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2화 (432/604)

꺼지지 않는 불은 <테라리움 어드벤처>에서 자주 봤던 몬스터 불과 비슷했으나 완전히 같은 느낌은 아니었다. 지금 눈앞의 불이 좀 더 본질적으로 원초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정제되지 않은 자연 그 상태의 원소나 다름없으나 이치에서 어긋난 별종. 마치 악마가 장난을 친 것과 같은 불이었다.

어쨌든 꺼지지 않는 불이라면 물로 끌 수 없었다. <테라리움 어드벤처>에서 그랬던 것처럼 불을 무찌르기 위해선 세계수의 직접적인 축복이나… 드라이어드가 필요했다. 하지만 이곳엔 세계수도, 드라이어드도 없었다.

그렇다면 당장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으악!”

“불이 다시 거세진다!”

물 감옥에 사로잡혀 바둥거리던 불이 갑자기 기세를 올리더니 순식간에 틈으로 빠져나왔다. 곧바로 공격을 받을 거라 생각했으나 의외로 불은 내게서 멀어져 도망가기 시작했다. 마치 바람이 부는 방향대로 불길이 번지는 모양새로 불은 삽시간에 거리를 벌렸다.

마을이 화재에서 벗어난 것은 다행이나 불은 경로에 놓인 다른 초목들을 닿는 족족 태워 먹었다. 희생양을 바꾼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이에게 듣기론 이곳 마을의 우물을 틈틈이 이용하러 올만큼 가까운 거리에 또 이웃 마을이 있다고 했다.

불을 잡지 못한다면 또 다른 피해만 발생할 뿐이었다.

“역시 네가 한 일이었구나!”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난리 통에 온몸에 새까만 재 가루를 뒤집어쓴 아이가 밝은 목소리로 날 불렀다. 어찌나 울었던지 얼굴은 눈물 자국대로 길게 재가 지워져 있었다.

“네가 도와줬던 거구나. 고마워!”

너무 늦게 도와준 건 아니냐고 원망할 줄 알았는데 전혀 그런 낌새는 아니었다. 아이는 진심으로 내게 고마워하고 있었다. 날 향한 감사 인사에 가슴속에서 기묘한 감정이 뭉클거렸다. 온몸을 따뜻하게 만들어 주는 긍정적인 감정이었다.

“그거….”

아이는 내 손에 쥔 물건과 완전히 말라 버린 우물을 번갈아 보더니 아쉬움이 담긴 눈으로 빙그레 웃어 보였다.

“어쩔 수 없지. 원래 네 것이니까. 그건 그렇고 이제 불은 완전히 사라진 거야?”

“아니 저쪽으로 옮겨 가 버린 것 같은데.”

내가 불을 완전히 잠재웠다고 생각할 텐데, 실망할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마음을 안고 불이 사라진 방향을 가리키자 아이의 얼굴이 완전히 사색이 되었다.

“세상에, 저쪽은…!”

역시나 그 방향은 이웃 마을이 있는 곳이었다. 아이의 말을 듣자마자 불을 뒤따라 달렸다. 마을을 덮친 화재를 완전히 잠재우진 못했어도 저지는 할 수 있었다. 이웃 마을에 제때 도착해서 불을 다시 사로잡는다면….

불은 다시 도망가겠지. 그럼 난 또다시 쫓아가 사로잡는 데 그치고….

그게 정말 맞는 방안인 걸까? 언제까지 그래야 하는 거지?

타닥타닥.

달리는 내 등 뒤로 작은 발소리가 하나 더 따랐다.

“넌 왜 따라오는 거야? 돌아가! 위험해.”

“하지만… 넌 길을 모르잖아. 넌 나무가 있는 마을 근처를 떠난 적이 처음이잖아. 길이라도 잃으면 어떡해.”

아이는 자신보다 훨씬 큰 나를 걱정하고 있었다.

“난 위험해 보이면 멀리 있을 테니 괜찮아!”

그렇게 말하며 내가 딴소리 못 하도록 날 앞질러 가 버리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따라 뛸 수밖에 없었다.

길을 모른다 하더라도 사방이 불이 남긴 새까만 길이었다. 재가 되어 버린 길만 따라가도 만날 수 있을 터였다.

코가 매울 정도로 주변에 탄내가 가득하여 숨을 쉬기 힘들었다. 아직 남은 열기도 심해서 아이에겐 더더욱 좋지 않은 환경이라 당장이라도 집으로 되돌려 보내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너… 역시 돌아가는 게 좋을 거 같….”

“저기 봐! 불이 크게 났어!”

기어이 이웃 마을을 찾아낸 불이 한바탕 화재를 내고 있었다. 난 손에 물 구슬이 만든 핸드폰을 꼭 쥔 채 아이를 뒤로 보내고 황급히 뛰어갔다.

“이게…!”

그런데 내가 도착하자마자 불은 다시금 자리를 옮기려는지 후퇴하는 양상을 보였다. 전 마을보다 머무르는 시간이 적다고 하더라도 피해까지 작을 거란 법은 없었다. 이런 추격전은 백해무익했다.

불을 완전히 없앨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해!

움찔, 그 순간에 손에 쥐여진 핸드폰에서 미약한 떨림이 느껴졌다.

“넌 언젠가 돌아가야 한다고 했어. 그건 신들이 사는 저기 하늘 위가 맞지?”

불현듯 아이가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내가 당연히 돌아가야 한다는 곳. 어쩌면….

“이곳에서 불을 해치울 수 없다면… 데려가는 게 방법일지도 몰라.”

다시금 멀리 도망가는 불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곳의 내가 돌아가야겠다고 말한 곳이라면 어쩌면 세계수가 있는 <테라리움 어드벤처> 속 세계가 아닐까 싶었다.

내가 당연히 돌아가겠다고 생각했으면 이동 수단이나 방법이 존재할 터. 그렇다면 저 불과 함께 간다면 당장 해치우지는 못하더라도 이곳이 더 피해를 입는 걸 막을 수 있었다. <테라리움 어드벤처> 세계에서 저 정도 크기의 불은 금방 해치울 수 있었다.

마을을 가로질러 불을 쫓아가며 틈틈이 남은 화재의 잔재인 불씨들을 꺼뜨렸다. 이곳은 마르지 않는 우물이 없었기에 차마 손을 쓸 수 없는 사람들의 표정이 더욱 절망적이었다.

“불이….”

불과 몇 분 전에 자신이 살던 마을이 심각한 피해를 입은 걸 보고 또 이웃 마을 역시 참변을 겪은 걸 본 아이의 표정이 상당히 좋지 않았다.

“걱정 마. 불을 해치울… 방법을 찾았어.”

그런 아이에게 조금이나마 위안을 주고자 말을 건넸다.

“어… 어떻게? 하지만 방금 보니까 물을 아무리 뿌려도 불이 꺼지지 않았잖아?”

물을 뿌리치고 도망가는 불의 모습을 본 것이다.

“내가 언젠가 돌아가야 한다고 했지? 그래서 내가 데려가려고 해.”

“네가… 간다고?”

이상하게도 아이의 얼굴이 와그작 일그러졌다. 분명 당산나무 아래서 함께 이야기할 때만 해도 내가 돌아가는 일을 무척 기쁘다는 것처럼 말했던 아이다.

어쩌면 난 되돌아갈 날을 고대하고 있었고 아이 역시 함께 기다려 주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마치… 내가 돌아가는 게 영 탐탁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간신히 도망치던 불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주변에 민가가 없는 대신 논밭이 넓게 펼쳐져 있었는데 불은 막 결실이 영글어가는 작물에 눈길을 뺏긴 것인지 한껏 날뛰고 있었다.

데리고 가야 한다는 선택지는 찾았다. 하지만 그 방법은 아직 알 수 없었다. 돌아가겠노라 마음속으로 수십 번 외치며 얼른 나를 데려가라고 애원했다. 그러면서 임시방편일 뿐이지만 불을 붙잡기 위해 물을 뿜어 불을 칭칭 옭아맸다.

마을에서 했던 것처럼 시간이 좀 지나면 스스로 빠져나올 것이 분명했지만 데려가기 위해선 속박이 필요했다.

피잉.

그때 주머니 속에서 옅은 진동이 느껴지더니 그곳에 넣어 뒀던 새까만 열매가 스스로 빠져나와 허공에 붕 떴다. 이곳으로 넘어온 내가 내 손으로 맺었던, 새까만 빛을 뿜어내는 열매였다.

막 만들었을 땐 별다른 게 느껴지지 않았었는데 지금 이 순간 열렬히 빛을 발산하며 허공에 떠오른 열매를 보니 아주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강렬한 이끌림, 온몸을 차분하게 만드는 따뜻한 포용력. 직감적으로 이 열매가 세계수가 있는 세계와의 어떤 연결 고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넌… 아직 가면 안 돼.”

열매에 막 손을 뻗으려고 할 때 아이가 울음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여기 사람들에겐 네가 필요해. 여긴 오랫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어. 그런데 불도 크게 나고. 그 어떤 때보다도 네가 필요해.”

아이는 애원하고 있었다. 그 말에 무수히 지나쳤던 화재로 인하여 절망에 빠진 사람들의 얼굴이 주르르 떠올랐다.

“조금만… 조금만 더 있어 주면 안 돼? 다들 괜찮아질 때까지. 대신…. 대신 내가 가면 안 될까? 내가 불을 데리고 가면 안 될까?”

“와, 그거 드디어 네가 말했던 때가 된 거 맞지?”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던 아이의 모습은 화재처럼 큰 피해가 일어나기 전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인 것이다. 신처럼 초월적인 존재의 도움이 절실하지 않은, 문제가 생겨도 사람들이 스스로 해결해 나갈 수 있는 상황이었기에 아쉽지만 보내 줄 수 있었던 거다.

나는 이곳에서 마르지 않는 우물을 선사하고 병을 낫게 하며 작물을 건강하게 만드는 열매를 쥐여 줄 수 있는 존재. 화재가 휩쓸고 지나간 지금 시점에서 사람들을 가장 잘 도와줄 수 있는 존재였다.

“넌 안 돼.”

하지만 나 대신 자기가 가겠노라 말하는 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하지만 넌 내가 특별하다고 했잖아. 너와 이야기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나인 건 아주 특별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잖아. 어쩌면 너와 함께 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했잖아! 그럼 내가 대신 가는 것도 가능하지 않아?”

아이는 갑자기 내가 쥔 물의 오랏줄을 뺏으려 달려들며 말했다.

“너 대신 내가 데리고 갈게! 넌 사람들이 살기 좋아지면… 적어도 비가 내린 후에라도…!”

그 순간, 마치 까만 열매가 아이의 외침에 화답하듯 빙그르 돌더니 아이에게로 향했다. 열매의 변화에 아이는 용기를 얻은 것인지 더욱더 내게서 물의 오랏줄을 빼앗아 가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특별하다…? 이곳의 과거의 내가 그렇게 말했다고?

마치 내가 불을 끌고 가는 것 대신 아이도 갈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열매의 화답.

아… 왜 미처 깨닫지 못했을까?

아이에게서 메스키트의 전 주인의 모습을 떠올렸으면서 그녀가 세계수의 축복을 심은 드루이드라는 점을 바로 떠올리지 못했다. 나무의 상태인 나와 유일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존재, 식물과 의사소통이 가능한 드루이드.

세계수의 축복이 그녀의 영혼에 심어져 있다면 세계수가 있는 세계로 향하는 저 ‘연결 고리’에 반응하는 것도 이해가 됐다.

“굳이 네가 희생해야 할 필요는 없어. 어차피 돌아가야 하는 건 결국 내게 정해진 수순이었어. 넌 아냐.”

“아니, 이곳 사람들에게 넌 가장 필요한 존재야. 반면 난 아니야.”

“너 가면 다신 못 올 수도 있어! 여기엔 네 친척들도 전부 있고….”

이웃 마을에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든가 결혼하면 아이는 몇을 낳아 사랑을 가득 담아 키울 것이며 친척 집을 떠나 살게 되는 새로운 집에선 마당에 무슨 꽃을 기르고 싶다는 등…. 그동안 아이가 과거의 나에게 설레는 얼굴로 쫑알쫑알 늘어놓던 이야기들이 스쳐 지나갔다.

“내가 할게. 그게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모두를 지키기 위한 길이니까.”

모두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모든 걸 포기하고 희생하겠노라 말하고 있었다. 아직 마냥 노는 게 좋은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좀 더 이기적으로 굴어도 좋을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성숙한 태도였다.

그 모습을 보며 과거의 내가 아이와 너무 가깝게 지냈다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어쩌면 사람들을 돕는 가치관이 오랜 시간 함께 지나며 옮아 버린 것이 아닐까.

내가 당황하는 사이, 아이는 허공에 떠 있는 열매를 낚아챘다. 그리고 동시에 불을 옥죄고 있는 물의 오랏줄에 손을 대었다.

아이의 손에 쥐어진 열매는 더욱 강하게 새까만 빛을 발하더니 이내 스르륵 껍질이 벗겨지기 시작했다. 까만 빛 속으로 드문드문 황금빛이 드러나며 탈피를 끝낸 열매는 어느새 눈부신 황금빛 열매가 되어 있었다. 그건… 드라이어드 열매였다.

그리고 깨닫자마자 아이는 눈부신 황금빛에 휩싸이며 불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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