점을 보완했다. 어쩌면 이렇게 선출된 5명도 그러한 시너지를 일으키는 멤버들로 구성된 것이 아닐까 싶었다.
특히나 개중 가장 막내라는 멤버에게 기대가 컸다. 로웰라 또래면서 벌써 뒤 번대 테라리움에서 활동하며 호위 의뢰까지 뛸 정도라니. 로웰라도 물론 최근 길드전이라는 큰 임무를 치르긴 했으나 뉴비였던 시절이 오래지 않은데 그의 실력이 무척 궁금했다.
로웰라를 떠올리며 오래 살핀 탓인지 내 시선을 받은 그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 그렇게 걱정스럽게 쳐다보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려 보여도 1인분은 할 수 있고, 형들이 말한 것처럼 그렇게 사고뭉치도 아닙니다!”
아마도 내 시선을 오해한 것이 분명하다. 그의 황급한 변명에 마차 안이 왁자지껄한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와하하! 정말이에요. 저희가 신성한 의뢰에 수습생을 데려왔겠습니까? 장난을 좀 치긴 했지만 라운 녀석도 어엿한 전투원입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거 이 녀석의 실력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가벼운 전투라도 벌어지길 기원해야 하나?”
“아, 오해한 건 아니에요. 그저 저희 길드에도 비슷한 또래의 길드원이 있어서 그 애가 생각나서 그랬어요.”
“오… 라운과 비슷한 또래 길드원이요?”
“네, 음. 지금쯤 위장 임무를 진행 중이겠네요.”
“우와, 위장 임무는 어떤 건가요?”
또래 이야기가 나와서일까? 라운이 반짝거리는 눈으로 이야기에 집중했다.
“누군가로 위장해서 적을 꾀어내는 임무에요. 누군가의 목숨을 노리며 끈질기게 스토킹하는 적이 있는데 후환을 제거하기 위해 아예 불러내서 잡으려는 거죠.”
“우와! 미끼면 굉장히 위험한 역할 아닌가요?”
어쩌다 보니 로웰라에 대한 자랑이 되어 머쓱해졌다. 하지만 저쪽도 은근 만만찮았다.
“라운도 말입니다. 상대로 하여금 오해를 불러일으켜서 어부지리로 범죄자를 잡은 적 있는데 말입니다. 행정 관리원의 아들인 줄 알고 뒤에서 노리고 접근했던 걸 운 좋게 잡았지요. 의도했던 건 아니지만 이것도 위장 임무에 재능이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 그게 어떻게 위장 임무야!”
“저희 애는 그림 솜씨도 제법 좋아서 한 번 본 암호문을 순식간에 종이에 금방 베껴 내더라고요.”
난 로웰라와 함께 은둔자의 정원을 모험했던 일을 떠올렸다. 그녀는 공중 정원의 벽화를 단시간에 거의 복사하는 수준으로 그려 냈었지.
“오! 라운도 글씨체는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영 꽝인데 글씨를 쓰는 걸 포기하고 그림을 그린다는 생각으로 하랬더니 정말로 똑같은 위조 문서를….”
“제… 제발 그만….”
“저희 애는….”
이야기를 하다 보니 느꼈다. 우린 모두 팔불출이었다. 자연스럽게 길드의 막내 자랑 배틀이 벌어졌던 것이다. 마치 서로가 키우는 반려동물의 사진이나 좋아하는 아이돌의 사진을 주고받으며 끈질기게 영업하는 꼴이었다. 서로에게 절대 지고 싶지 않은 그런 배틀이….
“이거 정말… 대단한 길드원을 데리고 계셨군요.”
“그쪽도요.”
허공에 스파크가 튀는 것이 느껴졌다. 우리는 훗날 두 막내 길드원을 대면시켜 실력을 겨루는 교류의 시간을 갖는 것도 좋을 것 같다며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정확한 날짜가 정해지지 않은, ‘나중에 밥 한번 먹자’와 같은 의례적인 인사치레였으나 로웰라는 그날이 오기 전까지 폭풍 수련을 시켜 둘 것이다. 지는 꼴은 절대 못 본다.
칭찬 배틀이 무르익으며 라운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토마토처럼 붉어졌다. 만약 이 자리에 로웰라가 있었다면 그녀는 오히려 이 순간을 즐겼을 것이다. 그 애는 은근히 관종 기질이 다분하여 연예인이 천성에 잘 맞을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이동하는 도중 틈틈이 불의 습격이 일어났고 축복의 균형이 무너진 탓인지 앞 번대의 지형에서 쉽사리 보기 힘들 정도로 몸집이 큰 불은 꽤나 위협적이었다.
더구나 시들링과 처음 만났을 당시 맞닥뜨렸던 마차 형태의 불도 습격의 대열에 참여했다. 물론 그때처럼 힘든 보스전을 치러야 할 만큼 대단한 수준은 아니었으나 배회하던 야생 드라이어드를 삼킨 것인지 5명이 전부 달라붙어야 간신히 해치울 수 있었다.
아직까진 인력이 부족할 정도로 치열한 전투는 일어나지 않았고 에르바 길드원들의 능력도 상당히 수준급이라 나까지 전투에 합류해야 할 정도는 아니었기에 전투 내내 마차 안에서 마부와 함께 대기했다. 드루이드긴 해도 엄연한 의뢰인이라 호위를 잔뜩 고용한 덕을 보고 있었다.
특히나 궁금했던 라운의 실력도 확인했다. 마차 안에서 지켜본 결과 로웰라를 훨씬 웃도는 전투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어린 나이인데 다른 길드원들에게 밀리지 않으며 제 몫을 해내는 것이 제법이었다.
그들이 다루는 드라이어드는 눈에 익은 종이 대부분이었지만 완전 처음 보는 드라이어드도 간간이 섞여 있었다. 난 틈틈이 메모리 스톤을 확인하며 새로운 종의 드라이어드에 대한 정보를 습득했다.
버릇처럼 내 드라이어드들의 기술을 이용해 대처할 방법을 떠올리다 보니 새삼 아직도 이 세상에서 내가 모험한 것은 겨우 일부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은 아직도 넓었고 만나본 적 없는 드라이어드는 한참이나 많이 남아 있겠지. 어쩌면 지금까지 만난 드라이어드의 몇백 배는 더 많을지도 모른다.
난 그렇게 넓고 큰 세상을 품에 안을 신이 되려 하고 있었다. 조금은 벅찬 감정이 가슴속을 채웠다.
전투가 끝나면 꼼꼼하게 마차를 살피고 보수했다. 이런 곳에서 이동 수단이 망가진다면 상당히 낭패였기에 전투에 영향을 받지 않았더라도 매번 점검하는 것이다.
“하, 조금 오래 걸렸지요? 하지만 곧 75번째 테라리움입니다.”
70번대의 첫 번째 소멸된 테라리움에 방문했을 땐 벌써 점심이 지나가고 있었다. 우린 적당히 안전한 곳에 자리 잡고 간단히 점심 식사를 때우기로 했다.
“저긴 언제 망했나요?”
“아마 라운 녀석이 태어났을 즈음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다면 망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었다. 멀리서 바라보는 테라리움은 쌓였던 재 가루가 작은 바람에도 꽃가루처럼 흩날리고 있었다.
반파된 건물들과 이리저리 흐트러진 먼지 묻은 집기들이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거대한 벌레 불에 의해 소멸 직전 상태까지 갔던 과거 28번째 테라리움보다 훨씬 심각한 풍경이었다.
한때 테라리움이 있었던 흔적의 상당 부분이 세월에 마모되었으나 여전히 태는 났다. 즉 내가 찾던 곳은 아니란 거다.
“저런 곳에 실종된 사람들이 묻혀 있다 해도 모를 것 같네요.”
“그렇죠. 굳이 재 속을 뒤지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불이 아니라 괴물이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곳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저곳도 한때는 사람들이 붐비고 어엿한 마을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겠지. 과수원에선 드라이어드 열매가 맺히고 여행자들이 바삐 오가고….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전부 어디로 갔을까?
세계수의 축복은 전능하다. 하지만 이젠 고작 이런 마을 하나 제대로 지키지 못한다는 게 참 복잡한 심정이 든다. 이대로 계속 세계수의 힘이 감소하는 추세가 이어졌다면 종래엔 몇 개의 테라리움만 남게 됐을까?
“많이 드시진 않으셨네요. 바로 이동하시겠습니까?”
난 영 입맛이 없어서 깨작거리던 음식을 내려놓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까진 저런 광경을 보며 아무렇지도 않게 음식을 씹어 먹을 정도는 되지 못했다. 이제 이런 테라리움을 세 개나 더 봐야 한다는 거지?
막 76번째 테라리움을 향해 나아갈 때였다.
“욱.”
난 치밀어 오는 토기에 황급히 입과 코를 막았다. 그 때문에 마차는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잠시 멈춰 섰다.
“괜찮으세요? 멀미하시는 건가요?”
“아뇨, 저 멀미 없어요. 다만….”
이건 멀미 따위가 아니었다. 어디선가 지독한 썩은 내가 풍겨 오며 속을 뒤집어 놓고 있었다. 정말 끔찍한 냄새였다. 이 고약한 냄새를 뭐라 표현할 수 있을까? 마치 시체가 썩는 듯한….
마차 창문을 통해 새어 들어오는 냄새는 내가 아무리 코를 틀어막는다 해도 전부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런 냄새를 맡은 것은 오직 나뿐이란 듯이 다들 태연했다.
“죄송하지만… 이 지독한 냄새가 아무도 나지 않으시는 건가요? 마치 시체가 썩는 듯한 끔찍한 냄새가 나는데요?”
“냄새요? 글쎄요?”
다들 냄새를 참으며 태연한 기색을 보이는 걸론 전혀 보이지 않았다. 정말로 아무 냄새를 맡지 못하는 듯했다. 더구나 마차 밖에 있는 마부 역시 금시초문이란 표정을 했다.
“참기 힘드신가요? 어쩌죠…? 저흰 정말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아서…. 마차를 돌릴까요?”
난 마차를 돌리겠냐는 질문에 상당히 오래 고민했다. 구역질이 날 정도로 불쾌한 냄새는 당장 이 자리를 뜨고 싶게 만들었다. 그러나 떠나선 안 된다고 감이 외치고 있었다. 어쩌면 이 지독한 냄새가 어떠한 징후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리스에게 의뢰 도중 끔찍한 냄새를 맡았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혹시 마차 안의 다른 이들처럼 맡지 못했던 걸까?
“잠시만요. 해결책이 있어요.”
대형 마차는 5명이 앉아도 자리가 남았다. 그래서 드라이어드 하나쯤은 불러내 함께 앉아 가도 괜찮을 듯했다.
난 곧바로 엘더를 소환해 찰싹 달라붙어 엘더 플라워의 달콤한 향을 힘껏 들이마셨다.
갑자기 소환된 엘더는 살짝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지만 심각한 상태인 나를 위해 기꺼이 제 품을 빌려주었다. 엘더에게 파묻혀 있으니 온몸이 정화되는 기분이었다. 역시 최고의 회복형 드라이어드다웠다.
“계속 가죠. 이제 참을 만해졌어요.”
“어… 네, 알겠습니다.”
다들 당황한 눈치였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마차를 출발시켰다.
대체 이 냄새의 근원이 뭘까? 왜 나 말고 다른 이들을 맡지 못하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