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째서 그녀를 이곳에서 이런 모습으로 만나게 된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메스키트의 전 주인은 온전히 그 세계의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무리 눈 씻고 봐도 댕기머리에 한복, 순박한 분위기엔 전혀 위화감이 없었다.
“그럼 그것도 이제 다시 가져가겠네.”
“그거?”
“응, 마을에 있는 그거 말이야. 우물.”
아이는 민가가 있는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마을이 큰 가뭄으로 고생할 때 네가 보물인 화수분을 내어 우물을 만들어 줬잖아.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마르지 않는 신비한 우물을 말이야. 덕분에 옆 마을에서도 그 건넛마을에서도 사람들이 찾아올 정도로 다들 많은 도움을 받았어.”
화수분이라 하면 재물이 끊임없이 나온다는 동화 속 보물단지였다. 그런 게 내게 있을 리 만무…. 불현듯 <무한 다이아>가 스쳐 지나갔다. 설마?
“그래, 가져가야지.”
난 아이가 가리킨 방향을 눈에 똑똑히 담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간다니까 아쉬워. 많이 심심하겠지만 그래도 네가 오랫동안 기다려 온 순간이니까 웃으며 보내 줄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날이 기울었다. 가로등이 존재하여 밤 나들이도 가능한 현대와 달리 지금 이곳은 해가 조금만 떨어져도 진득한 어둠이 물밀듯 밀려왔다.
“이제 가 봐야 할 거 같아. 더 늦으면 엄청 혼날 거야.”
뒤늦게 떠오르는 기억을 훑다 알게 된 사실인데 아이는 부모가 없었고 먼 친척에게 더부살이로 얹혀살던 중이었다. 첫 만남 때 비쩍 골아 골골대던 것도 가뭄이 들어 식량이 부족했던 탓도 있지만 눈칫밥에 그마저도 많이 먹질 못했던 것이다.
더구나 아이는 선천적으로 몸이 아주 약했다. 그 때문에 아이는 안과 밖에서 사람들의 눈엣가시였고 지금의 나와 유일한 친구로 지내고 있었다.
복을 나눠 준다는 내 열매도 굶주림은 해소시켜 줄지언정 태어나기를 약하게 태어난 건 고치지 못했다.
야단맞을까 봐 황급히 길을 내려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내내 입맛이 썼다. 메스키트의 기억 속에서 봤던 전 주인도 꽤나 어린 나이에 삶을 마감했다.
얼굴을 마주했던 그녀는 나와 나이대가 별로 차이 나지 않아 보였다. 메스키트에게 말하던 모습으로 유추해 보면 역시나 선천적으로 몸이 약했거나 큰 병을 앓고 있었을 거다.
어째서 이곳에 있던 그녀가 <테라리움 어드벤처>에서 살게 된 건지는 모르겠으나 저 아이와 내가 봤던 메스키트의 전 주인이 동일 인물이라면…. 나처럼 테라리움 어드벤처 속으로 넘어가게 된 것이라면 좀 더 건강한 몸으로 여행하게 해 줄 것이지 하는 안타까움이 들었다.
밤이 깊고 인적이 뚝 끊겨 주변이 고요해졌다. 달빛만 어스름하게 내려앉아 한 치 앞만 겨우 보일 정도의 까만 어둠 속이지만 무섭진 않았다. 풀벌레 소리가 간간이 세상이 멈추지 않고 흐르고 있음을 알려 주는 시간, 난 내 손에 든 보석 같은 까만 열매를 들고 생각에 잠겼다.
내가 이곳에, 어쩌면 까마득한 과거 속에 오게 된 이유는 뭘까?
아이와의 담화를 통해 엿보게 된 기억들은 전부 내 기억들일까? 아니면 다른 존재의 기억인 걸까? 나와 어떤 연관이 있는 걸까?
‘어머니’의 뜻으로 이곳에 오게 된 빛 덩어리 그리고 그 빛에서 태어난 나무. 등을 기대고 있는 나무의 결을 살살 만져 보았다.
혹시 세계수와 관련이 있는 나무인가 싶다가도 생김새가 전혀 달라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내 기억 속의 세계수는 은빛으로 빛나는 새하얀 가지를 가진 나무였고 이 나무는 어둠에 물든 새까맣고 평범한 나무일 뿐이었다.
아이와 이야기를 나눌 땐 선명하게 떠오르던 감춰진 기억들이 지금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게 답답했다. 이곳은… 난… 대체 뭘까?
“킁킁, 이게 무슨 냄새야?”
사색을 깨는 불쾌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바람이 싣고 온 건 무언가 타는 냄새였다.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 바람이 불어온 방향을 살피니 달빛을 이겨 먹는 환한 불빛과 하늘 높이 까맣게 타오르는 연기가 보였다.
불이 난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방향이 하필이면 아이가 뛰어갔던 마을 방향이었다.
더는 생각해 볼 것도 없이 불이 난 방향을 향해 달렸다.
“물을 더 길어 와!”
“아이고! 아직 사람이 안에 있어요!”
도착한 마을은 이미 아수라장이었다. 마을 안쪽에서 시작한 불이 바람을 타고 삽시간에 번지며 크기를 키우고 있었다. 듣기론 이곳은 오랫동안 가뭄이었다. 마을 어딘가에 있을 내가 선사한 우물이 아니었다면 모두가 버티지 못했을 정도로.
그렇게 바짝 말라 있는 곳에서 화재는 수습하기 힘들 정도로 크게 번져 나갔다.
난 혼란한 사람들 틈에 치이지 않기 위해 멀찍이 서서 이 참상을 손 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곳은 119를 부를 수도 없고 적절한 소방 시설이 마련되어 있지도 않았다. 다들 유일한 수원인 우물에서 겨우겨우 물을 퍼다가 뿌리는 것이 전부였다.
화르륵.
순식간에 집 한 채를 집어삼킨 불이 괴물처럼 타올랐다. 그리고 난 새빨갛게 타오르는 그 거대한 불을 보며 기시감을 느꼈다.
그럴 리 없지만, 그래선 안 되지만… 불은 마치 간만의 포식에 기뻐하는 감정 따위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처럼, 내가 <테라리움 어드벤처>에서 숱하게 봐왔던 그 ‘불’처럼 느껴졌다.
사방에 치솟는 불길, 고통과 혼란에 몸부림치는 사람들. 눈앞의 참상이 불과 며칠 전의 급박했던 그날의 기억들까지 들춰낸다. 불은 항상 재앙을 낳는다.
“으아앙!”
“엄마! 아빠!”
난리 통에 부모를 잃은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내일도 다시 오겠노라 웃으며 집으로 돌아갔던 그 아이의 신변이 걱정되었다. 하지만 유일한 친구라 말하면서도 난 기이하게도 아이의 이름조차도 몰랐다.
“어떻게… 어떻게 해야….”
문득 내가 마을에 선물했다는 우물이 떠올랐다. 비록 그땐 세계수 가지의 힘을 빌렸지만 내가 스텔라의 힘을 저지하기 위해 넓은 지역에 비를 내린 적이 있었지. 그래서 어쩌면 뭔가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우물을 찾아 달렸다.
그곳은 이미 물을 퍼 올리기 위한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화재가 걷잡을 수 없도록 커지자 도망가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어떻게든 끄기 위해 끝까지 남아서 노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악착같은 모습에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한 그들의 절실한 마음이 절절하게 느껴졌다.
사람들 틈에 끼어 우물에 손을 대려다 문득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여기까지 올 때까지 기이하게도 사람들이 나를 인식하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마치 주변 환경에 녹아든 유령처럼 우물에 손을 댈 때까지 나를 쳐다보는 사람도 부딪히지 않으려 피하는 사람도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우물에 도달하는 건 아주 수월했다.
여러 사람이 달라붙어도 자리가 남을 정도로 상당히 커다란 우물이었다. 돌을 쌓아 올려 둥글게 우물 벽을 만들었고 깊이가 가히 가늠이 되지 않을 정도로 아주 깊었다. 새까만 물속으로 시도 때도 없이 두레박이 떨어졌고 출렁이는 물을 퍼 올렸다.
오가는 사람들이 들고 있는 물동이만 봐도 벌써 우물 한 개를 다 비웠을 양인데 절대로 마르지 않는 우물이라던 말답게 우물은 계속 그대로의 물 높이를 유지했다. 난 새까만 물을 바라보다 홀린 듯 손을 뻗었다.
그러자….
“아니…! 물이… 우물이…!”
“우물이 모두 말라 버렸어!”
“세상에… 갑자기!”
비통 섞인 혼란에 빠진 아우성이 우물가를 휩쓸었다. 내가 물을 향해 손을 뻗자 거짓말처럼 찰랑이던 모든 물이 사라지고 우물은 바닥을 보일 정도로 메말라 버렸다.
난 내 손에 들린 푸른빛의 둥근 구슬을 당황한 눈으로 바라봤다. 야구공 정도 크기의 구슬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내 손 안에서 쉼 없이 찰랑거리고 있었다. 아주 익숙한 기운이 느껴지면서도 생소했다.
촤르륵!
물의 구슬은 내 손에서 천천히 기운을 더해 가며 요동치더니 어느새 바다도 주체할 수 없을 듯한 파도가 되어 마을을 집어삼킨 불을 향해 퍼져 나갔다. 예상했던 것처럼 비가 내리는 건 아니었지만 불길을 향해 쏘아지는 소방 호스의 물줄기처럼 세차게 나아갔다.
그러곤 화기를 잠재울 뿐만 아니라 ‘사로잡았다’. 꿈틀대는 불을 올가미처럼 엮어 옴짝달싹도 못 하도록 움켜쥐었다.
놀라운 변화에 사람들은 기적이 일어났다며 당산나무가 있는 방향을 향해 만세를 부르고 절을 했다. 비록 마을의 3분의 1이 화마의 피해에 온전하지 못했고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자칫 잘못했다간 옆 마을과 뒷산까지도 집어삼킬 뻔했던 큰 불이었다.
난 마구 날뛰는 물의 구슬을 보며 지나치게 낯익은 기운에 침착하게 이를 살폈다.
그 기운은… 나였다. 이 물의 구슬은 내 생명력이었다. 난 <무한 다이아>의 다이아들을 수없이 많이 생명력처럼 써먹으며 내게 온전히 동화되어 버린 그 기운을 기억한다. 그리고 난 이걸 뜻하는 표현도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샘의 원천.’
세계수가 살피는 곳곳에 결코 마르지 않는 샘으로 흩어져 있으며 수많은 베스탈리스들의 종족 보존을 도운 그것. 물의 기운이 강하게 응집되어 태동하는 생명들을 보살피는 파장이 느껴졌다.
그리고 또 하나.
불을 사로잡으며 꾸물꾸물 요동치던 구슬이 익히 내가 알고 있는 형태로 돌아갔다. 손안에 폭 들어오는 직사각형 모양의 물건. <무한 다이아>가 들어 있는 내 핸드폰이었다.
내가 세계수가 뿌린 수많은 샘의 원천 중 하나를 다루느냐, 그건 아니었다. 내가 나의 생명력을 이용해 스스로 샘의 원천을 만들어 낸 것이 맞았다.
애쉬와 미미르의 탄생에 기여한 샘의 원천은 불의 기운을 이기지 못해 사그라들거나 겨우 누르는 데에 그쳤었다. 이건 그런 조악한 기운 따위가 아니었다.
생명이 자라는 데엔 많은 것이 필요하다. 고른 땅, 따뜻한 햇빛, 선선한 바람 그리고 물. 세계수는 그 세계에서 생명을 창조하고 보살피는 존재. 모든 요소들을 비롯하여 물 역시 세계수가 다루는 권능이었다.
그러니 세계에 퍼진 샘의 원천은 세계수의 생명력, 아니 축복의 힘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마치 팔이 여러 개인 신이 세상을 창조할 때 사용한 보물들을 한 손에 하나씩 들고 있는 형상과 같았다.
얼핏 베스탈리스들과 세계수 사이에 생긴 말도 안 되는 골에 대한 아이러니함을 깨달은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저 불은 왜 꺼지지 않는 거지?”
물을 흠뻑 맞고도 여전히 꺼지지 않는 기이한 불을 향해 의문이 가득한 소리들이 웅성웅성 떠는 게 들려왔다. 난 내 손에 들려 있는 생명력이 가득 담긴 핸드폰을, 아니 나 자체를 탐욕스럽게 바라보는 불을 바라보며 지금은 다른 생각을 할 때가 아니란 걸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