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빛만으로 진저리가 날 정도로 지독한 광기는 처음 느껴 봤다. 오죽하면 속 깊은 곳에서부터 존재에 대한 거부감이 들끓을까.
날 붙잡기 위해 달려드는 애쉬는 완전히 방어를 버리는 지경까지 이르렀고 드라이어드의 공격을 가감 없이 전부 얻어맞으며 시간이 갈수록 겉은 만신창이가 됐다.
끝내 뒤에서 접근한 데이지가 그의 등을 무릎으로 찍어 누르며 완전히 땅에 처박아 움직임을 막는 데 성공했다. 메스키트의 방패가 곧바로 그의 목덜미를 내리눌렀고 실새삼의 노란 줄기가 그의 몸을 포박하고 붙들었다.
그는 온몸이 결박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고개는 꼿꼿이 들어 끈질기게 날 바라봤다. 나에게 닿기 위한 열망이 몹시 광적이었다.
중간에 엘더가 서서 손을 뻗어 나와 애쉬의 거리를 벌렸다. 그가 선 자리가 내 드라이어드들이 허락하는 최소한의 거리였다.
“어서, 내게.”
그가 입을 열 때마다 방패를 내리누르는 메스키트의 악력도 강해졌다. 애쉬의 목을 가져가겠다는 내 마음의 소리를 들은 게 아닐까 싶었다.
“하… 얼마가 됐든 전부 지불한다고? 원하는 걸 전부 다 준다고? 그런데 어쩌지. 이 세상에서 나만큼 원하는 걸 전부 가질 수 있는 사람은 또 없을 텐데.”
“크큭… 고대 베스탈리스들이 모아온 비보는 어때? 다이아로도 결코 살 수 없는 희귀한 유물들을 전부 네게 줄게. 너만 내게로 온다면….”
데이지가 체중을 실어 등을 누르는 와중에도 그는 팔을 움직이기 위해 몸부림을 쳤다.
“그래? 그럼 내가 인페르노를 달라고 한다면?”
내 물음에 일순 그의 눈에 광기가 사라지고 깊게 가라앉았다. 잠깐의 침묵이 이어지고 그는 다시금 욕망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날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널 내게 다 줘야 할 거야. 머리카락 하나 남김없이 전부.”
그의 발언에 나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인페르노의 수장이면서, 단원들이 전부 복종하는 절대 권력의 수장이면서 짧은 고민만으로 교단을 넘기겠다는 소리를 아주 쉽게 한다.
그가 검으로 내리치려 할 때 덤덤히 최후를 기다리던 교단원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들은 끔찍한 피 냄새를 풍기며 곳곳에 시체로 널브러져 있었다.
화르륵.
애쉬의 화기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거세졌다. 물의 기운으로 누른 것에 대한 반발 작용이라도 하듯 애쉬의 제어를 벗어난 불꽃이 타닥타닥 타올랐다. 그럴수록 그를 붙잡은 드라이어드들도 애를 먹기 시작했다.
시간을 끌면 완전히 힘을 회복한 애쉬가 처음 만났을 때처럼 대적하기 힘든 화마로 변질될 확률이 컸다.
날 넘기면 인페르노를 넘긴다라….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이대로 수장인 그를 구속하면 수장을 잃은 인페르노도 큰 타격을 받을 테지만…. 대체 그를 어디로 수감해? 그를 감당할 수 있는 시설이 있기는 한가?
정황상 애쉬에 맞설 수 있는 사람은 내가 유일했다. 혈육이란 구실로 그를 제어할 가능성이 있었던 스텔라는… 행동 불능 상태였다. 그렇다고 내가 24시간 내내 그의 곁에 붙어서 감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럼… 여기서 죽여야 하나? 섬뜩한 생각이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더 가까이 가지 마.”
애쉬에게 다가가려는 날 엘더가 막아섰다.
“난 괜찮아.”
살짝만 힘주어 밀었을 뿐인데 하얀 손이 맥없이 떨어진다. 어쩌면 지금 드라이어드들은 무척이나 혼란스러운 상태가 아닐까 싶었다. 그동안의 ‘제이’는 그들이 한없이 지켜 줘야만 하는 존재였다. 하지만 지금의 난 최강의 베스탈리스를 아무런 장비나 무기 없이 제압할 수 있는 존재였다.
아직까지 진정으로 신의 권능을 행하고 스스로가 초월적인 존재라고 확 와 닿지 않았지만, 적어도 게임 속 캐릭터의 한계를 벗어났다는 건 인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변화가 단 몇 분 만에 훌쩍 일어난 탓에 그들이 나를 보호하기 위해 나서야 하는 경계를 가늠하는 데 큰 혼란을 겪고 있는 것이다.
시무룩한 엘더의 볼을 몇 번 두드려 주고 안심하란 웃음을 지어 줬다.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는 애쉬의 눈은 더욱 표독스럽게 빛났다.
“지금 이 자리에서 차라리 널 죽여 버리는 게 나은 선택은 아닌가 고민하고 있어.”
그의 이마를 향해 손을 뻗자 벗어나려던 몸부림이 뚝 끊기고 고분고분해진다. 내 손에 더욱 닿기 위해 강아지처럼 머리를 비비는 모습과 좀 전의 미치광이 같던 모습 사이의 간극에 상당히 당혹스러웠다.
“더… 내게 더….”
영혼에 심어진 불씨가 끊임없이 생명력을 갉아먹는 건 대체 어떤 느낌일까? 어떤 고통이 따르는 걸까? 얼마나 고통스러우면 권력을 가진 이가 땅바닥에 엎드려 이런 꼴로 구걸할 정도인 걸까?
그에게 손을 대자 분명 좀 전에 잠재워 놨던 화기가 도로 원상 복구되어 있음을 느꼈다. 물의 기운에 저항하는 화기는 여전히 팔팔했고 마치 끝도 없이 불이 치솟는 지옥 속에 손을 넣은 기분이었다.
애쉬의 화기가 다이아였다면 그의 영혼의 상태는 내 <무한 다이아>나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그의 화기를 완전히 잠재워 무력화시킨 후, 힘이 약해진 그의 목숨을 노린다면…. 죽인다면….
내가 무슨 섬뜩한 생각을 하든지 전혀 상관없다는 듯 애쉬는 그저 화기만 잠재우면 뭐든지 해 줄 수 있다는 것처럼 굴었다.
내 생명력을 쪼개어 만든 물의 기운이 반발하는 화기를 집어삼키고 다시금 그의 영혼 속 깊은 곳에 박힌 불씨를 찾아 흘렀다. 불씨를 꺼뜨려 버린다면 애쉬는 평범한 인간이 되는 걸까? 베스탈리스가 평범한 인간이 된다…?
“어….”
인간의 신체는 한눈에 담을 수 있을 정도로 작으나 그 안에 잠재된 영혼은 비대해서, 마치 우주를 유영하는 기분이었다. 그 영혼 안에 수많은 드라이어드들의 영혼을 담을 수 있을 정도지 않은가?
눈을 감고 흐르는 기운에 집중하던 도중 유달리 기운이 강한 곳을 찾을 수 있었다. 영혼에 박힌 불씨에 근접했다고 생각하여, 정말 잔인하게 마음먹고 완전히 무너뜨릴 생각으로 가까이 다가갔는데….
“윽…!”
속이 갑자기 확 타오르는 홧홧한 느낌에 나도 모르게 손을 떼고 애쉬에게서 멀어졌다.
“괜찮아요?”
그를 결박하고 있던 드라이어드들이 놀란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혹시라도 애쉬가 허튼짓을 했다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기세로 그를 내리누르는 힘이 더욱 강해졌다.
“너 대체… 영혼에 뭘….”
기이한 기운에 근접했을 때 갑자기 이대로 타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화기로 엉망진창이 된 그의 영혼을 따라 흐르며 그 끝에서 본 건…. 균열이었다. 그리고 화기는 그 균열을 통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드루이드의 영혼 어딘가에 심어져 있다는 세계수의 축복처럼, 베스탈리스를 만드는 불씨도 영혼 어딘가에 콕 박혀 있다고 상상했었다. 하지만 어딘가와 이어져 있을지 모를 기이한 균열과 그 균열을 통해서 끊임없이 새어 나오는 화기.
“뭘 본 거지? 불씨를 봤나? 어떤 모양이었나? 응? 내 영혼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는 괴물의 모양새였나?”
자신의 영혼을 훑었다는 걸 눈치챈 애쉬가 빈정거리며 물었다.
“넌….”
본인은 인지 못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한 번만 더.”
“너에게 해가 되는 일이라면 그만둬.”
엘더가 못마땅한 목소리로 날 말렸다. 마치 불에 댄 것처럼 화들짝 놀라 손을 뗀 내 모습이 신경 쓰였던 모양이다.
“속이 타는 느낌이 들었는데 그저 느낌뿐이었어. 난 아무렇지도 않아.”
“제발… 무리하지 마.”
자신감이 많이 떨어진 목소리, 어서 빨리 모든 일을 해치우고 드라이어드들과의 시간을 따로 가져야만 했다.
“알았어.”
다시 심호흡을 한 후 애쉬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이 머리를 치켜든다. 잠깐 접촉했을 뿐인데 폭주하던 화기가 죄다 가라앉았다. 그는 한결 편안해진 얼굴이었고 광기마저 누그러질 정도로 차분해졌다. 마치 진정제를 맞은 것처럼.
다시금 화기의 근원을 찾아 애쉬의 영혼을 누볐고….
전처럼 속을 태우는 홧홧한 느낌에 지레 놀라 손을 떼지 않도록 참았다.
균열, 영혼의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기이한 균열이 있었다. 균열의 주변부에서 익숙한 기운이 느껴지는 걸 보니… 아마 샘의 원천을 이용해 이 균열을 막았던 것이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겨우 흔적만 남은 걸 보면 이 균열이 겨우 샘의 원천을 이용해 막기엔 너무 크거나 속에서 새어 나오는 화기가 너무 강하거나 둘 중 하나가 아닐까?
균열만 놓고 보자면 애쉬의 영혼은 균열 밖의 화기를 운반해 오는 통로나 다름없었다. 균열 너머엔 대체 무엇이 있는지 살펴보려고 하자 화기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물의 기운을 한껏 끌어 올려 오랜 대치 끝에 균열 너머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그건….
“불?”
<테라리움 어드벤처> 세계에서 수없이 많이 봐온 살아 움직이는 그 ‘불’이었다. 다만 그 불의 기운이 느껴지나 실존하지 않는 듯하고 좀 더 정결하게 응집된 기운이었다.
사방을 돌아다니는 몬스터 불은 잡스러운 것이 많이 섞인 광물 느낌이라면 균열 너머의 불은 정제된 순수한 보석의 느낌이라고 할까?
그 기운에 대해 알게 되자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다. 세계수가 일부러 샘의 원천을 뿌려 베스탈리스를 지키려고 했던 것으로 말미암아, 세상을 침입한 불과 베스탈리스의 불은 전혀 다른 것이라고 봤다. 관계가 없다고.
그런데 베스탈리스 중 한 명인 애쉬의 불이 어쩌면 그 침입자 불로부터 유래했을 수도 있다는 증거가 바로 눈앞에….
그럼 베스탈리스들을 향한 모든 핍박들이 당위성을 갖게 된다. 그건 안 된다. 이제 시작이었다. 베스탈리스가 세계의 구성원으로 인정받게 해야 한다는 의지의 시작.
조급한 마음을 버리고 다시금 기운에 집중했다. 뭔가 내가 놓친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가 불에 대해 오해와 착각을 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균열 너머의 불이 정말 내가 생각하는 불이 아닐 수도 있지 않은가? 애쉬는 물론 베스탈리스들이 뿜어내는 불은 바람, 물과 같은 원소와 다를 바 없이….
잠깐만… 왜 다르지?
균열 너머의 불이 화기의 원인이라면 뿜어내는 화기도 응당 그 불의 기운을 입어 세계수가 알아차리고 드라이어드들 역시 알아차릴 텐데. 왜 전혀 다른 거지?
베스탈리스의 불은 평범한 물은 물론 내 투척용 소화기 총으로도 진압이 되는 보통의 불이었다. 하지만 몬스터 불은 오직 세계수의 축복, 드라이어드로만 진압이 가능한, 마치 불의 모습과 태우는 성질만 빌린 듯한 이질적인 무언가였다.
내가 한참을 뒤지느라 물의 기운을 한껏 뒤집어쓴 애쉬의 영혼이 식으며 화기로 엉망진창이 된 부분을 복구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균열 부위에도 변화가 생겼다. 쉴 새 없이 화기를 뿜어내던 곳이 역류하여 화기를 집어삼키기 시작한 것이다.
화기가 빠져나갈 수 없도록 견고해지는 영혼의 벽, 정순해지는 기운….
베스탈리스의 영혼은 침입자 불의 기운을 정화할 수 있는 힘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