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8화 (448/604)

미미르의 가족들 이후 파필리온의 연락으로 방문했던 온건파 베스탈리스들도 아티팩트와 난쟁이를 얻어 갔다. 그들의 영혼을 치유하고 아티팩트를 부여하기 전 사전 설명을 통해 의사를 물었는데 거절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잉켄은 돌아가기 전 내게 이렇게 말했었다.

“이후 방문할 베스탈리스 중엔 이런 변화를 거부하는 자들이 있을 수도 있으니 부디 이해 바랍니다. 다들 사회에서 조용히 살아가는 대가로 1번째 테라리움의 감시와 압박을 견뎌야 했으니 말입니다. 행동 하나하나가 불안할 테고 암울한 미래를 떠올릴 겁니다. 저 역시도 오늘 일의 여파로 제 가족들을 향해 1번째 테라리움에서 필요 이상의 간섭이 있을까 두렵지만 저리 좋아하는 걸 보니 괜히 다른 말을 할 순 없겠군요.”

에트나와 포르낙스는 곧바로 새로운 변화를 즐겼지만 이후 방문할 다른 베스탈리스들은 거부할 수도 있다고 했다. 베스탈리스의 새로운 힘인 정화의 힘을 개방하는 것도, 달라진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난쟁이와 아티팩트를 받아들이는 것도 전부.

더구나 손목에 착용하는 돔 형태의 팔찌는 한번 착용하고 나면 벗을 수도 없을 뿐더러 가리기에도 마땅하지 않았기에 어딜 가나 눈에 띌 것이다.

나 역시 사전에 그런 말을 들었기에 베스탈리스들을 만나 미리 설명을 했다. 하지만 우려에도 불구하고 거부하는 베스탈리스는 없었다. 그들은 모두 기꺼이 변화를 받아들였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죄인으로 낙인찍힌 세월이 너무나도 길었다.

“이제야 비로소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기분이 드는 걸요. 불에 맞서는 드루이드처럼 말이에요.”

어떤 베스탈리스는 그렇게 말했다. 비로소 평범해진 기분이라고.

내게 찾아온 베스탈리스들에게 모두 아티팩트와 난쟁이를 나눠 주었지만 세상엔 아직도 수많은 베스탈리스가 남아 있었다. 하지만 과수원도 몇십 개로 나뉘어 곳곳에 위치해 드루이드들을 받는 마당에 한자리에서 홀로 모든 베스탈리스들을 감당해 낼 순 없었다.

“조치가 필요한데….”

테라리움 몇 개를 섭외하여 특수 시설을 만든다는 발상은 너무나 위험했다. 난쟁이 아티팩트가 세계수의 산물이 아니기 때문에 신성 모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르는 이들이 보기엔 드루이드도 아니면서 테라리움 아티팩트를 흉내 내는 물건을 들고 다니고 있지 않은가?

더구나 이곳이 상당히 뒤 번대에 속하는 60번째 테라리움이기에 베스탈리스들이 큰 무리 없이 방문했던 걸 보면 앞 번대 진출은 거의 불가하다고 봐야 했다. 앞 번대 테라리움으로 갈수록 보는 눈이 많았다.

“어떻게 해야 할까…. 난 계속 60번째 테라리움에 머물 순 없는데.”

“시작부터 너무 완벽하게 다 해내려고 하지 마. 네게 새로운 아티팩트를 얻어 간 베스탈리스들이 어떤 행보를 보일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지켜본 후에 생각하는 건 어때?”

베스탈리스들에게 아티팩트를 나눠 주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파필리온이 말했다.

“세상의 시선이 그들이 불을 해치우고 다닌다는 결과에 집중한다면 일이 쉽게 풀릴 수도 있고, 네 걱정처럼 신성 모독으로 받아들여진다면 아예 테라리움 바깥에 특수 시설을 마련하는 것도 좋겠지. 꼭 시설이 테라리움 안에 있을 필요는 없잖아?”

하긴 모든 일을 테라리움 중심으로 할 필요는 없다.

“혹시라도 소문 듣고 찾아오는 베스탈리스가 있다면 내가 맡을게. 베스탈리스들을 맡느라 바빠서 정신이 없는 것처럼 보여도 계속 불안해했잖아. 길드전이 끝나면 본래 하려고 했던 일을 하러 가.”

“너 16번째 테라리움으로 언제 돌아가려고?”

“내조해야지.”

천연덕스럽게 내조를 입에 담는 그를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이게 어디서 몇 년 된 부부 같은 자연스러움을 내뿜고 있어?

“새로운 아티팩트에 대한 정보는 이게 다야? 아티팩트에 무슨 이름을 붙일 거야?”

파필리온은 만일을 위해 만들어 둔 매뉴얼을 보며 흥미로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는 처음 난쟁이 아티팩트를 접했을 때 상당히 부러워했었다. 이번만큼 베스탈리스가 아니란 사실이 안타까울 수가 없다며.

“그렇다면 나의 신은 세계수가 아니라 너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게 되잖아. 드루이드는 아티팩트 바꿀 수 없나? 두 개 동시에 착용한다거나….”

이미 가질 거 다 가진 놈이 욕심 한번 거나하게 큰 발언이었지만.

“이름? 글쎄…. 굳이 붙여야 하나?”

나는 따로 난쟁이 아티팩트라고 부르고 있었지만 다른 이들에게 난쟁이는 아직 정령이란 인식이 더 강했다. 그래서 난쟁이보다는 정령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한마디로 용어 정립이 덜 됐다는 거다.

“아티팩트라고 하면 다들 테라리움 아티팩트를 떠올릴 테니까.”

테라리움 아티팩트는 그 안을 드라이어드들이 자신들의 영역에 모체를 피우고 가구도 놓고 꾸미는, 일명 마이 룸으로 쓸 수 있는 특징도 있으니 테라리움이라는 말이 제법 잘 어울렸다. 물론 그런 특성이 있어서 테라리움이란 이름이 붙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난쟁이 아티팩트 안에 존재하는 건 <무한 다이아>의 축소판이었다. 광산과 창고, 수레 등등…. <무한 다이아>의 배경을 가져갔지만 다이아는 생산하지 않는 곳. 하지만 광산 아티팩트라기엔 조금 이상하고. 아무리 생각해도 난쟁이가 가장 큰 특징이란 말이지.

“드워프 아티팩트…?”

난쟁이를 드워프라고 부르기도 하니까 좀 멋들어지게 부른다면 이쪽이 낫지 않을까?

“새로운 테라리움은 아무래도 작은 정령들이 핵심이니 드워프 아티팩트도 괜찮을 것 같은데 어때?”

“괜찮네. 그럼 앞으로 그렇게 설명할게. 네가 창조자이니 네 마음대로 하면 되지.”

그렇게 베스탈리스를 위한 새로운 아티팩트는 드워프 아티팩트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

***

드디어 언제라도 떠날 수 있도록 모든 인수인계를 끝낸 날, 이리스 파티를 비롯한 길드원들을 불렀다. 그동안 드라이어드들에게만 상황 설명에 치중하느라 뒷전이 됐지만 모두들 잘 기다려주었다.

길드원들에게 내게 일어난 변화를 이해 가능한 범주에서 설명한 후 차분히 반응을 기다렸다.

“신이라뇨…. 마스터, 대체 어디까지 가시려는 겁니까? 가만, 그럼 이제 우리 길드는 신의 길드 아냐?”

다들 놀란 마음을 갈무리하며 할 말을 고르는 정적 속에서 제퍼가 호들갑을 떨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퍼는 길드 쪽에 관심이 더 큰 듯하다.

“그럼 이제 제희 님… 이라고 부르면 되는 건가요? 길드전 때 그런 명칭을 암호로 사용했던 게 다 이유가 있었네요. 솔직히 이야기해 주신 것들이 단번에 이해하기엔 너무 허황되게 느껴지지만 제희 님과 함께한 나날들이 항상 비범했으니까 뭐….”

이야기를 들은 이리스가 그 이후 조금은 나를 어려워하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금방 원래대로 돌아올 것 같았다. 그녀의 친화력은 상당했으니까.

“차라리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않았나?”

그리고 시들링의 반응은 조금 의외였다. 그는 내 몇몇 드라이어드처럼 원래 세계에 남는 것이 옳은 선택이라 말하고 있었다.

“이곳은 네게 위협이 되는 존재가 가득하다. 원래 세계에서 평범하게 살 수 있다면 차라리 그러는 게 나았다고 본다. 아무리 네가 초월적인 힘을 얻었다 하더라도 그날처럼 큰일을 당하지 않을 거라 볼 수 있는가?”

그가 염두하고 있던 큰일은… 내 몸을 빌린 세계수가 폭주를 일으켰을 때, 무방비 상태로 스텔라의 화염을 뒤집어쓴 일을 말했다.

다들 눈치껏 그날의 일을 입에 담지 않았지만… 불길 속에 갇혀 산 채로 타들어 가던 순간은 내 주변의 많은 이들에게 트라우마를 심을 만큼 끔찍한 일이었다.

아마 실새삼이 곁에 없었더라면, 그가 사방에 흩어진 내 영혼 조각을 붙잡아 바곳과 연결시켜 주지 않았더라면… 지금 이 자리에 나는 없었겠지.

확실히 당사자이기에 시들링처럼 계속 마음 써야 했던 큰일은 맞았지만 그게 두려웠다면 정말 테라리움 어드벤처로 돌아오지 않았을 거다.

“그건 내 방심의 결과라고 생각해.”

내게 잔존하고 있던 부정적인 감정들이 한 번에 터져서 만든 배드 엔딩이었다고 본다. 마거리트를 잃으며 얻게 된 불안과 초조는 나를 신중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카수스의 부활은 계속해서 극단적으로 날 몰고 가며 정신력을 떨어뜨렸고 스텔라와 마주하며 그 엄청난 힘에 자존감이 하락했다. 게다가 여태까지 안일하게 세계수를 믿었던 결과 의존증과 방심을 얻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 자신을 잘 붙들었어야만 했다. 나를 가장 잘 보호할 수 있는 건 나인데 그러지 못했던 것이다.

“한 번 겪었는데 다음에 또 겪으면 바보지. 그 일은 내게도 전환점이 됐어. 이제 그럴 일은 없을 거야. 그리고 이곳에 내가 해야 할, 나만이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은걸. 그걸 알고도 모른 척하면서 이전처럼 평범하게 지낼 수는 없었을 거야.”

나처럼 극복한 사람이 있는 반면, 시들링처럼 기회가 된다면 다시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라며 확고한 의견을 갖게 된 사람도 있었다.

물론 그날 불 속에서 내가 죽었을 거라 생각했으니 세상 모두를 적으로 보는 그의 마음도 이해가 가긴 하지만…. 결국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선 안전한 테라리움 안에서만 생활하는 방법밖에 없는데 그건 나와 맞지 않았다.

“오늘 이 자리에 이리스를 비롯한 네 분을 부른 건 이런 근황을 이야기하려고 했던 것도 있지만 물어볼 게 있기 때문이에요. 혹시 전에 메스키트를 처음 만났을 때 여러분들이 하셨던 이야기 기억나세요?”

“메스키트를 처음 만났을 때?”

“네, 어디서 본 적 있는 드라이어드라고 하셨잖아요.”

“아!”

이리스가 드디어 기억났다는 듯이 손뼉을 짝 치며 소리쳤다.

“신전형 던전 입구 앞에서 10개의 드라이어드 조각상을 봤던 걸 말씀하시는 거죠?”

“네, 아무래도 거길 다녀와야 할 것 같아서요. 그때 길을 잘못 들어서 70번대 테라리움까지 내려가셨다고 하셨죠?”

막 이야기를 들었을 당시의 나에겐 70번대 테라리움은 아주 까마득한 숫자였다. 메스키트 조각상이 있다기에 가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때의 내 레벨로 갈 수 있었던 최대치의 테라리움은 고작 30번대 테라리움이었으니까.

“또한 던전 입구가 강하게 봉인되어 있어서 안은 들어가 보지도 못했다고 하셨고요.”

“네, 저희가 들어가는 건 허락하지 않는 듯한 인상을 받았죠. 어떤 곳인지 열심히 조사해 봤지만 헛수고였고요.”

마치 그곳에 있던 10개의 조각상의 수가 자생 필드의 분류 수와 똑같아 필드의 가디언들을 조각해 놓은 거라 여겼다고 했지. 중간에 가디언이란 정체를 들키고 싶지 않았던 메스키트가 말을 막는 바람에 이야기가 거기서 끊겼었다.

“하지만 저희도 그땐 길을 잃고 헤매던 도중 어쩌다 발견한 거라 다시 찾아가려 하면 못 찾을 거예요.”

“그래도 최대한 기억나는 데까지 지도를 체크해 주실 수 있을까요?”

난 세상의 비밀을 전부 풀겠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포인세티아가 바쁘게 카수스를 추적하고 있지만 정확한 위치를 찾지 못했고 당분간 인페르노도 조용할 테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는다면 어쩌면 큰 비밀을 간직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그 신전형 던전에 방문하는 것뿐이었다.

가디언들끼리도 정체가 밝혀지지 않는 한 서로에 대해 발언할 수 없는 묵약의 규율이 있기 때문에 어쩌면 그 신전형 던전이 10그루의 가디언들을 모두 알아낼 수 있는 기회가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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