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7화 (437/604)

화르륵.

그녀의 감정을 닮은 화염이 그녀에게서 피어올랐다. 이것이 거부를 뜻하는 건지 아니면 또 다른 감정의 동요를 뜻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가시처럼 치솟은 화염이 샘의 원천에 닿은 순간, 그토록 괴팍하여 잠재우기 힘들었던 불꽃이 화들짝 놀라 사그라드는 것을 보았다.

이 모습을 보고 놀란 건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다. 스텔라 역시 그 변화에 크게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이 일련의 변화가 내 머릿속에 어떠한 가정을 만들었다.

“베스탈리스 남자아이 말고… 여자아이가 미미르의 샘을 마신 경우는 없나요? 그러니까 아이를 낳기 위해서가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해서요.”

여자는 기본적으로 불의 기운을 제어할 수 있기에 탄생의 위험을 대비하여 샘의 물을 마실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시게 된다면…?

“헛소리! 베스탈리스에게 강한 불의 기운은 명예의 상징이다. 굳이 불의 기운을 잠재울 필요가 있겠느냐?”

“하지만 베스탈리스의 최후는 화염이 영혼을 집어삼키는 것이 아니었나요?”

샘의 물은 불의 기운을 억눌러 아이가 안전하게 태어나게 만드는데 하물며 영혼을 잠식하는 불의 기운을 막지 못할 것은 또 뭐란 말인가?

“베스탈리스에게 한 줌 재로 화하는 것은 명예로운 죽음이니라.”

명대로 살겠다. 인간의 평균 수명이 훌쩍 늘어나 백 세 시대를 살아가는 세계의 출신의 나로서 스텔라의 발언은 도저히 용납하기 힘들었다. 물론 이 세계는 내가 살던 세계의 수명을 훨씬 웃돈다.

드루이드의 기본 수명은 내가 알던 평범한 수명의 두 배였고 노화 속도도 더뎠다. 드루이드 중엔 100살이 넘어도 현역으로 뛰는 사람들이 많음을 알고 있다.

하지만 베스탈리스의 수명은… 어떻지?

스텔라의 홍옥 같은 눈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강한 베스탈리스일수록 그만큼 강렬한 화기에 일찍 죽는다. 스텔라처럼 화기를 쥐어짜 낸다면 더욱 빨리. 평범한 삶을 누린다면 더욱 오래 살 수 있을지도 모르나 그들에게 단명은 당연한 것이었다.

“더 살 수 있다면, 그런 방법이 있다 해도 시도해 보지 않으실 건가요?”

내 말에 힘을 싣기 위해 샘의 원천의 기운을 손에 감아 스텔라의 화염을 향해 뻗었다. 좀 전에 봤던 것이 착각이 아니었음을, 다시금 기운에 닿은 화염이 맥을 못 추리고 가라앉는 게 보였다.

“뭘 하라고 할 건지 눈에 훤하구나. 나보고 지금 그 샘의 원천을 마시라는 게 아니니?”

“당신은 단명하기엔 하고 싶은 게 아직 많이 남았잖아요.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분노하고 절망했던 거 아닌가요? 그리고 여기, 당신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할 내가 있어요.”

스텔라는 아직까지 내 손을 잡겠다든가 조금이라도 고려하겠다는 뜻을 내보이지 않았다.

“샘의 원천을 마셔요. 제가 생각하기엔 이 기운이 지금 당신의 영혼을 태우고 있는 불씨를 잠재울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단명이 어째서 명예인 거죠? 누굴 위한 명예인가요?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좀 더 오래 살면 좋잖아요. 불멸을 논하는 것도 아니고 어쩌면 본래 살아야 할 수명대로 살아가는 것일 수도 있는데.”

스텔라에게 애쉬의 비밀에 대해 듣고 나서 그를 불나방 같다고 표현한 적이 있었다. 샘의 원천은 애쉬의 불꽃을 완전히 잠재우는 데 실패했다.

그는 지금도 못다 잠재운 불씨가 생명력을 연료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죽을 때가 되면 영혼이 잠식당하는 보통의 베스탈리스와 달랐다. 그는 시한폭탄을 몸 어딘가에 심고 있는 것과 다름없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보니 베스탈리스라는 종족 자체가 애쉬와 다를 바 없었다. 그들이 더욱 과격하게 행동하고 극단적으로 구는 이유 중 하나에 이러한 단명이 속해 있지 않을까?

“하하, 네 샘의 원천을 마셔라? 내 목숨을 네게 빚이라도 지우라는 게냐? 아서라. 베스탈리스의 긍지의 화염은 오롯이 자기 자신의 것이다.”

“난 당신에게 빚을 지게 할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우리가 했던 대화의 처음부터 지금까지 내가 당신에게 대가로 요구하는 게 있었나요? 동업자이자 제안이라고요. 당신에게 필요한 것을, 도울 수 있는 것을 내 능력이 되는 선에서 제공하겠다고요.”

아아, 대체 이런 철통같은 여인을 에우노미아는 어떻게 꼬여 낸 걸까? 그녀만 돌아선다면 베스탈리스는 새 국면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내 진심이 닿기를 기도하면서 애타게 그녀에게 말을 건넸지만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우리의 대화 진척도는 멈춰 버렸다.

“세계수를 끌어내린다고 했지?”

“맞아요. 난 세계수의 방식이 아닌 나만의 방식으로 이 세상의 신이 될 거예요.”

“그럼 1번째 테라리움과 척을 질 거라 약속할 수 있느냐?”

“당신이 말했듯이 이 모든 발언들이 1번째 테라리움에서 사형감이란 걸 인지하고 있어요.”

“아니, 난 단순히 네가 인지하는 걸로 그치는 걸 말하는 게 아니란다. 정식으로 1번째 테라리움에 선포를 하는 것이지. 넌 반세계수 세력이라고. 그리고 그들을 확실히 견제할 수 있어야 한단다.”

스텔라의 말엔 약간의 비웃음이 섞여 있었다.

“넌 내게 음지에 숨은 나의 동지들을 양지로 데리고 나와야 한다고 말하고 있단다. 하지만 간신히 양지에 머리를 들이민 배신자 놈들도 1번째 테라리움에 재산을 몰수당한 후 광대처럼 지내고 있고. 그렇다면 뻔하지 않겠느냐?”

그녀가 말하는 배신자 놈들이란 아무래도 온건파들을 뜻하는 게 분명하다. 미미르의 가문 사람들이 그녀의 말처럼 재산을 모두 뺏긴 후 일거수일투족이 1번째 테라리움에게 감시당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

“1번째 테라리움이 멀쩡히 존재하는 한 베스탈리스가 세상에 나올 경우의 결과는 불 보듯 뻔하지. 샘의 존재에 대해 공표? 세계수의 의지? 그걸 그들이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성싶느냐? 덮고 묻고 진실이 아니라 발뺌하겠지. 이제 와서 그들이 그 사실을 인정해 봤자 이득이 되는 게 있겠느냐? 베스탈리스들을 앞장서서 핍박하던 사실만 드러나 몰매만 맞겠지. 그건 중앙 행정 관리부가 가진 절대 권력이 흔들리는 근간이 될 것이다.”

내가 세계수와 동등한 신이 되려고 한다면 세계수의 가장 가까우며 충실한 신도들인 1번째 테라리움과 적이 되는 게 필수 불가결했다. 대리자가 될 거란 나의 말에 친절히 대해 주며 선물까지 준 낮은 거목까지 적으로 돌려야겠지.

“그런 그들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너 따위 예비 신을 하루아침에 없던 존재로 만들어 버리는 건 쉬운 일이겠지. 자, 내가 너의 감언이설 외에 무얼 믿고 너와 함께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완전한 신인 세계수에 비해 나는 아직 예비 신일 뿐이었다.

“물론 1번째 테라리움을 비롯한 대부분의 테라리움들과 전부 척을 져야 할 수도 있다는 건 알아요. 그렇다고 무모하게 모든 테라리움을 향해 전쟁을 선포하겠다든가 다짜고짜 강경 대응하겠다는 약속은 하지 않아요. 전 신이 되겠다고 했잖아요.”

만약 내 입에서 1번째 테라리움을 당장 적으로 돌리겠노라고 말한다면 스텔라는 더 이상 대화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해 단번에 이 연결을 끊어 버릴 거란 걸 잘 알았다. 그녀야말로 극단적인 테러리스트 집단의 우두머리였었다. 그것이 얼마나 허황된 일인지 그녀가 잘 알 것이다.

“신이 되겠다는 건 이 세계 기저에 깔린 근본을 뒤엎겠다는 것과 같아요. 왜 세계수가 신으로 추앙받는지 잘 아시잖아요? 세계수가 만물의 어머니인 것을 제외하고도 당장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불의 침입이 세계수의 신앙을 견고하게 만들어 주고 있어요. 세계수의 축복이 없다면, 그 가지가 보살피는 테라리움이 없다면, 세계수의 사자인 드라이어드들이 없다면 인류는 존폐 위기니까요.”

그제야 날 보는 스텔라의 눈빛이 조금 달라졌다.

“불이 없다면 굳이 세계수가 유일신으로 존재할 필요는 없어요. 전 갑자기 나타난 불의 침입, 그 원인을 알아내는 것부터 시작할 거예요. 그리고 불의 침입을 완전히 막는 것, 그게 제 궁극적인 목표고요.”

돌고 돌아서 <테라리움 어드벤처>의 최초이자 근본 퀘스트까지 오게 되었다. 어느 날 갑자기 불의 침입으로 인해 세계수가 힘을 잃어 가고…. 결국 이 메인 퀘스트의 마지막 종착지는 불의 박멸이었다.

내가 여전히 제이였다면 그 퀘스트는 영웅의 길이 됐을 것이나 이젠 제희이기에 신의 발돋움의 길이 되겠지.

“정치적으로라도 베스탈리스가 하루아침에 평범한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건 당신이 잘 알 거예요. 전 단독으로 싸워야만 했던 베스탈리스들에게 보호막과 편을 만들어 줄 거예요. 세상 사람들은 단순히 자연을 사랑해서 모이기도 하고.”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에 침입했던 신비로운 집단인 네이처 키퍼.

“연금술의 오용을 막고 올바른 길로 갈 수 있길 바라며 모이기도 해요.”

자신의 논문이 엄청난 재앙을 몰고 온 것을 직접 겪은 이후 루프가 연금술의 오용을 막기 위해 만든 비밀 집단인 ‘윤리의 지붕’.

“베스탈리스를 양지로 끌어내서 제대로 된 진실을 세상에 알려요. 1번째 테라리움이 막더라도 세상에 널리 그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어떤 핍박을 받아 왔는지를 공표하는 거예요.”

세상엔 아직 베스탈리스의 존재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그들이 베스탈리스에 대해 가장 먼저 접하게 될 소식은 안타깝게도 인페르노라는 범죄 조직에서부터겠지. 그렇다면 그들은 베스탈리스가 무조건 나쁘다고 인식할 것이다.

“그럼 동조하는 사람과 동정하는 사람과 항의하는 사람들이 생겨날 거고 집단이 생길 거예요.”

모든 자금은 뒤에서 내가 지원할 거다.

“그리고 범죄자는 숨기지 말고 인도해요. 인페르노의 해산도 필요하겠죠. 인식을 개선하기 위해서라도 세상에 협조적으로 굴어요. 단, 나는 베스탈리스에 대한 공정한 법이 입법되기까지 처벌을 미루게 만들 거예요.”

베스탈리스에 대한 편견은 공정하지 못한 판결을 내릴 확률이 컸다. 사형이 쉽게 떨어질 위험성도 크지.

“베스탈리스를 위한 테라리움을 만들게요.”

다른 테라리움들의 기피와 차별을 막기 위해 안전이 보장되는 독립된 테라리움들을 만들 거다. 세계수가 가지를 뻗어 한 일이라면 나도 할 수 있어.

“모두 허황된 말뿐이야.”

“그럼 이 샘의 원천을 마시고 좀 더 오래 살아요. 그리고 지켜보면 되잖아요. 전 이렇게 당신에게 말을 하고 곁에서 보여 주는 신이 될 거예요. 선택해 놓고 오랫동안 찾아오지 않는 신이 아니라요. 내가 당신에게 증명해 보일 길을 지켜봐요. 어차피 죽을 명, 다시 태어난 셈 치고 걸어 볼 수 있는 거잖아요. 진정한 명예를 찾아요.”

다시금 종용하며 스텔라에게 샘의 원천을 내밀었다. 그녀는 지친 얼굴을 하고 홀린 듯한 표정으로 샘의 원천을 향해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이대로… 이대로 그녀가 내 손을 잡는다면… 어쩌면…. 정말로 세상은 새로운….

“어머니, 나이가 들어 현명함이 가려졌는지 행동이 지나치셨습니다.”

그 순간 어디선가 섬뜩한 목소리가 들리더니….

푸욱.

끔찍한 파열음이 들리며 단번에 나와 스텔라의 연결이 끊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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