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스터 불의 부정한 기운을 흡수하고 순수 원소의 기운으로 되돌리는 힘. 평범하게 진화할 수 없어서 한정된 인원만이 불을 상대할 수 있는 세계에서 무척이나 중요한 전력이 될 수 있었다.
어째서 베스탈리스의 영혼에 몬스터 불로 추정되는 기운과 연결되는 균열이 있는지 의문이 들었지만 당장 정화의 힘이 있다는 사실을 안 것만으로도 놀라운 발견이었다.
다만 애쉬의 영혼은 난폭한 화기에 엉망진창이 된 터라 정화력이 많이 떨어진 상태였고, 물의 기운으로 화기를 눌러 균형을 잡자 그제야 제구실을 했다. 만약 애쉬 이외에 다른 베스탈리스들도 같은 상태라면 정화력에 대해 다들 모르고 있을 확률이 컸다.
난 고분고분해진 애쉬를 바라보며 갈등했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이 자를 죽여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스텔라와 달리 조금이라도 대화가 통할 인물로 보이지 않았기에 가만히 놔두면 인페르노는 더욱더 흉악한 범죄 조직으로 거듭날 거라 판단됐으니까.
누군가를 직접 죽여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이 소름 끼치고 무섭더라도 개선 의지가 보이지 않는 범죄자라면 해치우는 게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했지만, 그의 영혼을 훑으며 한 줄기 희망을 발견했다.
이제 나는 그를 죽이지도 구속할 마음도 없었다. 당장은.
균열이 역류하여 빠져나오던 화기를 도로 삼킬 정도로 물의 기운을 집어넣어 놨으니 당분간은 그가 날뛸 힘도 없을 터였다. 그래서 손을 떼자 애쉬는 완전히 진정된 상태로 축 처졌다.
“풀어 줘도 돼.”
“저자는 너무 위험해요.”
“당분간 뭘 해 볼 힘도 없을 거야. 봐.”
내 말에 드라이어드들이 못마땅하다는 의견을 냈지만 이내 풀어 주었다. 뒷덜미를 내리누르던 거대한 방패가 치워지고 무게로 압박하던 데이지도 비켜섰다. 아주 느리게 실새삼의 줄기도 풀리며 애쉬는 자유가 되었다.
예상대로 그는 곧바로 날뛰지 않고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옷에서 후드득 흙먼지와 재 가루가 떨어져 내렸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는 태도였다. 그는 마치 취한 듯한 몽롱한 표정으로 화기가 들끓지 않고 잠잠한 제 몸을 보다 나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때였다.
“저건?”
피잉.
그의 왼쪽 팔이 새까만 빛으로 반짝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손목에 빛이 응축되어 모이고 이내 낯익지만 낯선 물건으로 변했다.
“설마 아티팩트?”
둥근 돔 형태의 팔찌, 테라리움 아티팩트와 외형이 유사하나 조금 달랐다. 무엇보다도 아티팩트는 드루이드만이 가질 수 있는 물건이었기에 애쉬가 가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내게서 시선을 뗀 애쉬는 천천히 자신의 왼팔을 들어 살폈다. 그러곤 더없이 만족스럽다는 얼굴로 아주 소중하게 팔찌를 문질렀다.
“굉장한 성능이군. 이거 하나만 있으면 제어 보석 따위 몇백 개를 달아도 필요 없겠어.”
새까만 빛, 나의 기운을 품은 용도를 알 수 없는 아티팩트. 애쉬는 그 아티팩트에서 화기를 누르는 기운을 느끼고 있었다.
“저런 걸 만들어 주다니 무슨 생각이야?”
엘더가 굉장히 마음에 안 든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일부러 만든 거 아니야. 갑자기 생긴 거야.”
“그렇다면 더 문제가 아닌가? 저기서 네 영혼의 기운이 느껴지는데. 혹시 겁도 없이 영혼을 떼어 낸 건 아니겠지?”
실새삼이 거들며 역시나 마음에 안 든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말했듯이 일부러 한 건 아니지만… 좋은 구속구가 되겠어. 너!”
내 부름에 애쉬가 곧바로 날 바라봤다.
“앞으로도 계속 그 상태를 유지하고 싶으면 내 말을 따라야 할 거야.”
내 왼손에 걸린 아티팩트를 툭툭 치며 말하자…. 그가 보란 듯이 제 손목에 걸린 돔형 팔찌에 입을 맞춘다. 그 모습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 절로 욕이 튀어나왔다. 저게 무슨 짓이야?
“난 이런 것보다 널 원하는데?”
진정 상태라 잠잠한 거지 날 보는 눈에 서서히 광기가 되돌아오고 있었다.
“평생 너와 마주치지 않고 지낼 수 있어. 그러니 그걸 만들어 준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여기는 게 어때?”
“내게서 떨어지겠다고?”
광기가 돌아오는 속도가 빨라졌다.
아직까지 저 기이한 검은 아티팩트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어째서 세계수의 축복을 가시화한 테라리움 아티팩트와 같은 모양인지 알 수 없었지만 한 번 만들어 봤다면 다음에도 만들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 기운은 영구적인 게 아니니 다 떨어지면 넌 다시금 화기로 고통받겠지.”
“그러니 이딴 모조품 말고 널 갖겠다는 거잖아.”
“아니, 이 순간 이후로 널 만지는 일은 없을 거야.”
완전히 돌아온 광기가 짐승처럼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다시 날뛰려는 그를 막은 건 드라이어드들이 아닌, 아이러니하게도 기이한 검은 아티팩트였다. 그가 광기를 드러낼 조짐을 보이자 검은 아티팩트에서 빛이 났고, 그는 다시 얌전해졌다.
화기와 광기가 연관되어 있는 건가?
“하지만 그 팔찌에 기운이 떨어지면 다시 채워 줄 수 있어.”
그는 한풀 꺾인 눈으로 제 왼손을 바라봤다.
“물론 다시 채워 주기 위한 조건도 있어. 인페르노를 데리고 다시 물밑으로 돌아가. 그리고 죽은 듯이 살아. 오늘 이후로 내 귀에 인페르노에 대한 부정적 소문이 들려온다면 날 다시 만날 수 없음은 물론 기운을 채워 주는 일도 없었던 일로 하겠어.”
“인페르노를 네게 달라고 하지 않았나? 해체하라고 할 줄 알았는데?”
당연히 저 검은 아티팩트를 빌미로 인페르노를 완전히 해체시킬 수 있다면 베스트지만…. 단순히 해체했을 때의 부정적 여파가 걱정되었다.
아무 이유 없이 해체해 봤자 이름만 다른 조직이 또다시 생길 수도 있을뿐더러 조직에 소속되어 있기에 수장인 애쉬의 말을 따를 테니 통제할 머리는 남겨 두는 게 나았다. 즉 골칫거리들을 당장은 한곳에 묶어 두는 것이 나을 것이란 뜻이다.
제대로 하려면 누군가가 나서서 조직원들을 이끌며 뜻을 모아 천천히 해체시키며 후폭풍도 관리해야 하는데 난 그걸 스텔라가 해 주길 바랐었다. 애쉬는… 스텔라에 비하면 가망이 많이 없어 보였다.
“당장은 유보 상태야. 오늘은 놓아줄 테니 꺼져.”
진정 상태인 애쉬는 내 드라이어드들을 동원하면 손쉽게 붙잡을 수 있는 상태로 보였다. 지금이라도 구속해서 1번째 테라리움에 떠넘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를 진정시키기 위해선 내가 필요하고 이 관계는 모순투성이였다.
난 아직까지 외부엔 세계수의 대리자였다. 그 대리자가 베스탈리스를, 그것도 인페르노의 수장에게 우호적으로 화기를 잠재워 주는 등의 친절을 베푼 것은 이미지가 좋지 않았다.
“놓아준다라…. 하하. 그래, 당분간은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주지. 간만에 숨을 제대로 쉬게 해 줬으니까. 하지만 날 오래 기다리게 하진 않는 게 좋을 거야. 난 참을성이 없거든. 네가 날 만나지 않겠다 하더라도 널 불러낼 조건을 만든다면 넌 결국 나타나겠지. 이를테면 인질이라든가.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에서 뜻깊은 관광을 했다지?”
인질? 단번에 그가 인질 삼을 수 있는 수많은 이들의 리스트들이 내 머릿속을 스쳐 갔다. 파라다이스 테라리움까지 굳이 언급한 걸 보면 인질의 대상엔 사람, 드라이어드 가릴 것 없다는 뜻이 분명했다.
“허튼짓 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그러니 당분간이라 하지 않았나? 내 인내심이 떨어지기 전까지 원하는 대로 숨죽이고 있어 준다고.”
인페르노의 활동을 중지시키는 건 영구적인 약속이 아니란 뜻. 그의 인내심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으나 조만간 빠른 시일 내로 다시 만나야 할 것 같았다.
“정말 이대로 보내 줄 거야?”
애쉬는 아무 말 없이 날 오랫동안 바라보다가 그대로 등을 돌렸다. 그가 오른손을 들어 흔들었을 때였다. 고요했던 주변이 삽시간에 이질적인 화기들로 가득 찼다.
“순순히 물러난 걸로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지도.”
인페르노를 몇 명이나 끌고 온 거야? 그는 혼자 온 것이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 수십 명이 넘는 인페르노들이 수장의 행동을 주시하며 잠복하고 있었다.
애쉬가 내 드라이어드들에 당하고 있을 때 돕기 위해 나올 법도 한데 저 많은 숫자가 애쉬가 신호하기 전까지 기운을 숨기며 대기하고 있었다. 그의 집단에 대한 놀라운 통제력에 치가 떨릴 지경이었다.
“일단 인페르노는 됐어. 그것보다… 의료진을 불러 줘!”
난 황급히 애쉬에게 당해 쓰러진 인페르노 교단원들을 살폈다. 스텔라와 함께 온 자들은 이미 숨이 끊어진 지 오래였지만….
“숨이 붙어 있어!”
스텔라는 관통상에 많은 피를 쏟아 내고도 실낱같은 숨이 겨우 붙어 있는 상태였다. 이 정도면 기적이었다. 그녀가 상처 입은 곳을 자세히 보니 마치 불로 상처를 지진 것처럼 살이 눌어붙어 있었다.
“사태 정리에 들어가자. 길드원들을 불러 모아 줘.”
스텔라의 등장으로 흐지부지된 길드전과 이곳에 대기 중일 1번째 테라리움의 감시자들 관리, 어쩌면 외부로 송출되고 있을지도 모르는 방송들까지 전부 정리해야 했다.
길드전의 경우… 싱겁게도 우리의 승리로 돌아갔다. 난리 통에 아스키아 길드가 가져온 길드 상징이 완전히 박살 났기 때문이다. 그렇게 지반을 뒤엎고 용암을 끌어 올려 난리를 쳤음에도 60번째 테라리움의 내부는 기적적으로 무사했다. 상징물까지.
조금은 집착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헤르마와 노토스가 각각 정문과 후문의 상징들을 틈틈이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후반부를 생각해 인공 개량 드라이어드들을 이곳으로 불러오는 작전이나 기타 여러 작전들을 준비해 뒀으나 결국 이렇게 승부가 나고 말았다. 아스키아 길드가 이런 승패를 순순히 인정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룰은 룰이었다.
“제이 님!”
소식을 듣고 길드원들이 집합했다. 특히나 난전으로 빠지며 전투가 의미 없어진 상황에서 몇몇은 자체적으로 구조 및 지원 활동으로 빠져 사태 수습에 나서고 있던 터였다.
내가 제이였던 상태로 스텔라의 화염에 당했을 때 전부 달려오고 싶었을 테지만 냉정을 유지한 채 가장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활동했던 것이다.
“앞으로 더욱더 바빠지겠어….”
해결해야 될 일이 산더미였기에 절로 힘 빠진 목소리가 나왔다. 어디부터 손대야 할지 도통 감이 오지 않았지만 차분히 머릿속에 리스트를 만들며 계획표를 수립했다.
“저자는… 어쩌실 건가요?”
이리스가 넌더리가 난다는 표정으로 쓰러진 스텔라를 보며 물었다. 60번째 테라리움 안에서 대기 중이던 의료진 몇이 차출되어 다급히 응급 처치 중이었다.
“일단 제가 보호합니다.”
“1번째 테라리움으로 보내지 않고요?”
“그녀는 아직 해야 할 일이 있어요.”
마지막에 분명 스텔라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렇다는 건 적어도 합의할 여지는 있다는 거 아닐까?
“환자는 60번째 테라리움 안으로 옮겨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