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1화 (451/604)

만약 소멸한 테라리움으로 범위를 줄인다면 몇 개가 특정이 된다. 하지만 이 뒤 번대는 소멸한 테라리움이 꽤 많았기에 범위를 더 줄일 필요가 있었다.

난 마차를 타고 지나가다 봤던 67번째 테라리움을 떠올렸다. 그곳 역시 소멸했지만 외곽을 두르는 울타리나 내부 건물들이 많이 남아 있어서 한때 테라리움이 있던 곳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러니 정말로 이리스 파티가 테라리움인 것을 눈치 못 챘다면 어쩌면 상당히 훼손되고 마모된 테라리움일 것이다. 여기서 거리가 먼 62번째 테라리움은 행정 불가로 망했지만 침입이 있었던 건 아니므로 아직까지 건물들이 멀쩡하게 남아 있는 걸로 알고 있다.

그곳은 도적들이 남아 있는 집기들을 털어 가기 위해 빈번하게 들락날락거린다고 했으니 그곳도 패스. 그렇다면 70번대의 4개의 소멸 테라리움이 남는데….

나머지는 직접 확인해 보는 방법이 가장 나을 듯했다. 70번대 테라리움에서도 답을 얻지 못한다면 최악의 경우 80번대까지 내려가야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리스 파티를 겨우 지문 지정 형식의 지도로 그 먼 거리까지 유도할 수 있었을까?

“어디 보자… 70번대에서 소멸 판정이 난 테라리움은….”

상당히 상태가 심각했다. 75번부터 주르르 75, 76, 77, 78이 연달아 죽어 있었다.

“7은 행운의 숫자라 77번째 테라리움이란 이름을 들으면 행운의 테라리움이란 생각이 먼저 드는데… 영락없이 소멸했구나. 덧없네.”

차라리 해안에 맞닿은 테라리움들은 상태가 나았다. 적어도 해상 교통의 영향을 받아 육지보다 비교적 빠른 지원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소멸 테라리움도 뒷자리가 4번 이후에 포진되어 있는 편이었다.

타고 왔던 마차는 돌아갔고 뒤 번대까지 운행해 줄 마차를 찾는 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어디든 오가는 상행 마차들도 뒤 번대 테라리움으로의 영업은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었기에 항상 도움을 받았던 황금 호박 상회의 마차를 구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뒤 번대로 갈수록 번듯한 기업들은 진출하여 분점을 내는 것이 사실상 의미가 없었다. 제값을 치르고 품질이 보증된 상품을 구매할 수 있는 사람들이 없었기에 대부분 테라리움 안의 내수경제가 활발했다.

번호 연계법으로 앞 번대에서 지원을 보내긴 해도 큰 의미는 없을 것이다. 어쩌면 44번째 테라리움처럼 페이크 로열들이 활개치고 다니는 곳이라면 지원품들을 전부 위에서 꿀꺽했을지도 모르지.

일단 급한 대로 양조장에서 가까운 66번째 테라리움에 머물며 70번대로 내려가는 마차를 수소문했다. 마차를 구한다고 잔뜩 소문을 내놓은 덕에 마차를 보유중이라는 무명 길드와 겨우 연락이 닿았다.

66번째 테라리움의 내부 시설은 여태 다녀온 테라리움 중에 가장 최악이었다. 그나마 과수원에서 직영으로 운영 중인, 드루이드들을 대상으로 한 여관이 가장 나은 편이라 그곳에서 묵으며 길드에서 사람을 보내 줄 때까지 기다렸다.

테라리움에서 가장 고급 여관이라고 하지만 1층에 카운터, 식당, 객실이 전부 욱여넣어져 있었으며 그마저도 객실은 두 개가 전부였다.

“드루이드들의 발길이 거의 없는 건가….”

양조장에서 봤던 상태가 심각한 테이블이 이곳에도 있었다. 그나마 매일 닦는지 먼지는 없었지만 테이블에 손을 올리니 끈적거렸다. 나뭇결 사이의 틈이 너무 많이 벌어져 안에 정체 모를 쓰레기들이 박혀 있는 것이 보였다.

이런 곳에서 딱히 뭘 먹고 싶진 않았지만 내가 들어설 때부터 기대에 찬 눈으로 하염없이 이곳을 응시하는 주인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음료를 시켰다.

“마실 거라곤 술밖에 없는데 괜찮소?”

“그럼 그거라도 주세요.”

“술은 맥주, 과실주 등등이 있는데….”

“가장 비싼 걸로 주세요.”

그러자 주인장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카운터 밑으로 허리를 숙였다가 웬 병을 안고 일어났다. 표면이 먼지가 굳어 희끗한 녹색 병엔 익숙한 라벨이 붙어 있었다. 바로 좀 전에 방문했던 양조장의 발효통에 붙어 있던 마크였다. 가장 비싼 술이라 해도 싸구려 술을 만드는 양조장산이라니.

“안주는 뭐로 하실 거요?”

“안주는 괜찮아요.”

가장 비싼 술을 시킨 것이 화근이었을까. 조금이라도 더 다이아를 뜯어내기 위해 이것저것 묻는 것이 꽤나 끈질겼다. 다른 음식점에는 없는 신선한 치즈를 보유 중이라든가 말만 한다면 갓 구운 빵을 공수해 오겠다든가….

하지만 배도 고프지 않을뿐더러 정말로 이 테이블에선 뭘 먹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기에 좋게 웃으며 거절했다. 내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친절은 비싼 술을 시키는 것이 다였다. 성이 난 주인장이 가격을 얼마로 책정하든 상관없었다.

예전 같았으면 주머니를 열어 다이아를 술술 내놨겠지만… 44번째 테라리움에서 배운 것이 있었다. 다이아 쓰는 걸 상황에 따라 주의해야 한다는 것.

술을 따라 마시라며 잔이 서빙되었지만 안에서 쿱쿱한 물때 냄새가 나는 데다가 컵 바닥에 얼룩이 보여서 멀리 밀어 뒀다.

60번대 여관이 이 정도 수준이라면 70번대엔 아예 여관이 없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차를 찾는 사람이 있다던데?”

술병에 있는 양조장 라벨만 멍하니 바라보며 조금 시간을 보내자 마침내 길드에서 사람이 찾아왔다.

“아, 저예요.”

“반가워요. 전 에르바 길드의 위즈예요.”

아스키아 길드와의 일로 어느 정도 유명한 길드의 이름들은 리스트를 받아 쭉 살펴봤었다. 그런데도 ‘에르바’라는 길드의 이름은 아예 처음인 듯 낯설었다. 그저 뒤 번대에서 근근히 활동하는 무명 길드인 듯했다.

위즈는 머리를 완전 짧게 자르고 그 위에 검은 두건을 두른 여자였다. 이마의 두건이 가리는 부위 아래로 옅은 화상 자국이 길게 이어져 눈 바로 위까지 내려왔는데, 화상이 이어지는 부위에 눈썹이 없는 것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양쪽 귀의 귀걸이도 눈썹 못지않게 인상적이었는데, 끝이 뾰족한 막대형 귀걸이는 귀를 뚫어 간신히 꽂아 놓은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안녕하세요. 전 드루이드 제희입니다.”

짧은 인사가 끝나고 위즈는 스스럼없이 테이블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그녀는 마개도 따지 않고 구경 중이던 술병에 아주 큰 관심을 보였다.

“아… 드실래요?”

“하하, 업무 중엔 금주지만 음주가 의뢰인과의 친분 형성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 된다면 충실해야죠.”

재빠르게 위즈의 앞에 새 잔이 놓였으며 때를 놓치지 않고 안주를 시키겠냐며 다시금 주인장이 은근히 채근했다. 할 수 없이 메뉴 선택은 온전히 위즈의 의사에 맡겼다.

“사실 이렇게까지 잘해 주지 않으셔도 마차 출발일을 앞당기는 건 무리인데 말이죠.”

내 모든 행동이 아첨과 뇌물로 느껴진 것인지 위즈가 슬쩍 입을 뗐다. 아직 마차 사정에 대해 몰랐으나 그녀의 말로 인해 대략적인 상황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어디까지 가시는 건가요? 앞 번대로 가시는 거라면 근시일 내로 구할 수 있지만 설마… 뒤 번대로 갈 마차를 구하시는 건가요?”

“제가 이곳 마차 사정을 잘 몰라서요.”

10원 동전보다 작은 고기가 얇은 꼬치에 부실하게 엮인 안주가 나오고 위즈는 거침없이 술안주를 즐기며 마차 상황을 설명했다.

“70번대로 갈 일이 있다면 한 번에 이용자를 많이 모아서 가요. 인력이나 유지비를 따져 보면 한 5명 이상은 모여야 할 거예요. 80번대는 가지 않으니 70번대에서 마차를 또 구하셔야 해요.”

우물우물, 음식을 씹는 걸 멈추지 않는 걸 보니 어지간히 배가 고팠나 보다.

“그리고 반드시 저희 에르바 길드에서 경호 인력을 둘 이상 고용하셔야 하고요. 물론 마차 이용 요금은 따로, 짐이 많다면 운송 요금도 추가되어서….”

꿀꺽꿀꺽, 마개를 딴 지 불과 5분도 안 됐는데 벌써 술이 반이나 사라진 것이 보였다.

“저, 다이아를 더 낸다고 해도 앞선 규칙들을 반드시 따라야 하나요? 제가 시간을 많이 허비할 순 없어서요.”

마차로 이동하면 불의 공격을 받기 좋기에 경호 인력을 고용하는 건 흔했다. 하지만 듣자 하니 여긴 인당 경호 인력을 최소 2명 이상씩 고용해야 하는 듯했다. 마차는 어쩌면 그레이트 빈 연합에서 인력을 옮길 때 쓰는 초대형 마차일 것이다.

“탑승자 중에 드루이드 분이 많이 계시면 말이 달라지긴 하지만… 저희 측의 손해를 메꾸려면 겨우 추가 요금 더 내는 정도로는 안 되지요.”

“그 추가 요금이 아주 많다면요?”

내 말에 위즈의 눈빛이 달라졌다.

“음… 혼자서 다른 4명분의 요금을 다 내신다면 또 모를까….”

“그 정도만 내면 당장 이용 가능하다는 건가요?”

“아니, 진심이세요? 아직 1인분 요금도 얼마가 드는지 듣지 않으셨잖아요.”

한참을 나를 기이하게 바라보던 위즈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저기… 이런 일은 제가 아니라 저희 길드 마스터와 상의해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쉴 새 없이 음식에 손을 대던 위즈의 태도가 급 공손해졌다. 그녀는 한 손엔 꼬치를 들고 쭈뼛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만요.”

그러곤 여관 밖으로 나가 뛰노는 아이들 중 하나를 잡아 꼬치를 쥐여 주곤 뭐라 말하기 시작했다. 얼핏 듣기론 길드에 사람을 부르러 심부름을 보내는 듯했다. 일을 끝낸 후 자리로 돌아온 위즈가 머뭇머뭇 내게 말을 걸었다.

“저기… 혹시 엄청 유명하신 분이셨나요? 앞 번대 테라리움에서 파견 나오셨다거나 대형 길드에서 의뢰차 방문하셨다거나…. 제가 견식이 좁아서 미처 알아보지 못하고….”

“제 태도에 오해하신 듯한데 전처럼 편하게 대해 주세요. 유명한 사람은 아니고…. 그냥 좀 다이아가 많고 바쁜 사람일 뿐이에요.”

위즈는 그 말을 어떻게 믿느냐는 표정이었다.

“저… 그런데 마스터가 오셔서 비용을 생각하신 것보다 좀 높게 부를 수도 있어요. 최근에 70번대 테라리움에서 실종 사건도 잦고 불의 위협도 상당해서….”

“실종 사건이요?”

“네, 그래서 경호 비용이 훌쩍 뛸 수도….”

“여행자가 실종되는 건 흔치 않나요?”

“보통 불에 당해서 시체를 찾기 힘든 경우가 많긴 하지만 기이하게도 정말 실종자들의 시체를 단 하나도 찾지 못하고 있어서 특별하게 보고 있어요. 실종자 가족들의 의뢰를 저희 길드에서도 간간이 받고 있는데 날 잡고 근처를 쥐 잡듯이 뒤져도 안 보이거든요. 보통 그 정도하면 유품이라도 건져야 하는데 그마저도 보이지 않고….”

“그건 좀 수상하게 들리네요.”

“그렇죠. 그래서 불 외의 다른 미지의 적들도 염두에 둬야 돼서 경호 비용을 세게 부를 수도 있는 점 미리 양해 부탁드려요….”

실종 사건이라. 어쩐지 그 사건의 근원지에 내가 찾던 무언가가 있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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