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0화 (450/604)

“글쎄 드루이드로 이루어진 파티라면 수없이 많이 봤지.”

분명 뭔가 아는 눈치인데 은근히 말을 피한다. 여전히 질문의 의도를 경계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분들은 제 길드원들로….”

결국 난 이곳에 방문하게 된 연유에 대해 그에게 설명했다. 찾고 있는 장소가 있으나 지도로 찾을 수 없는 점, 그렇기에 과거 그 장소를 방문한 적 있는 길드원들의 경험을 토대로 유추해보려 한다는 점 등을 말했다.

“혹시 이 근방에 신전형 던전이 있다는 소문을 들어보신 적 없나요? 입구에 드라이어드 조각상이 많이 있다던데.”

“이 근방은 불에 의해 싹 다 타 버렸지. 사람 사는 마을도, 문화재도. 그런 게 있다하더라도 온전하지 않을 거라고 보네만….”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그렇다면 역시나 그들의 행보를 유추해 보는 수밖에 없는데.”

“여자 하나에 남자 셋으로 이루어진 팀이라고 했소? 그러고 보니 그런 의뢰를 맡겼던 적이 있군.”

경계를 풀었는지 드디어 이리스 파티에 대한 이야기를 해 준다.

“사실 나 역시 의뢰를 받아 그들을 고용했던 거요. 한마디로 내가 중간 연락책이었던 셈이지.”

말을 하면서도 머뭇거리는 걸 보니 여전히 이 이야기를 해도 되는 건지 의구심을 품고 있는 게 분명했다. 어쩌면 계속 말을 아꼈던 건 날 경계해서라기보단 의뢰 내용에 문제가 있었던 게 아닌가 싶었다.

“솔직히 이런 싸구려 양조장이나 운영하는 사람이 어디서 큰 다이아가 생겨 드루이드가 넷이나 되는 팀을 고용할 수 있었겠소? 이런 험난한 지역에서 의뢰를 맡아 줄 실력 있는 드루이드를 한 명만 구하려 해도 우리 가족은 2주는 쫄쫄 굶어야 할 거요.”

“어떤 의뢰였나요? 제가 듣기론 단순히 물건을 구해 오란 의뢰였다고는 했는데.”

60번대 테라리움에서 진행된 의뢰치곤 단순해서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이리스 파티가 4명이 한 팀으로 움직인다곤 하나 어쩐지 드루이드가 넷이나 필요한 의뢰라곤 생각되지 않았지.

물론 이리스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뒤 번대 테라리움까지 가는 경비를 따져 봐도 상당히 이득인 낮은 난이도의 의뢰이기에, 의뢰가 뜨자마자 바로 선점했다고 한다.

더구나 실제 의뢰를 진행했을 때도 그다지 어려운 건 없었다고 했지.

“지정 장소에 가서 책을 한 권 가져다 달라고 했소. 위치는 지도로 받았지. 난 의뢰 내용과 지도를 그대로 드루이드 팀에게 전달해 줬을 뿐이오.”

혹시 이리스 파티가 길을 잃은 연유와 의뢰 내용은 아예 관련이 없는 게 아닐까? 아무리 들어 봐도 특별할 것이 없어 보이는데….

“지도는 확인해 보셨나요?”

“음, 기이한 지도였소. 큰 바위를 기준으로 동쪽으로 10미터, 그곳에서 다시 남쪽으로 10미터… 이런 내용으로 위치를 알렸소. 봐도 이해하기 힘들어 대충 보고 넘겨 줬던 걸로 기억하오.”

보통 지도라고 하면 정확한 위치를 표시하는 게 태반일 텐데 어째서 그런 애매한 방식으로 위치를 알려준 거지? 더구나 가져와야 할 물건이 필요한 거면 위치를 아주 자세히 알려 줄 필요가 있지 않았나?

“의뢰 물건이 뭐였나요? 그냥 책이었나요?”

“검은색 표지에 제목이 없는 두꺼운 책인데 가죽끈으로 봉해져 있을 거라고 했소. 만약 끈을 풀어 안의 내용을 보거나 보려 했던 시도가 보이면 의뢰금은 일절 줄 수 없다고 했지. 물론 그 드루이드 팀은 책이 들어 있던 상자를 열지도 않고 아예 통째로 가져와 무사히 의뢰금을 타갔소.”

가죽끈으로 봉해진 책이라….

“책을 가져오라고 했던가? 무슨 책이라고 했더라? 열어 보지 말라고 했던 거 같은데.”

“맞아요. 만약 책을 열어본 흔적이 보이면 의뢰금을 한 푼도 안 준다길래 그냥 상자째로 들고 갔어요. 괜히 트집 잡히기 싫었거든요.”

“일기장처럼 남에게 보이기 싫은 책이구나 싶었는디….”

“그런데 그런 방식의 의뢰는 생각보다 흔해서 저희도 별 생각 없었어요.”

그동안 숱하게 의뢰를 처리해 온 이리스 파티 입장에서 해당 의뢰는 너무 단순해서 오히려 기억에 잘 남지 않은 듯했다. 상자째로 옮긴 탓에 책의 외형도 제대로 확인 못했고. 그들이 의뢰를 진행할 때마다 기록으로 남기는 일지에도 겨우 몇 줄 남아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난 이 단순한 의뢰에서 묘하게 수상한 느낌을 받았다.

“혹시 원 의뢰주에 대해서도 여쭤 볼 수 있을까요? 들어본 바론 큰 전투를 치를 필요도 없어서 직접 가서 가져와도 될 것 같은데… 굳이 중개인을 두면서까지 의뢰를 맡긴 게 궁금하네요.”

“공개적으로 의뢰를 낼 때 신분이 드러나길 원하지 않는 자들이 주로 하는 방법이긴 하오. 나처럼 외진 곳에서 살거나 특별할 것 없는 중개인을 두곤 하지. 어쩌면 그 자도 죄를 짓고 테라리움에 수배령이 내려진 범법자이거나 세금 과다 미납으로 도망자 신세였던 건 아닌가 싶소. 이 주변엔 그런 자들이 특히나 많지.”

“인상착의는요?”

“얼굴을 가리는 검은 로브를 써서 나도 잘 모르오. 다만 목소리로 추정해 보면 남자였던 것 같소.”

대화로 얻은 큰 소득은 없었다. 주인장은 성심성의껏 그날 일을 기억나는 대로 이야기해 주었고 딱히 무언가 더 숨기는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어쩌면 이리스 파티가 이곳까지 오게 된 연유인 의뢰가 단서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시간 낭비만 한 것 같다. 물론 의뢰에 특이점이 있었다면 이리스가 먼저 말해 줬겠지.

“하… 이제 어떡하지?”

역시 던전은 던전이구나 싶었다. 본래 던전이란 사람들이 찾기 힘든 곳에서 우연찮게 입구를 발견했다가 진입하는 것이 보편적이잖아?

“제희, 전 당신의 감을 믿어요.”

메스키트가 상심한 날 달래며 말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방향조차 짐작할 수 없는 걸. 길을 잃어야 하는데 잘 잃어야 신전형 던전을 발견하지 그냥 무턱 대고 잃을 순 없잖아? 이리스 파티는 항상 지도를 가지고 다녔고 숙련된 모험가라 칠흑 같은 밤에도 지도를 통해 위치를 찾을 수 있어. 더구나 그 파티엔 소나무 드라이어드도 있잖아? 소나무가 나고 자란 자리라면 땅의 과거 기억을 읽어 낼 수 있는 드라이어드가 있는데 어떻게 그리 쉽게 길을 잃….”

그러게? 어째서 그들은 그렇게 쉽게 길을 잃은 거지?

“그런데 솔직히 이제 와서 생각해보자면 70번대 테라리움 근처가 아니었을지도 몰라요. 그저 저희가 겨우 길을 찾아내 제일 처음 발견한 테라리움이 79번째 테라리움이었기 때문에….”

테라리움의 위치는 불변이다. 테라리움의 위치에 뚜렷한 규칙성이 없다곤 하나 곳곳에 빼곡히 가지를 내뻗은 세계수의 의지는 세상에 세계수의 축복이 닿지 않는 곳이 없게 하라는 뜻과 일맥상통했다.

즉 과하게 축복이 닿지 않는 빈자리가 생기지 않도록 가지가 차곡차곡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이다. 그러니 규칙성이 없다 하더라도 그 자리에 있어야 할 테라리움이 소멸하지 않는 이상 여행자들은 앞만 보고 걸어도 결국 특정 테라리움에 닿을 수 있는 구조였다.

이리스 파티의 ‘길을 잃었다’가 가진 의미는 아주 오랜 시간동안 테라리움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헤매고 다닌 느낌이었지. 그건 어쩌면….

“혹시 이리스 파티가 상태 이상에 걸렸던 걸까? 혼란이나 최면 같은…. 멀쩡한 정신이었다면 그토록 길을 헤맸을 이유는 아무리 봐도 없는 것 같아. 그러니 그들이 바른 길을 찾을 수 없는 상태였다는 점이 타당한 것 같긴 한데.”

앞만 보고 걸어도 테라리움이 나온다. 어쩌면 계속해서 같은 자리를 빙빙 돌거나 테라리움을 우회하는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생각해 봤는데 위치를 지정하는 방법도 보통의 경우와 다른 느낌이야.”

내내 묵묵히 생각에 빠져 있던 엘더가 툭 끼어들었다.

“인간들은 보통 장소를 지정할 때 테라리움이 기준이 되잖아? 그게 훨씬 편하고.”

엘더의 말이 맞았다. 우린 특정 장소를 지칭할 때 몇 번째 테라리움 근처라든가 테라리움과 테라리움의 사이 지점 등을 주로 이용했었다. 이 역시 테라리움이 세계수 축복의 균형을 유지하며 빼곡히 위치한 덕에 가능한 방법이었다.

“그런데 이 지역처럼 불에 의해 지형이 변할 위험이 큰 곳에서 굳이 테라리움을 기준점으로 삼지 않을 게 이상하지 않아?”

불의 성향은 파괴적이다. 지나간 자리의 모든 것을 태우며 거대한 불은 지형의 높낮이도 바꿀 만큼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또한 불에 의해 간접적으로도 생태계가 변화될 수 있었다.

지도에 정확한 위치를 표시하지도 않으면서 테라리움을 기준으로 이동 지점을 정해 주지도 않았다라….

“그래서 말인데 어쩌면 기준점이 되는 테라리움을 숨겨야 하거나… 그 장소 자체가 테라리움이었던 아닐까?”

엘더의 추론에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큰 바위를 기점으로 동쪽으로 가라든가 그곳에서 다시 남쪽으로 가라는 모든 지시는 어쩌면 방향 감각을 상실하여 근방의 정확한 테라리움을 추정하지 못하도록 한 걸 수도 있다.

이곳은 게임처럼 지도상에 내 위치가 표시되는 네비게이션 시스템이 없다 보니 일일이 지도를 들여다보며 위치를 확인해야 했다.

의뢰를 끝내기 위해 농장으로 되돌아올 땐 지시를 뒤로 반복하면 되니 지도상에서 현재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하더라도 큰 문제는 없었을 테고.

어쩌면 이리스 파티는 그 의문의 장소에서 자신들도 깨닫지 못하는 무슨 일을 당했고 덕분에 혼란이 생겨 길을 잃은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즉 나도 그 의문의 장소를 찾게 된다면 같은 혼란이 걸려 길을 잃고 신전형 던전에 접근할 수 있게 되는 건 아닐까?

“테라리움을 숨긴다라… 그건 말처럼 쉽지 않을 텐데. 사람 사는 마을이니 근방에 인적이 남게 돼. 예를 들면 표지판이라든가….”

나무 표지판을 쓸 수 없으니 커다란 바위에 어느 방향으로 더 가면 몇 번째 테라리움이 나온다는 표식을 새기곤 한다.

“테라리움에 입주할 다이아가 없는 자들이 테라리움 근처에 부락을 형성하기도 하고….”

가막살나무 군락지에서 봤던 마을처럼 보호를 받을 군락지가 없다면 조금이라도 세계수 축복에 가까워지고자 근처에 마을을 만들기도 한다고 들었다.

“사람들이 오가니 닦인 길도 있겠지. 하여튼 그런 인적들 때문에 아무리 길을 빙빙 꼬아도 결국 근방에 무슨 테라리움이 있을 거란 힌트를 얻을 수 있게 돼. 그런데 이걸 잘 숨겼다는 뜻은….”

어쩌면 지도상에서 소멸된 테라리움들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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