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1화 (441/604)

아스키아 길드가 승패에 대해 반발할 거라 생각했지만 그 생각은 정확히 반만 맞았다. 역시 그들의 입장에선 우리 길드가 어부지리로 승리를 가져간 걸로 보였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나서서 재결투를 청한다거나 항의를 하진 않았다. 아니 못 했다. 그들은 내외로 입은 피해 수복으로 모든 길드 운영이 마비가 되는 바람에 길드전 결과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길드전에 우리보다 훨씬 많은 인력을 끌고 왔기에 스텔라의 폭주로 입은 전력 피해가 상당했다. 듣기론 소속 길드원의 반 이상이 치료를 받고 있어 당분간 길드 의뢰를 굴리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고 한다.

그들의 운영 회복이 더딘 데에는 외부적 요소도 많이 있었다. 상당수의 협찬과 후원 줄이 끊기고 자체적으로 자금 벌이를 해 보려 해도 자리를 비운 3일간 경쟁 길드가 뛰어들어 시장을 전부 망쳐 놓은 것이다.

더구나 소형 길드를 상대로 길드전까지 진 마당에 이미지도 떨어져 직접적으로 의뢰를 맡기는 경우도 훅 줄어들었다.

돈벌이가 안 되는 와중에 길드전으로 인한 피해 수복으로 돈이 줄줄 새어 나가는 상황이니 그들은 급기야 길드 문을 걸어 잠그고 당분간 길드 복구에 치중하겠다고 선언했다.

손에 꼽혔던 대형 길드가 쟁쟁한 길드들을 모아 놓은 순위에서 단박에 미끄러지고 장기 회생 불가 상태가 된 것에 대해 많은 이들이 놀라워했다. 아스키아 길드는 씹고 뜯을 좋은 안줏거리가 되어 주었다.

반면 가이아 길드는…. 아스키아 길드에 비하면 아주 긍정적으로 매우 바쁜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매스컴을 탄다는 게 이렇게 무서운 일일 줄이야. 대형 길드나 받는 협찬과 후원 문의가 끊임없이 들어와 우리는 전투원을 제외한 사무원 자리를 마련해야 할 정도였다. 더구나 인페르노의 등장으로 1번째 테라리움의 대면 요청까지.

안으론 갑자기 모습이 바뀐 나에 대해서 그리고 스텔라에 대해서 물어보고 싶어 죽겠지만 바빠 보여서 참고 있는 길드원들로 난리였다.

난 한동안 잡무들까지 처리하려 애쓰다 깔끔하게 포기하고 일을 전부 배분했다. 당장은 주의를 쏟고 싶은 일들이 있으니 우선순위를 달리할 생각이었다.

폐쇄적인 길드 환경을 반개방 형식으로 바꾸어 아스키아 길드처럼 길드 가입 신청을 추천제로 받고 운영을 도와줄 부서를 나눴다.

60번째 테라리움도 전쟁터로 사용할 계획으로 사들였지만 그대로 내버려 둘 순 없는 노릇이라 적절한 운영 계획이 필요했다. 이 경우 후원 문의를 보낸 사업체와 16번째와 28번째 테라리움에서 근무 중인 직원들을 대상으로 지원 신청을 받았다.

60번째 테라리움이 내건 슬로건은 기회의 땅. 하고 싶은 걸 전부 해 볼 수 있는 미지의 테라리움이었으며 비용은 물론 내 지갑에서 나갔기에 예상보다 많은 지원자가 몰렸다.

뒤 번대 테라리움이라 하더라도 길드전과 인페르노의 습격을 견뎌 내는 모습을 보이며 방비가 출중하단 인식이 생겼는지 편견이 많이 희석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둘 업무를 내 손에서 떠나보내니 비로소 모험가 제희로서 밀어 뒀던 퀘스트들을 살필 여력이 되었다.

먼저 대나무 숲을 이용한 방송 시스템. 최소 세 시간의 텀으로 길드전을 생중계했던 그 시스템에 문제가 생겼다. 애쉬의 등장 직전에 교묘하게 송출이 끊긴 걸로 확인됐는데 조사해 보니 누군가가 60번째 테라리움 근처에 설치해 뒀던 대나무 숲을 완전히 망가뜨려 놨다.

방송을 타면 애매한 장면이 끊긴 것은 이득이었지만 그 짓을 벌인 자가 문제였다. 사건의 주동자는 이미 자리를 떠난 후였지만 그곳에서 새하얀 마거리트 꽃 한 송이를 발견했다. 그걸 보고 단번에 그 자리에 누가 있었는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포인세티아.”

내 부름에 사무실 한구석에 장식된 포인세티아 꽃에서 드라이어드가 뿅 튀어나왔다. 포인세티아는 길드전의 주요 전력으로 이용하기보단 그동안 카수스의 추적을 맡겨 놨었다.

곳곳에 그녀가 새로 분신을 만들 수 있도록 포인세티아 네트워크 망을 구축하고 이를 이용해 카수스에 대한 정보들을 수집하는 데 바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단서 하나 없이 비밀에 휩싸인 드루이드를 찾아야 하기에 애를 먹었는데.

“이렇게 자기를 잡아가라고 단서를 흘릴 줄이야.”

난 시들시들해진 마거리트 꽃을 한없이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제이와 내가 완전히 분리되며 기존엔 전혀 상상하지도 못했던 길을 걷게 되었다.

따지고 보면 내 아바타인 제이는 베드 엔딩을 맞이한 것과 다름없었다. 그러니 마거리트가 울면서 내게 말했던 두 개의 예언에 대해 하나는 깨진 거나 마찬가지. 이제는 그녀가 다시 돌아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거리트가 본 예언은 제이에 대한 예언일 테니 현재 제희인 나와는 완전히 다르지 않을까? 그녀가 추구하는 진리는 유명무실해진 것이 아닌가?

하지만 현장에 덩그러니 남겨져 있는 한 송이의 마거리트 꽃이 돌아오지 않겠다는 그녀의 의지처럼 느껴졌다. 그렇다는 건….

예언이 아직 진행 중이다?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 가장 소중한 존재가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

마거리트는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어째서 돌아오지 않는 걸까?

“카수스가 근방까지 온 게 확실해. 수색 범위를 좁히는 게 좋겠어.”

“응, 내가 반드시 그자를 찾아낼게.”

그렇게 말한 포인세티아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눈빛으로 한참을 날 보다가 이내 한숨을 쉬며 사라졌다.

현재 나의 모든 드라이어드들이 전부 이 상태였다. 묻고 싶은 말이 많지만 내가 먼저 해 주길 기다리며 비 맞은 강아지 같은 눈으로 날 보는 상태. 아직은… 조금만 더 기다려 줘.

“실새삼, 기억은 얼마나 돌아왔어?”

실새삼의 전 주인은 세계를 멸망시켰던 드루이드, 달리 말하자면 과거 세계수와 가장 가까웠으며 세상의 비밀에 가장 근접했던 존재라 볼 수 있었다.

모든 가디언 드라이어드를 모았다는 건 이제 셋을 모은 나보다 몇 배는 더 오래 모험을 했으며 그만큼 많은 정보를 습득했다는 뜻이니까.

그러니 어쩌면 카수스가 내가 알고자 하는 진실에 대한 하나의 열쇠가 아닐까 생각했다.

불, 세계수, 베스탈리스 등등 세월이 감추고 무지가 가리는 미지의 영역들.

이 중 카수스에 대해 가장 많은 단서를 제공해 줄 수 있는 존재는 과거 그와 함께한 실새삼뿐이었다. 그는 다시 태어나며 과거 대부분의 기억이 잠겼지만 드문드문 과거를 기억해 내는 걸로 보아 성장하면 해금되는 것이 분명했다.

실새삼은 내가 부상을 입으면 성장하는 기이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고 그동안 제이의 몸으로 숱하게 다친 결과 바곳과 비슷한 성장도를 달성했다. 그러니 어쩌면 지금쯤 상당히 많은 기억을 찾지 않았을까?

책상에 걸터앉아 있던 그가 내 물음에 애매한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전혀.”

“뭐?”

그가 가진 잠겨 있던 드라이어드 정보도 모두 해금되었고 성목이라 부르기엔 애매하지만 자랄 만큼 다 자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아온 기억이 전혀 없다고?

“거짓말은 아냐. 나 역시 네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모두 해 주고 싶지. 하지만 이상하게도 카수스와의 기억이 돌아오지 않는다. 더구나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던 일조차 점점 희미해지고 있어.”

“안 좋은 상황인 걸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동안 너에게 보여 줬던, 나조차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과거의 기억들은 모두 널 위해서였다. 널 자각시키고 위기감이 부족한 네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서였지. 어떻게 보면 과거의 기억은 온전히 널 위한 도구였으니 지금 상태의 너에겐 전혀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소각되어 가는 거라 생각해.”

난 스텔라와 정신을 연결하기 전에 극적으로 해금되었던 그의 드라이어드 정보를 떠올렸다. 그 정보들이 기존의 실새삼이 가지고 있던 정보들이 아니라 나에 의해 새롭게 개화된 정보란 느낌을 받았지.

그렇다는 건 현재의 실새삼은 완전히 나로 인해 특성이 바뀌었으니 과거의 잔재가 지워지고 있는 건 아닐까?

“하지만 카수스를 찾는 데 네 기억이 많이 도움이 될 텐데….”

“그렇다면 만일을 대비해 흩어져 가는 내 모든 기억들에 봉인을 걸어 두도록 하지. 당장 떠올리려고 하면 할 수 없지만 본래 기억이란 어떤 사물을 접했을 때나 특정 상황에 처했을 때 불시에 연관된 기억이 떠오르기도 하는 법이다. 그러니 지금 봉인해 두면 그런 상황에서라도 네가 원하는 과거 기억을 떠올려 낼 수 있을 거다.”

“그래…. 당장은 그렇게 하는 걸로 하자.”

내 드라이어드 중 가장 정신 계통에 능통한 드라이어드였으니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 주겠지.

툭툭, 생각에 집중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들고 있던 핸드폰을 책상에 일정 리듬으로 두드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세계로 돌아온 이후로 <무한 다이아>를 제대로 확인한 적이 없었다. 지금은 바곳의 감시하에 세계수 가지가 내 핸드폰에서 외장 하드로 따로 떨어져 나간 상태였다.

그동안 무한 다이아에 직접적으로 빨대를 꽂고 다이아를 빨아먹어 왔는데, 떨어진 이후에는 다이아를 어떻게 수급하고 있는 거지?

수급이 끊겼다기엔 내가 보유한 세 개의 테라리움 모두 이상 증상이 일어났다는 보고가 없었다. 세계수 가지의 축복은 다이아 수급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었다. 이상이 없다는 건 다이아가 제대로 공급되고 있다는 건데….

[주인님! 왜 이제야 오셨어요!]

“어라?”

대충 화면만 보고 넘겼던 전과 달리 자세히 살피니 <무한 다이아>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중 하나는….

[주인님! 출장 다녀오겠습니다!]

기존의 광산에 다이아를 운반하는 수레와 선로가 존재했는데, 배경에 기이한 포탈이 세 개 추가되었다. 그곳을 향해 난쟁이들이 다이아를 한가득 싣고 들어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오곤 했는데… 아무래도 그 포탈이 세계수의 가지와 연결된 듯싶다.

기이하게 확장된 다이아 공급 경로에 얼떨떨해진 것도 잠시… 그것보다 더 큰 변화가 있었으니.

[주인님! 이것 보세요!]

뿅!

갑자기 화면 밖으로 튀어나온 난쟁이에 깜짝 놀라 핸드폰을 놓칠 뻔했다. 정말로 만질 수 있는 살아 움직이는 난쟁이들이었다.

“어떻게… 이제 다이아뿐만 아니라 난쟁이들도 핸드폰 밖으로 나올 수 있는 거야?”

난쟁이들이 마치 정령처럼 폰 밖으로 빠져나와 통통 뛰어다니게 된 것이다. 더구나….

“우와, 그게 뭐예요?”

데이지가 폰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뛰어다니는 난쟁이를 향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난쟁이들은 물론 내 <무한 다이아> 화면을 볼 수 없었던 드라이어드들이 이제는 난쟁이를 인식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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