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스의 기억에 의존하여 제작된 지도는 상당히 명확하지 못했다. 어차피 길을 잃어서 어쩌다 발견한 거라고 했으니 나도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다만 난 이리스 파티가 겪었던 일들을 그대로 답습하며 나 역시 그 우연을 맞이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이쯤에서 의뢰자에게 보수를 받았다고 했는데.”
난 현재 있는 지점까진 비교적 정확하게 표시된 지도를 펼쳐 보며 궁리했다.
이번 여행은 나 혼자였다. 아득바득 따라오겠다는 인원이 좀 있었지만 때마침 로웰라가 꺼낸 이야기로 해결되었다.
“요즘 누가 자꾸 지켜보는 기분이야. 무척 수상하고 불길한 느낌이 들어.”
길드전이 끝난 이후부터 자신이 정체불명의 누군가에게 스토킹을 당하고 있다고 털어놓은 것이다. 이미 그전에도 날 노리는 무리가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우린 어쩌면 로웰라가 당하는 스토킹이 그 연장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로웰라는 내 흉내를 아주 잘 냈고 길드전에서도 시선을 분산시켜 상당수에게 혼란을 선사하는 역할을 했었다.
어쩌면 날 노리는 자들이 아직까지 로웰라를 나라고 생각하고 주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참 기묘한 일이었다. 대체 무슨 원한 관계가 있길래 날 그렇게 쫓아다니는 걸까?
“그래서 말인데 계속 이곳에 머무르는 건 좋지 않은 선택 같아. 60번째 테라리움은 현재 막 굴러가기 시작해서 어수선하고 제대로 보안이 갖춰지지 않았잖아. 28번째 테라리움이나 16번째 테라리움으로 옮길까 싶어.”
로웰라는 60번째 테라리움을 떠나야겠다고 말했다.
“난 찬성해. 그렇지 않아도 1번째 테라리움에서 주시하고 있는 상황에 이전처럼 그녀가 네 역할을 대신해 준다면 시선이 분산되겠지.”
길드 회의에 툭 끼어든 불청객과 다름없는 파필리온이 의견을 펼쳤다. 그는 로웰라가 계속해서 내 역할을 대신해 줘야 한다고 보고 있었다.
“하지만 로웰라를 계속 내 꼭두각시로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아. 길드전의 상황은 작전의 한 형태였지만 그녀 역시 드루이드니 모험도 하고 숙련도 해야지. 이래선 테라리움을 옮겨 다니며 숨어 지낼 수밖에 없잖아. 이참에 음침하게 숨어서 날 노리는 녀석들을 잡아들여야겠어.”
처음엔 어쩌면 그 녀석들이 아스키아 길드와 관련이 있는 건 아닌가 싶었다. 로웰라를 나로 착각할 만한 건 변장한 모습의 그녀를 처음으로 만났던 아스키아 길드가 유력했으니까.
하지만 길드전이 패배로 끝났고 아스키아는 내부 일로 바빠서 아예 우리 쪽에 신경도 쓰지 못할 상황이 됐다. 조금이라도 여유가 생길 때쯤이면 우리 쪽에서 쉴 새 없이 일거리를 던져 주고 있기 때문에 복수를 하려면 길드를 해체하지 않고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아스키아 길드와 관련 없이 독단적으로 움직이는 조직일 수도 있다는 건데.
인페르노는 애쉬가 인내심을 잃지 않는 한 헛짓거리는 할 수 없다. 그렇다면 대체…?
“우리에게 맡겨요. 아예 함정을 파 놓고 기다린 후 일망타진을 노려야겠네요.”
이리스가 비장한 말투로 말했다. 그러면서 날 따라가겠다고 막무가내로 우기던 시들링의 어깨를 붙잡았다.
“가긴 어딜 가? 당신이 할 역할은 따로 있어. 로웰라가 정말 제희 님처럼 보이게 곁에 붙어 있어야지. 저번에도 그런 방식이 잘 먹혀들었던 거 잊었어? 적은 아무래도 제희 님과 당신이 함께 여행 다니던 시절을 기억하고 있는 게 분명해. 그러니 여기 남아.”
“난 그런 하찮은 일에 어울리고 싶지 않다.”
그 말에 이리스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정말 이게 하찮은 일이라고 생각해? 로웰라가 노려지고 있지만 본래 목적은 제희 님이란 걸 잊었어? 로웰라의 정체가 들키면 타깃이 어디로 바뀔 거라 생각해? 대체 무슨 원한이 있는 건지 지금까지 끈질기게 제희 님을 쫓는 걸 보면 집착이 얼마나 대단한지 느껴지지 않아? 내버려 두면 제희 님의 여행을 사사건건 방해할 수도 있어. 이번 일은 아예 후환을 제거하기 위한 아주 중요한 일이야.”
결국 나를 제외한 모든 길드원들은 60번째 테라리움에 남으며 나 혼자 여행길에 오르게 된 것이다. 무슨 일이 생기거나 스텔라가 깨어난다면 벌을 통해 메시지를 보내기로 했는데 아직 조용한 걸 보면 별다른 수확이 없나 보다.
“제희 님, 저쪽에 농장이 있어요.”
높은 곳에서 폴짝 뛰어내린 데이지가 한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고지대에서 미리 살펴볼 수 있도록 정찰을 하고 온 참이었다.
“응, 수고했어. 농장주에게 의뢰 보상을 받았다고 했으니 가서 이리스 파티에 대해 기억하느냐고 물어보자.”
길을 잃다 70번대 테라리움이 있는 곳까지 가게 되었다고 했으니 아마 시작은 60번대와 70번대를 잇는 그 중간 지점 어딘가일 테다.
60번대 테라리움 중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곳으로 판명되어 지도상 ‘X’ 표시가 된 곳이 두 곳이나 있었다. 바로 그곳의 행정 관리원인 테리쿨라를 노려 봄버가 테러를 일으켰다는 67번째 테라리움과 주민들이 모두 떠나 행정 불가 판정이 나 망해 버린 62번째 테라리움이 그러했다.
모든 테라리움에 세계수의 축복이 건재해야 균형이 이루어진다. 28번째 테라리움이 변을 당하며 축복의 균형을 잃어 26번째 테라리움까지 가뭄의 피해가 갔던 걸 떠올려 보면 이 일대는 이미 균형을 잃어 쇠퇴가 가속화되고 있다고 볼 수 있었다.
60번대가 이러한데 하물며 70번대는 얼마나 심할까? 난 ‘X’ 표가 4개나 존재하는 70번대의 지도를 들며 한숨을 쉬었다. 이곳 역시 비어 버린 테라리움 때문에 축복의 균형이 깨져 불이 심하게 활개 치고 있겠지.
막 44번째 테라리움을 방문했을 때 느꼈던 큰 충격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숫자상으론 30번대나 40번대가 큰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데 현실을 보면 앞자리 숫자가 바뀌는 것만으로도 테라리움의 경제와 실황이 급격하게 무너진다.
끝자리가 0으로 끝나는 테라리움들은 지도상에선 직전 9번째 테라리움들과 가까웠다. 즉 60번째 테라리움은 59번째 테라리움과 거의 이웃하며 61번째 테라리움과는 정반대에 위치하고 있었다.
같은 십의 자리 숫자를 공유하고 있더라도 거리로 따지면 끝자리가 0으로 끝나는 테라리움은 같은 번대로 보기 애매하다고 볼 수 있다. 세계수와 가까운 가지대로 순번이 내려지므로 세계수를 시작으로 나선형으로 떨어지는 개미굴 단면 같은 지도가 만들어진다.
그렇기에 이리스의 예전 의뢰주가 있다는 농장까지 가는 데 걸린 시간은 같은 60번대 테라리움에 위치하고 있더라도 오래 걸렸다.
지나가는 길에 전소되었다는 67번째 테라리움도 보고 지나쳤다. 그 안은 진작 불에 점령당해 외곽을 두른 울타리의 흔적이 아니었다면 테라리움이라고 알아차리지 못했을 정도였다.
난 지도를 보며 침울해하던 걸 멈추고 데이지가 찾았다는 농장으로 향했다.
불이 활개 치는 이런 곳에서 대체 무슨 농장을 경영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놀랍게도 정말 정상 가동되는 농장이 존재했다. 물론 겉은 폐가나 다름없었다. 이곳에 농장이 있다는 걸 몰랐다면 그냥 지나칠 법한 비주얼이었다.
불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농장은 땅속에 존재했다. 고지대에 위치해도 새의 형태를 띤 불이 습격하기도 하며 견고한 성벽을 쳐도 불은 넘어온다. 다만 땅속은 조금 예외였다. 이건 불의 위협을 대비하기보단 아예 땅속에 숨어 버려 불의 시선을 끌지 않는다는 전략이었다.
대부분 지상과 하늘로 다니는 불에게 들키지 않는 방법으론 최고의 선택이었다. 불은 생태계 최강자를 모방한다. 이 지역에서 지하로 다니는 것 중 불이 모방할 만한 최강의 포식자가 존재하지 않은 것이 천운이었다.
“계십니까?”
혹시나 나로 인해 발각되지 않도록 근방의 불을 정리한 후 때를 보아 농장으로 들어갔다. 주기적으로 관리하는 사람이 있는지 농장 주변은 그래도 불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누구요?”
아래로 향하는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경계가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여행자에게 적선할 다이아도 음식도 물도 없소. 또한 털어 갈 것도 없는 빈곤한 집이니 돌아가쇼.”
“뭣 좀 묻고 싶어서 왔습니다. 적선은 바라지도 않고 오히려 도와주신다면 사례하겠습니다.”
내 말에 문에서 드르륵 소리가 열리더니 작은 틈이 열렸다. 그 틈 사이로 흰자위가 노랗게 뜬 눈이 불쑥 나타났다. 어쩐지 옅은 술 냄새가 느껴졌다.
“혹시 시간이 되실까요?”
질문에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그저 경계를 가득 담은 눈빛으로 날 쏘아볼 뿐이었다.
“아, 여기 제 마음입니다.”
나는 뒤늦게 그자가 뭘 원하는지 깨닫고 주머니에서 다이아를 꺼내 틈으로 건넸다.
“마음이 제법 크군.”
썩 만족스러운 목소리와 함께 철컹철컹 문의 잠금 장치를 푸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활짝 열리자 그동안 미미하게 맡아지던 술 냄새가 확 끼쳐 왔다.
“들어오슈. 올 거면 빨리 오는 게 좋을 거요.”
제법 말끔한 차림의 중년이 불빛이 희미한 랜턴을 든 채 주변을 휙휙 둘러보며 속사포로 말했다. 나까지 다 다급해지는 기분이 들어 황급히 계단을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등 뒤로 재빠르게 문을 닫고 걸쇠를 거는 소리가 들려왔다.
“농장이라곤 들었는데 뭐 하는 농장인가요?”
“농장은 관둔 지 오래됐지. 이곳은 양조장이요.”
“양조장이라면… 술을 만드는 곳인가요?”
“그렇지. 최하급 곡식이나 썩은 과일을 헐값에 사들여 싸구려 술이나 빚는 곳이요. 주변 기온이 높아 발효 하난 기막히게 잘되거든.”
안으로 깊숙이 들어갈수록 코끝을 찌르는 술 냄새가 심해졌다. 한참을 걷다 삐걱거리는 테이블로 안내를 받았다.
“말했듯이 당장 우리 가족도 먹고살기 빠듯해서 마땅히 대접할 건 없소.”
“전 괜찮아요. 제가 흔쾌히 초대해 주신 데에 감사를 전하며 마련해 드리면 되죠.”
의자는 곧 쓰러질 것처럼 흔들렸고 식탁엔 알 수 없는 얼룩이 가득했다. 난 그 위에 주머니에서 꺼낸 비상식량이며 비스킷 등을 꺼내 올렸다. 항상 인벤토리 꽉 차도록 아이템을 들고 다니는 덕에 이 정도 내놓는 건 여행에 전혀 무리가 가지 않았다.
식탁 위에 깔린 음식들을 보며 남자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래서 뭘 묻고 싶어서 이렇게 친절한 거요? 만약 불법적인 일이라거나 좋지 않은 일에 연루될 수 있다면 한마디도 하지 않을 거요.”
그는 포장도 벗기지 않은 비스킷을 한 아름 집어 주머니 속으로 챙겨 넣으며 약간은 위협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별건 아니고… 혹시 오래전 의뢰를 맡겼던 드루이드들을 기억하시나요? 여자 하나에 남자 셋으로 이루어진 팀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