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3화 (433/604)

아이의 극단적인 선택에 아직도 어안이 벙벙했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 겨우 찾은 <테라리움 어드벤처> 세계와의 연결 고리는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생각해 보면 그 세계에서 메스키트는 나 이전에 이미 주인을 만났다. 아이가 세계로 넘어가는 건 이미 예정된 일이었기에 바꿀 수 없었다. 여긴 과거였다. 아이를 설득해 봤자 결국 어떤 방식으로든 아이는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걸 선택했을 거란 말이다.

지금의 나는 겨우 과거를 엿보는 수준이었기에 아이와 유대감은 그리 깊지 않았다. 조금 있는 유대감도 엿본 기억을 통해 강제로 심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마 내가 정말로 과거의 나 자신이었다면 지금 이 순간을 상당히 아쉬워하지 않았을까 싶다.

오랜 세월이 지나서 만나게 된 유일하게 대화가 통하는 상대이자 유일한 친구를 떠나보낸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어쨌든 아이가 나 대신 불을 데리고 떠남으로써 이곳은 끝없는 화재의 영향에서 드디어 벗어났다.

아이는 자신이 대신 떠날 테니 내게 이곳의 복구와 지원을 요청했지만, 그건 과거의 내가 할 일이라고 말하듯 점차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곧 상영이 끝나는 영화관에서 이제 떠날 시간이라 종용하는 기분이었다.

기이한 과거와의 만남을 뒤로하고 본래 내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왔다. 나는 다시 당산나무가 있는 동산에 서 있었고….

“늦었네.”

커다란 나무 곁에 누군가가 기대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나를 책망하는 목소리는 익숙한 존재의 것이었다.

단정히 쓸어 넘긴 밀빛의 머리칼과 비슷하나 그보다 좀 더 진한 눈, 실새삼이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훨씬 성장한 모습이었지만 오만한 귀족 같은 시선은 여전했다. 세상에 그만 동떨어진 것처럼 보였다. 그를 기점으로 흐르는 공기와 분위기 모두 그를 이질적인 존재라 말하듯 일그러졌다.

“네가 어떻게 여기 있는 거야?”

<테라리움 어드벤처> 세계에서 나 말고 다른 존재가 넘어올 수 있을 거라곤 전혀 생각도 못했다. 특히나 내 드라이어드가.

“제대로 찾아왔군.”

실새삼에게 가까이 다가가자 그가 손을 들어 내게 뻗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의 손은 나를 통과했다. 실체가 없었던 것이다.

“네가 넘어온 줄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니었나 보네.”

그럼 그렇지. 나 역시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만지려 했으나 신기루처럼 닿을 수 없었다.

“네가 보는 나는 투영의 결과물이다. 네 정신 속에 간신히 날 심어 놨을 뿐이지.”

그의 말에 한때 내 머릿속에 편린처럼 박혀 있던 세계수의 정신이 떠올랐다.

“아무리 나라도 세상에서 갑자기 사라져 버린 널 찾는 건 무척 힘든 일이었지. 그 어디에서도 너의 영혼을 찾을 수 없었다. 분명 우린 함께 연결되어 있으나 한쪽이 끝도 없는 심연 속으로 사라져 버린 느낌이었어.”

그걸 말하는 실새삼의 눈이 짙게 가라앉았다. 많은 감정이 한데 섞여 엉겨 붙은 듯했다. 우리가 만난 시간이 아주 오래된 건 아니었지만 어떤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날 찾아냈던 실새삼이었다. 그랬던 그가 도저히 날 찾아낼 수 없었을 때 느꼈을 심정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그러다 네 영혼이 마치 하늘의 태양처럼 놀랍도록 밝은 빛을 띠는 순간이 있었다.”

순간적으로 그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네가 ‘자각’했을 때였지. 네가 다른 세상으로 가 버린다거나 하는 일은 중요하지 않아. 난 사선의 경계에 있는 너도 찾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네가 스스로 숨어 버린다면 난 아무리 노력해도 널 찾아낼 수 없어.”

“내가 자각을 했을 때?”

“그래. 네 영혼이 가진 본질을 자각했을 때, 네 영혼은 강렬한 빛을 내뿜었고 나는 비로소 그것이 내가 찾던 너라고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내가 자각을 했다고?

“넌 어쩌고 싶은 거지? 네 선택에 따라 넌 다시 어둠 속으로 숨을 수도 있고 빛을 낼 수도 있다. 그건 어떤 초월적인 존재에 의한 강요도 아니고 오롯이 네 몫이지.”

“으음….”

난 실새삼의 말을 곱씹어 보며 그가 말하는 요점을 파악하려 애썼다. 실새삼은 당장 내게 어떠한 선택지를 고를 것인지에 대해 묻고 있었다.

“참고로 네 드라이어드들의 의견은 반반이었다. 한쪽은… 네가 이대로 어둠 속에 숨기를… 그러니까 안전한 곳에서 평범한 삶을 누리길 원했다. 너와 다시 만나게 되지 못하는 상황은 슬프나 함께하는 여정이 너에게 더 가혹할 것이라 여긴 것이지.”

비로소 그가 하는 말의 의중을 파악할 수 있었다. 내게 이곳에 남아 대학생 공제희로서의 삶을 살아갈 것인지….

“또 다른 쪽은 당장이라도 널 보고 싶어 안달이 난 쪽이다. 영원히 함께하자던 영혼의 약속을 잊지 말기를, 다시 자신들의 곁으로 돌아오길 바라며 애절하게 기다리고 있지.”

아니면 <테라리움 어드벤처>로 돌아갈 것인지에 대해….

결국 내가 지지부진하게 선택을 미룬 탓에 이런 순간이 오고 말았다.

그나저나 내가 이곳에 남기를 원하는 드라이어드가 있다니.

“그러는… 넌 어느 쪽이야?”

내 질문에 실새삼은 말없이 주변을 둘러보기만 했다.

“글쎄… 난 너의 선택이 어떻든 존중한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무척이나 씁쓸해 보였다.

“네가 자각을 했던 건 이것의 도움이 있었던 거지? 미약하게나마 세계수의 축복의 기운이 느껴진다. 그리고 너와 더없이 가까운 기운이기도 하지. 같으면서도 다른, 어쩌면 이게 바로 너의 영혼의 본질이 아닌가 싶군.”

실새삼은 무척이나 애틋한 눈으로 당산나무를 쓸었다.

“그래, 확실하지는 않지만… 물론 아직까지 애매하긴 하지만…. 어쩌면 내 전생을 본 것 같기도 해.”

나는 태어나기를 사람으로 태어났고 나무였던 적이 없으니 아마 당산나무를 통해서 봤던 내 기억은 전생과 관련이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인삼 드라이어드들이 애타게 기다렸다던 그런 전생의 나.

“그리고 세계수가 날 이곳으로 보낸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하고 있어.”

자연스레 세계수를 어머니라 지칭하던 과거의 나 그리고 세상에 축복의 힘이 닿지 않는 곳이 없도록 하라는 세계수의 의지.

내 말에 실새삼은 착잡한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널 보냈다라…. 세계수가 미리 안배된 존재에 축복을 심은 것도 아니며 우리 드라이어드처럼 품에서 내보낸 피조물도 아니고. 그건 마치 우리의 모체가 씨앗을 내어 자손을 퍼뜨리는 것처럼 들리는군.”

실새삼의 이야기를 들으며 어렴풋이 엿봤던 기억을 떠올렸다. 마치 씨앗부터 시작해 싹을 틔우고 나무로 성장하던 나의 모습.

“하지만 세계수가 파종을 한다는 이야기는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다. 세계수는 나무의 형태를 띠나 본질은 신, 우리와 같은 일반적인 식물들과 다르지. 신은 유일하며 자손이 필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란 결과물이 있다는 건….”

난 세계수가 내 영혼에 기생하다 결국 거침없이 내 육체를 차지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식물이 파종을 하는 이유엔 다음 세대를 잇기 위해서지. 그건 근본적으로 정해진 수명이 있는 필멸의 존재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건 위기에 기반한 수단이라 볼 수도 있지. 발전하지 않는다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다면 멸종으로 이어지기에 더 건강하고 나은 세대를 만들기 위해 더욱 다양하게 더욱 멀리 퍼뜨리는 것이다. 그러니 세계수가 그런 일을 벌였다는 건….”

세계수는 지금 위기를 느끼고 있었다. 불멸의 존재인 신이 필멸자처럼 소멸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세계수가 다스리는 세계에 갑작스럽게 나타난 불 그리고 점점 약해지고 있다는 세계수의 힘….

갑자기 버스 터미널의 공방에서 보았던 금이 간 밀폐형 테라리움이 떠올랐다. 갑작스럽게 나타났다던 불은 대체 어디서 나타나 어디로 침입한 걸까?

세계수가 다른 세계에 씨앗을 보내 그곳에서 내가 태어났다면 훨씬 이전부터 불의 침입으로 인해 위기를 느꼈다는 걸 뜻했다. 그러니 내가 아이와 함께 세계로 보내 버린 불이 원인은 아닐 터였다.

“네 말을 종합해 보자면 나는, 아니 어쩌면 내 영혼은 세계수의 후계자와 다름없다는 건데….”

내가 돌아올 때를 대비해 안배된 <테라리움 어드벤처>의 친숙하고 친절한 세계관, 과할 정도로 따라붙던 세계수의 보살핌. 하지만 기회가 되니 보란 듯이 내 육체를 그릇으로 이용해 차지해 버린 세계수.

그건 설마 내가 실패작이라 생각되어서? 아니, 어쩌면 내가 오해한 건 아닐까?

“그래, 네가 다시 우리의 곁으로 돌아온다면 세계수와는 또 다른 신이 되는 길을 걷게 될지도 모르겠군….”

신은 이제 넌덜머리가 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월적인 존재 자체에 의지하게 되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다들… 어때? 내가 떠난 이후로….”

“네가 떠난 이후 우리의 시간은 멈췄다. 그리고 궁금하면 직접 와서 보는 게 어떤가?”

장난스레 말하지만 진심이 담겨 있었다. 실새삼은 어쩌면 내가 돌아오길 바라는 쪽이 아닐까 싶었다.

난 <테라리움 어드벤처>에 두고 온 내 드라이어드들과 길드원들을 떠올렸다. 내가 현재 살던 곳으로 돌아온 계기는 결국 그들과 함께 끝까지 여행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 살아온 인생에 비하면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가장 행복하고 즐거웠던 순간들이었다.

하지만 그들과의 만남 역시 결국 세계수의 안배였겠지. 돌이켜 보면… 게임을 즐겨 하는 날 위해 적재적소에 내 드라이어드들을 배치했다.

나와 가장 먼저 만났어야 할 인삼 드라이어드는 ‘일시 정지’, 메스키트는 ‘셧다운’, 마거리트는 ‘세이브 포인트’, 바곳은 ‘리셋’ 그리고 날 찾으러 온 실새삼마저 나와 세계를 연결하는 ‘로그인’. 그리고 다른 드라이어드들에게도 어쩌면 어떠한 부여된 역할 같은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

나의 선택은 결국 모든 것이 세계수의 의도였음을 인정해야 시작될 수 있었다.

결국 난 위기를 느낀 세계수의 하나의 선택지라는 생각에 반항심이 들긴 해도, 그런 계기가 있었기에 모두를 만나 모험을 떠날 수 있었다. 그것만큼은 세계수의 의도가 아니라 내가 만들어 간 이야기였다.

전생에 나무였던, 어쩌면 세계수의 묘목이자 그 신령이었던 내가 한없이 사람들에게 복을 베풀었던 걸 떠올렸다. 나의 태몽과 특별한 뜻을 가진 이름.

그건 어쩌면 정해진 운명, 바곳이 내게서 끊어 내 주려 했던 그런 운명일 수도 있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운명이 아니라 가능성이 될 수도 있었다. 즉 공략 가능한 또 하나의 엔딩이 오픈되어 존재한다고 보면 된다.

이곳에서 20년 넘게 일궈 온 내 인생도 아까웠지만 계속해서 <테라리움 어드벤처>로 넘어갈 어떠한 강제적인 의도를 찾아 헤맸던 건, 결국 난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는 걸 뜻하겠지.

다시 여행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기도 했지만, 그것 때문만이 아니었다. 이젠 초월적인 존재의 힘을 빌리지 않고 내 스스로도 복을 나눠 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테라리움 어드벤처>는 단순한 게임 속 가상 세계가 아니라 진짜로 존재하는 세계였다. 그러니… 위기를 느끼며 무너져 가는 세계수가 어쩌면 더 이상 지키지 못하게 될 수도 있는 그 세계를 내 힘으로 지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소중한 드라이어드들이 있는 세계. 그들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면서도 난 왜 그렇게까지 망설였던 걸까.

겨우 나무와 이야기할 수 있는 능력만을 가졌던 어린아이도 대의를 위해 자신의 삶을 버리고 낯선 세계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많은 능력을 가진 나는 지금까지 이룬 삶이 아까워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세계를 구해야 한다는 대단한 사명 같은 걸 가진 게 아니라 그저 내가 사랑하는 내 드라이어드들이 더 오래 행복하게 지낼 수 있도록, 나도 그 속에서 다시금 즐거운 모험을 떠날 수 있기를, 그런 조금은 이기적인 마음으로 결심했다.

난 다시 게임을… 아니 모험을 시작하고 싶었다. 이번엔 뉴비 플레이어 제이가 아닌 공제희로서.

어쩌면 이 모든 것이 실새삼이 말했던 그 ‘자각’이 아니었나 싶다. 날 보는 실새삼의 눈빛이 더욱 선명해진 걸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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