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8화 (438/604)

강제로 연결이 끊긴 여파로 얼떨떨한 정신을 추스르며 스텔라가 있는 방향을 바라봤다. 먼 거리였기에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는 알 수 없었으나 적어도 이 전장에 새로운 얼굴이 참전한 것은 알겠다. 그것도 무척이나 반갑지 않은 얼굴.

“말이 씨가 됐잖아.”

파필리온이 그토록 애쉬가 나타날지도 모르겠다며 두려워하더니 정말로 그 인간이 나타났다. 스텔라와 맞먹는 엄청난 열기가 그녀의 화염을 뒤덮고 자기주장을 펼치고 있었다.

이미 스텔라를 상대하느라 난장판인 곳에 그에 버금가는 폭탄이 떨어지는 것은 전혀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16번째 테라리움에서 헤어지고 나서 참 오랜만에 보는 자였다. 그때의 인상이 워낙 강렬했기에 멀리 있어도 확연히 알아볼 수 있었다.

스텔라와 연결이 끊기며 들렸던 파열음. 그 불길한 소리가 착각이 아님을 증명하듯 애쉬가 든 장검이 스텔라를 찌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정신 연결로 무방비 상태였던 그녀는 무력하게 치명상을 입었다.

“지금… 자기 엄마를 검으로 찌른 거야…?”

잔인한 새끼. 검을 다시 회수하는 손길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렇다는 건 공격도 일말의 망설임 없이 진행했다는 거겠지.

스텔라가 애쉬의 공격으로 쓰러지며 일대의 화염이 잠잠해졌다. 더불어 그녀의 화염을 상대하기 위해 날뛰던 세계수의 힘도 사그라들었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모두의 시선이 스텔라가 있던 곳으로 향했다.

“어째서 애쉬가 가까이에 있다는 걸 아무도 몰랐지?”

알았다면 방비했을 것이다. 최소한 언질이라도 줬겠지.

“스텔라가 뿜어내는 기운이 너무 강해서 애쉬가 가려진 거야. 둘은 모자 사이니 기운도 비슷해서….”

멀리서 애쉬를 보는 것만으로도 트라우마가 일어나는지 파필리온의 낯빛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렇다면 우리와 다르게 어쩌면 스텔라는 애쉬가 오는 걸 눈치채지 않았을까 싶었는데…. 설마 아들이 자신을 찌를 거라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에 내버려 둔 것인가?

애쉬는 스텔라를 쓰러뜨린 걸로도 모자라 주변에 흩어져 있던 인페르노 단원들까지 처형했다. 전부 스텔라와 함께 온 이들이었다.

“저… 저…!”

갑자기 아군끼리 싸우는 상황에 다들 혼란스러워하며 섣불리 나서지 못했다.

공격을 받으면 피할 법도 한데, 인페르노 단원들은 덤덤한 자세로 쇄도하는 애쉬의 검을 맞았다. 마치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이겠다는 태도처럼 보였다. 드루이드 여럿을 애먹였던 인페르노들이 삽시간에 허망한 최후를 맞이했다.

모두를 쓰러뜨린 애쉬는 들고 있던 피 묻은 검을 우리가 있는 방향을 향해 던졌다.

다음 전투 차례는 우리인가 싶었는데 그런 기세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피가 튄 옷과 손을 대충 닦아 내고 잠깐 주변을 둘러보더니 날 발견하곤 시선을 마주해 왔다. 우리의 두 눈이 마주치자….

“책임자는 너겠지?”

무감한 목소리가 날 향한다.

“가져가라. 피해에 대한 보상은 이것들로 되겠지.”

보상? 설마 피해를 일으킨 인페르노들을 체포하는 걸로 무마하자고? 그것도 마치 전리품으로 여기라는 말투로? 그중에… 자신의 어머니가 포함되어 있는데.

그 말에 애쉬를 향해 품고 있던 두려움들이 모조리 사라졌다. 그가 스텔라보다 강한 베스탈리스이든, 마음만 먹는다면 이곳을 지옥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 인물이든 전부 상관없었다.

처음 만났을 때 같은 편인 파필리온을 향해 거침없이 발길질을 내지르는 걸 보고 인성이 만만찮은 쓰레기라는 것을 알았지만….

“아니? 보상이 부족한데?”

네놈 목도 가져가야겠다.

애쉬를 향해 달려가며 샘의 원천의 기운을 끌어 올렸다. 내 생명력은 무한 다이아에서 터져 나오는 다이아를 기반으로 생성되는 기운이기에 귓가에 챠르르, 하고 다이아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샘의 원천의 기운은 스텔라의 화염도 효과적으로 잠재웠다. 그러니 같은 불씨인 애쉬에게도 분명 통할 터였다.

“드루이드님!”

실새삼을 이끌기 위해 길을 터놓은 터라 경로의 중간쯤에 대기하고 있던 데이지와 메스키트가 황급히 내게로 다가왔다. 둘은 날 말리려다가 내 손에서 피어오르는 새까맣고 이질적인 기운에 태도를 바꿨다. 그러곤 아예 애쉬에게 안전히 도달할 수 있도록 서포트하기 시작했다.

애쉬는 자신에게 달려오는 나와 내 드라이어드들을 보고도 딱히 막거나 공격하려는 기세를 보이지 않았다. 이런 나쯤은 얼마든지 대적할 수 있다는 여유가 느껴졌다.

하지만 그 여유도 가까이 다가간 나를 확인하자, 내가 뿜어내는 기운을 확인하자 깨졌다. 익숙한 기운을 알아본 것인지 상당히 놀란 눈을 한 그가 엉겁결에 손을 올렸다.

이전에 애쉬의 근처에 있을 땐 그가 뿜어내는 열기가 무척이나 견디기 힘들었었다. 마치 지상에 뜬 태양처럼 자신이 이곳에 있노라고 엄청난 열기를 존재감처럼 뿜어 댔지. 숨도 쉬기 힘들 정도로 강렬한 열기.

그런데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러고 보니 어느 순간부터 내게 열기에 대한 내성이 생겼다. 몸속에 차가운 기운이 순화하며 몸 밖은 마치 얼음 갑옷을 두른 것처럼 시원한 온도를 유지했다.

“쓸데없는 짓을…!”

애쉬는 주의를 끌기 위한 데이지의 공격을 한 템포 늦게 한 팔로 쳐 냈고 그를 막으려는 메스키트의 방패를 걷어찼다. 이를 놓치지 않고 땅에서 솟아오른 수백 갈래의 노란 줄기가 그의 다리를 묶으며 움직임을 제한시켰다.

애쉬가 남은 팔로 바로 지척까지 다가온 날 공격하려 할 때, 난 가까스로 물의 기운을 두른 손으로 그의 팔을 잡았다.

위잉.

분명 바크 강화를 시킨 포르타의 장비는 제이에게 있을 터인데, 갑자기 일시 정지 스킬이 발동하며 그의 움직임을 붙들었다. 힘의 차이가 월등함에도 불구하고 단번에 움직임을 저지당했기에 애쉬의 눈은 혼란으로 찌푸려졌다.

그의 팔에 둘러져 있던 화염이 물속에 떨어진 성냥처럼 확 꺼져 버렸다. 역시나 이 힘은 스텔라의 화염을 잠재웠던 것처럼 애쉬에게도 통했다.

“허?”

그의 화염은 결코 꺼지지 않는 불처럼 활활 타올랐었다. 그가 죽어야만 연료를 잃은 화기가 끝날 것 같은…. 그런데 그런 강력한 화기가 단순히 내 손에 닿는 것만으로 사그라들어 버렸다.

내 몸속에 찬 기운이 폭포가 휘젓는 수류처럼 격렬하게 요동치며 애쉬를 붙잡은 손으로 몰려들었다.

파직, 파직.

그는 자신의 화기가 단번에 눌린 것이 믿기지 않는지 재차 기운을 끌어 올렸고, 그때마다 물로 화한 내 생명력이 그 기운을 짓눌렀다.

움찔.

서로 상반되는 기운이 맹렬히 부딪히니 그 여파로 맞붙은 부위에서 미약한 통증이 일었다. 그리고 머릿속에 순식간에 둔통이 스치고 지나갔다.

“선택받은 존재여….”

그리고 어디선가 들었던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그대의 빛을 발견해 줄 누군가가 곧 나타날 것이다….”

이 목소리는… 이 대사는… 스텔라의 기억 속에서 들었던 것과 완전히 똑같았다. 기운이 맞부딪히며 저항 여파가 커질수록 목소리는 더욱 선명하게 들려왔다.

어째서 스텔라가 들었던 그 신의 계시가 갑자기….

나와 눈을 마주한 애쉬의 눈이 형형해졌다. 마치 무적에 가까웠던 자신의 힘이 저지당함으로부터 오는 혼란은 진작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는 마침내 자신이 패할 수도 있는 힘을 가진 상대가 나타났음에도 두려워하지도 당황하지도 않았다. 그는 이 모든 상황을 무척이나… 흥미롭게 여기고 있었다.

반들반들 빛나는 새빨간 보석 같은 눈엔 흥미로운 장난감을 찾아서 신이 난 어린아이 같은 감정이 실려 있었다.

“하하….”

그는 물러서지 않고 대뜸 다른 팔을 들어 자신을 붙잡고 있는 내 팔을 붙들었다. 마치 자신을 더욱 강하게 붙잡으라는 것처럼, 놓치지 않겠다는 것처럼.

우리의 접촉면이 많아질수록 그의 화기를 잠식하는 내 물의 기운도 더욱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의 신체 표면에 드러난 화기를 넘어서 화기가 터져 나오는 근원지인 영혼 깊숙한 곳까지. 물의 기운은 거침없이 퍼져 나갔다.

“굉장한걸? 왜 이런 힘을 숨기고 있었지?”

그는 아예 더 해 보라며 날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탄내가 섞인 체향이 훅 가까워진다.

“미친놈이 진짜…!”

죽일 각오로 달려들었는데 오히려 좋다고 나오니 내 쪽이 더 당황스러웠다. 이대로 화기가 전부 잡아먹히면 무력해지는 건 자신일 텐데도 이 상황을 환영하고 있었다.

그가 날 완전히 끌어안을 기세라 결국 내 쪽에서 발길질을 하며 빠져나왔다. 뒤이어 메스키트의 응징이 이어지며 나와 애쉬는 빠르게 멀어졌다.

그가 주춤하는 틈을 타 근처에 있던 스텔라를 살폈다. 바닥을 적시는 피가 치사량에 가까웠다.

스텔라는 베스탈리스를 양지로 이끌어 내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자였다. 베스탈리스들 사이에서 영향력이 크며 힘 역시 강한 자, 스텔라를 제외하고 애쉬가 있었지만 저런 미친 인간이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수틀렸다고 제 어미까지 칼로 찌른 자였다.

“더 해 보라니까?”

내 드라이어드들의 맹렬한 보호를 뚫으며 애쉬가 나에게 돌진했다. 지금 보니 눈이 회까닥 돌아 있었다.

“먼저 전투 불능 상태로 만들어 두는 게 좋겠어요. 팔 하나쯤은 잘라 내는 게 좋겠네요.”

메스키트가 애쉬를 노려보며 살벌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하하!”

드라이어드들의 공격 범위에서 훌쩍 물러난 애쉬가 기묘한 움직임을 보였다. 그는 자신의 몸에 주렁주렁 달려 있던 장신구들을 하나둘 풀어내 땅에 버리기 시작했다. 한눈에 봐도 값비싼 보석들이 더러운 흙바닥을 뒹군다.

그의 강렬한 첫인상을 결정짓는 데에는 저 쓸데없이 많은 장신구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듣기론 그의 제어가 힘들 정도로 날뛰는 화기를 잠재우기 위한 제어구라고 했지.

그 제어구를 하나둘 풀어내자 내가 억눌러 놨던 화기가 다시금 위력을 과시하며 피어오른다. 애쉬의 영혼에 박힌 불씨를 제거하지 않는 한 그의 불은 결코 완전히 꺼지지 않을 것이다.

“굉장하군. 아무렇지도 않아. 수없이 많은 샘의 원천을 삼켰지만 잠깐 널 만진 거에 비할 바가 못 돼.”

미약한 광기가 느껴졌다.

“내게 오지 않을래? 얼마가 됐든 전부 지불하지. 원하는 건 다 줄게.”

그는 광기가 철철 흐르는 눈을 하고 내게 소리쳤다. 내가 말없이 가운뎃손가락을 세워 보이자 씨익 웃더니 다시금 내게 달려들었다. 오히려 저렇게 거세게 나오니 그를 붙잡아 화기를 잠재우는 것이 더욱 어려워졌다.

드라이어드들을 제치며 내게 다가오려고 하는 그의 몸짓엔 과한 집착까지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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