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나’를 인정한다. 그건 내가 신인 세계수가 만들어 낸 또 하나의 신임을 깨닫는 거다.
유일신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다른 신이 나타난 건 아주 많은 변화가 생길 수도 있다는 걸 뜻한다. 어떤 변화가 오더라도 감내해야 한다.
“돌아가자.”
실새삼의 차가운 인상이 깨지며 옅은 미소가 올라왔다.
“많이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얼른 갈게.”
내 말이 끝나자 그의 모습이 점차 흐려지더니 이내 사라져 버렸다. 데리러 왔다고 했으니 목적을 달성했기 때문에 사라진 거겠지.
난 열쇠 문신이 자리한 왼손을 들었다. 문신이 괜히 이런 모양을 한 건 아닐 거다. 돌아가고 싶다고 마음먹은 순간부터 왼손이 묘하게 묵직하단 기분이 들었다. 그 무게감은 딱 테라리움 아티팩트를 착용했을 때와 비슷했다.
난 왼손을 빤히 바라보다 문득 생각이 나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부모님과 친구들에게 연락을 해야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짧은 고민이 들었지만 애써 지웠다. 현실을 생각하면 할수록 또다시 망설임만 길어질 뿐이었다.
오랜 여행을 떠나는 거야. 다시 돌아오면 될 테니까….
이번엔 다시 돌아오지 못하게 된다면 어떻게 하지, 그런 고민 역시 불쑥 솟았지만 먼저 행동함으로써 결단을 내려 버렸다.
실새삼이 기대고 있던 자리에 왼손을 가져다 대자, 처음 <테라리움 어드벤처>로 들어갔을 때처럼 눈이 멀어 버릴 것 같은 눈부신 빛이 손이 닿은 곳에서 터져 나왔다.
빛이 사그라든 후 겨우 시야를 확보하자 주변에 있던 모든 것들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새까만 공허의 공간이 보였다. 그리고 저 멀리 황금빛 네모난 문이 보였다. 저 문을 통과하면 <테라리움 어드벤처>의 세계로 갈 수 있다는 직감이 들었다.
발을 떼자 주변의 공허가 일그러지며 어떠한 형상들이 떠올랐다. 그 형상들은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의 모습이 되어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들을 보여 줬다. 그중엔 놀랍게도 당산나무의 신령인 나와 아이의 모습도 있었다.
황금빛 문을 향해 뚜벅뚜벅 걸으며 대체 주위에 나타난 형상들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다가…. 그 형상들이 갑자기 불에 타 하나둘 사라지는 걸 보며 어떠한 확신이 들었다. 전부 전생의 나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문으로 향하는 이 길은 마치 내 영혼이 여태 지나쳐 왔던 여정을 보여 주는 거나 다름없었다.
갑작스레 내가 있던 마을에 들이닥쳤던 불, 날 향해 먹이를 발견한 맹수처럼 화르륵 타오르던 모습…. 마치 날 쫓아온 느낌이었지.
그때 나타났던 불은 결국 아이가 <테라리움 어드벤처> 세계로 끌고 가 버렸지만, 그렇지 않았던 내 전생의 나들은 지금 보이는 것처럼 모두 불에 타 죽는 최후를 맞이했던 게 아닐까?
지금 공제희의 삶처럼 특수한 힘이 없는 무척이나 평범한 삶을 살던 상태에서 불을 만났다면 어쩌지 못했을 것이다.
세계수가 다른 세계로 후계인 날 보낼 수 있다면 그 통로를 통해 불이 쫓아왔을 수도 있다. 그리고 가까이 가서 살핀 황금빛 문의 가장자리엔 내 짐작을 증명하듯 마치 불에 탄 듯한 옅은 그을음이 묻어 있었다.
계속해서 전생의 나를 기다리던 세계, 하지만 제때 도착하지 못해서 지연됐던 이유. 모두 불에 의한 것이었다면?
파앗.
문의 손잡이를 잡으려 할 때, 문 가까이에 아직 불에 타지 않은 형상이 있다는 걸 뒤늦게 알아차렸다. 그건… 어릴 적의 내 모습이었다. 전생의 내 모습들이 형상으로 나타났으니 현생의 내 모습 역시 나타나는 건 이해되지만…. 기이하게도 그 형상 역시 불에 탄 흔적이 보였다.
지금의 나는 이렇게 멀쩡한데 어째서 저런 꼴을 하고 있는 걸까?
그렇게 생각했을 때, 형상을 통해 보는 어린 내 모습이 어딘가 낯설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니까 내 기억에 없는 내 모습처럼 말이다. 불에 탄 흔적, 나도 모르는 내 기억…. 혹시 내가 어릴 때 화재 피해를 입었던 적이 있었나?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려 하자 마지막 남은 그 형상까지 사라져 버렸다.
이제 남은 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문.
문의 손잡이를 잡으며 생각했다. 세계에 갑자기 침입했다는 불, 어쩌면 내가 클리어해야 할 진정한 메인 퀘스트는 그 불에 대해 알아내는 게 아닐까?
철컥.
손잡이가 부드럽게 돌아가며 문을 쥐고 있는 왼손이 다시금 묵직해졌다. 사라졌던 유리 반구의 아티팩트가 다시금 스르르 나타나고….
딱딱했던 문고리가 부드러운 감촉으로 바뀌었다는 느낌을 받았을 때, 어느새 난 문고리가 아닌 누군가의 손을 잡고 있음을 깨달았다.
황금빛 문은 황금빛으로 빛나는… 나, 아니 제이의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짧게 잘린 머리카락, 형형하게 빛나는 금안, 스텔라의 화염 공격에 의해 망가진 장비 그리고… 여기저기 볼썽사나운 금이 그어진 모습. 전부 이곳을 여행하며 완성됐던 제이의 모습이었다.
맞잡은 내 손에서 새까만 빛이 피어올라 제이의 황금빛을 내리눌렀다. 부딪히는 서로 다른 두 빛은 마치 기 싸움을 하는 것처럼 섞이지 않고 일렁거렸다.
우린 잠시간 서로 마주 보며 손을 붙잡고 있었다.
“조심하셔야 한다고 했죠. 공통점을 발견하면 바로 원상태로 돌아가기 위해 발버둥 칠 거라고 했잖아요.”
살짝 꾸짖는 듯한 목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려왔다.
“이건 앞으로 제가, 당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꽃으로서 감시할게요. 무사히 깨어나셔서 기뻐요, 제희 님.”
하얀 손이 불쑥 튀어나와 제이의 반대쪽 손을 잡아끌었다. 그러자 제이는 속절없이 끌려가더니 이내 형태가 바뀌어 네모난 핸드폰의 모습이 되어 버렸다. 그걸 손에 든 채 어여쁘게 웃어 보이는 바곳이 보였다.
“내가 너무 늦었지.”
내 말에 바곳은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없으면 우리의 시간은 흐르지 않아요.”
그건 마치 내가 없으면 내 드라이어드들에겐 현재란 의미가 없다는 것처럼 들렸다.
난 바곳이 들고 있는 핸드폰을 보며 내 주머니 속의 핸드폰을 꺼냈다. 전원 버튼을 누르자… 그토록 보고 싶었던 <무한 다이아>의 화면이 툭 튀어나온다. 다만 예전과 모습이 좀 달랐다.
화면을 가득 채우던 세계수 가지의 프레임이 모두 사라져 있었다. 나와 테라리움들의 세계수 가지와의 연결이 모두 끊긴 건 아닌가 싶었는데 테라리움 관리 창은 그대로 떴다.
“내 영혼에 연결된 세계수 가지는 어떻게 된 거야?”
내 물음에 바곳은 제이에서 모습이 변화된 핸드폰을 내게 내밀었다.
“여기 이 상자 안에 있어요. 이제 세계수는 전과 달라요. 앞으로 제희 님의 영혼에 직접적으로 관여할 수 없어요. 무슨 일을 하려거든 ‘감시자’인 저를 거쳐야 할 거예요.”
본래 내 핸드폰에 심어져 있던 세계수 가지가 마치 외장 하드를 통해 따로 떨어져 나간 모양새였다.
“그러니 앞으로 제희 님도 조심해 주세요. 이게 다시 제희 님께 돌아가 버린다면 제가 중간에 막는 역할을 할 수 없잖아요?”
내가 이전의 제이와 같은 길을 걷게 된다면 다시 난 제이와 동기화가 된다고 한다. 그럼 지금 바곳이 따로 떼어 내어 감시하는 세계수의 가지도 기다렸다는 듯이 내 영혼에 들러붙겠지.
“잠깐… 그럼 드라이어드와의 영혼의 연결은? 세계수 가지의 연결도 끊어 낸 거면….”
바곳은 작게 웃음을 띠며 고개를 저었다.
“다시 말씀드릴게요. 이건… 제희 님의 영혼 중 세계수의 축복이 박혀 있던 부분을 잘라 낸 거예요.”
드루이드들은 태어날 때부터 영혼 한편에 세계수의 축복을 받고 태어난다. 그 축복의 힘으로 드라이어드들과 대화를 할 수 있고 영혼의 연결을 맺은 드라이어드들이 쉴 수 있는 영혼 한편의 휴식처를 아티팩트 형태로 형상화할 수 있다.
그렇기에 반대로 드루이드가 되기 위해선 반드시 세계수의 축복이 필요하다고 볼 수 있었다. 이 모든 작동 원리에 세계수의 축복이 끼어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게 없다고 제희 님의 영혼이 없어지는 건 아니잖아요? 우리 드라이어드들과 제희 님은 영혼의 연결로 이어져 있잖아요. 바로 제희 님의 영혼이야말로 다른 누군가의 축복이 필요 없는 축복 그 자체인걸요.”
이젠 세계수의 힘을 빌릴 필요가 전혀 없음을 다시 상기시켜 준다.
난 손을 들어 아티팩트를 확인했다. 그러고 보니 아티팩트의 모양이 이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투명한 유리 돔이 아닌, 새까맣게 칠해진 유리 돔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 유리 돔 모양의 팔찌는 내가 내 영혼 안에 자리 잡은 세계수의 축복을 처음으로 느꼈던 증거이자 드루이드가 되었음을 증명하는 물건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이젠 내 영혼에 세계수의 축복이 없음을 증명하는 물건이 되었다.
바곳은 제 손에 들린 황금빛 핸드폰과 나를 번갈아 보며 말을 이었다.
“제희 님의 축복의 기운은 이런 편향적이며 화려하기만 한 축복과 달라요… 모든 걸 포용하는 자애로운 기운으로 느껴져요. 마치 모든 색을 포용할 수 있는 검은색처럼 말이에요.”
완전히 세계수에게서 등을 돌려 버린 바곳의 평가가 신랄하기 그지없었지만 듣기 좋았다. 세계수의 기운은 눈부신 황금 오라 그리고 내가 스스로 내는 빛은 반짝거리는 까만 오라였다. 모든 색이 합쳐진 것과 같은 까만 빛.
“내 드라이어드와의 연결에 문제가 없다면 나 역시 아무 문제 없어.”
그럼 이제 막을 내려 볼까? 세계수를 불러들이며 혼돈이 되어 버린 전황을 정리할 시간이었다.
바곳이 거대한 낫을 들어 공간을 가르자 시야에 환한 빛이 밀려들어 왔다. 눈이 부셔 잠깐 눈을 감았다 뜨자 눈앞에 내 드라이어드들이 기다렸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짧게 잘라 냈던 머리가 길어지고 옷도 할머니 댁을 방문하며 입었던 외출복이었다. 많은 모습이 달라져 있을 텐데도 드라이어드들 중 누구도 내게 달라졌음을 지적하는 이가 없었다. 그들에게 나는 모습이 달라져도 언제나 영혼의 주인이었다.
불길에 휩싸여 결코 온전하지 못했을 것이 분명한데 멀쩡히 걸어 나오는 걸 보고 오히려 다른 길드원들이 더욱 놀란 반응을 보였다.
원래 내가 살던 세계에서 3일이나 되는 시간을 보내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전장의 시간은 스텔라의 폭주 이후 겨우 몇 분 정도 지난 것처럼 보였다.
내 육체의 그릇이 사라졌어도 이곳에 강림한 세계수의 힘이 폭주하는 건 여전했다. 스텔라를 처단하기 위해 흉흉하게 터져 나오는 기운을 보며 나는 다른 방식으로 스텔라를 저지할 것임을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