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0화 (430/604)

깜짝 놀라 진동이 울리는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착각이 아니었다. 핸드폰은 내 손에서 세차게 진동하고 있었으나 이상하게도 전원 버튼을 아무리 눌러도 화면이 켜지지 않았다.

그러다 갑자기 진동이 뚝 끊겼고 놀랍게도 새까만 화면에서 언뜻 누군가의 얼굴이 비쳤다가 사라졌다.

꾸물꾸물.

“뭐야, 이거…!”

노란 실 같은 줄기가 꾸물꾸물 화면에서 기어 나와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처음엔 당황했으나 이윽고 그것이 실새삼의 줄기였음을 알아보았다.

“너무 늦으면 찾아오겠다더니… 설마?”

핸드폰에서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오는 버석하고 노란 줄기는 내가 딛고 선 바닥을 기며 어딘가를 향해 뻗어 나갔다. 틈틈이 경로에 놓인 식물들을 휘어잡아 엮는 모습이 소름 끼치게 느껴졌다. 실새삼이 한 번 창궐하면 그 일대가 고사한다고 했는데!

“실새삼이야? 맞지? 내 말 들려?”

핸드폰을 향해 아무리 그를 불러 봐도 대답이 없었다. 실새삼의 모체는 내 말을 무시한 채 그저 어디론가 계속 퍼져 나가기만을 반복했다.

다만 방사형으로 뻗어 나가는 것이 아니라 나를 기점으로 일직선으로 쭉 나아가고 있기에 문득 실새삼이 나를 이끄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할 수 없이 그의 응답을 기다리는 걸 멈추고 노란 실 줄기를 따라 나아갔다.

냇가를 따라 상류를 걷는데 멀리 넓게 가지를 뻗은 거대한 나무가 보였다.

할머니 댁이 있는 마을에서 가장 거대한 나무라고 하면 언제부터 뿌리 내렸는지 모를 당산나무밖에 없었다. 장정 다섯이 팔을 길게 뻗어야 겨우 껴안을 수 있는 굵기에 어지간한 집의 지붕보다 넓게 퍼진 나뭇가지.

마을에 무슨 일이 있으면 무당을 불러다 이 나무에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말로만 들었지 직접 당산나무를 보는 건 처음이었다. 오랜 세월을 자란 나무는 영험한 힘을 가져 마을을 지키는 신처럼 여긴다고 했던가.

실새삼은 그곳에 도달해서야 겨우 성장을 멈췄다. 나무의 수분까지 빨아먹을 기세로 달려들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나무의 기둥과 가지엔 흰 천을 엮은 새끼줄이 묶여 있었고 근처엔 앉아서 쉴 수 있는 작은 정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어째서 실새삼이 이곳으로 날 이끈 지는 알 수 없었지만 너무 늦는 날 재촉하기 위해 왔다면 저 나무가 나와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할아버지의 꿈에 나왔다던 나무. 황금빛 열매를 잔뜩 맺은 후 메마른 땅 위로 우수수 떨어뜨렸다는 그 나무.

더 가까이 다가가자 두꺼운 나무껍질 위로 다닥다닥 초록색 이끼들이 붙어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위로 홀린 듯이 손을 대어 보았다.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래서 이번엔 열쇠 문신이 있는 왼손을 들어 갖다 대어 보았다. 그러자….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거대한 나무를 훑고 지나갔다. 머리 위로 굉장히 많은 나뭇잎들이 서로 부딪히며 시끄러운 소리를 내었다. 마치 내게 나무가 말을 거는 것처럼…. 수없이 재잘거리는 소리.

‘늦었구나.’

그렇게 말한 것 같기도 하다.

나무를 짚은 손에서 시작된 기묘한 감각이 내 온몸을 훑었고 잠깐 시야가 점멸했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정신을 차렸을 땐 마치 다른 세상에 온 것처럼 주변 환경이 달라져 있었다. 당산나무와 정자를 제외하곤 우뚝 솟은 것이 없어 탁 트였던 주변이 높다란 나무로 가득 차 있었다.

당산나무의 모습도 많이 달라 보였다. 우뚝 솟은 거대한 나무는 처음 봤던 것과 달리 많이 작아 보였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혹시 실새삼이 관여를 했나 싶어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카펫처럼 깔렸던 노란 실 줄기들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들고 있던 핸드폰도 어디론가….

저벅저벅.

근처에서 발소리가 들려 놀란 마음에 일단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아버님께서 많이 아프십니다. 의원님을 모셔다 살펴봐도 병명을 알 수 없습니다. 부디 아버님께서 병을 이겨 내고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 있도록….”

바로 곁에서 멈춘 인기척은 내가 있는 곳을 향해 절실한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슬쩍 나무 옆으로 고개를 빼어 살피니 머리를 틀고 사극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생소한 의복을 입은 여인이 납작 엎드려 있었다.

이게 다 뭐람?

기도를 끝낸 여인이 멀리 떠난 후에야 나무 뒤에서 나올 수 있었다. 이전에는 없던 과일 몇 개가 정성스레 나무 앞에 놓여 있었다.

한참을 지금 상황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데 또다시 발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먼젓번보다 가볍고 빈도가 높은 걸 보니 어린아이의 발소리처럼 느껴졌다. 이번 방문만 피했다가 할머니 댁이 있는 곳에 가 볼까 하는 생각에 나무 뒤로 숨었는데.

“나 왔어!”

놀랍게도 발소리의 주인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내가 숨은 나무 뒤로 찾아와 인사를 건넸다.

“늦어서 미안해! 많이 심심했지? 네가 부탁한 걸 다 알아보고 오느라….”

색이 바랜 한복을 입은 어린 여자아이였다. 처음 보는 것이 분명한데 얼굴이 묘하게 낯이 익었다. 조금만 더 기억을 뒤져 보면 떠오를 것 같기도 한데….

“심한 병에 걸린 집은 저쪽…. 아랫마을에 달거리를 심하게 앓는 아기가…. 파종을 해야 하는데 시기가 지나도….”

아이는 달리 내가 답을 하지 않아도 혼자서 열심히 떠들어 댔다. 주제는 사람들이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에 대한 것들이었다.

“이거면 돼? 이번에도 도와줄 거지?”

“…….”

어떻게 하지? 난 오늘 처음 만난 게 분명한데 아이는 이미 오랜 시간 동안 날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러니 같이 아는 척을 해 줘야 할지 아니면 솔직하게 모른 척을 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콜록콜록!”

갑자기 심하게 기침을 하는 아이에게 반사적으로 손을 뻗으니 괜찮다는 듯이 손사래를 친다.

“아, 급하게 오느라 이런 거야. 걱정하지 않아도 돼.”

하지만 단순한 기침이라기엔 아이의 얼굴은 핼쑥했고 가슴께를 꾹 누르고 있는 모습도 신경 쓰였다. 아마도 이 아이는 아픈 구석이 있는 게 분명했다. 걱정스러운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으니 아이가 의아한 눈으로 날 올려다본다.

“오늘 너 평소와 좀 다른 것 같아.”

대체 내게서 누구를 보는지는 모르겠지만 눈치가 상당히 빨랐다.

“음….”

“혹시 뭔가 더 기억나서 그런 거야?”

은근한 기쁨이 담긴 기대하는 표정.

“우리 이야기 좀 할까?”

“난 얼마든지 좋아!”

내 물음에 화색을 띠며 답한다. 그러곤 잠시 기다리라더니 나무 앞에 바쳐진 과일들을 한 아름 품에 안고 돌아와 내게 하나를 건넨다. 그러곤 과일을 건네자마자 털썩 내 옆에 주저앉아 나무에 등을 기댔다.

“이거 먹으면서 이야기하자. 오늘도 마을을 돌봐주는 네게 감사하며 바쳐진 거야.”

난 얼떨결에 잘 닦인 배를 하나 받아 들고 머리를 열심히 굴리며 상황을 정리했다. 나무에 기도를 드리고 간 여인, 제물로 바쳐진 과일을 내 것이라 말하는 아이. 얼추 지금의 내 역할이 뭔지 가늠은 됐다. 혹시 내가 당산나무가 된 건 아닐까?

“많이 배고파 보이는데 내 것까지 네가 다 먹으렴.”

허겁지겁 껍질 채로 과일을 베어먹는 아이를 보며 내가 가진 탐스러운 배를 넘기자 침이라도 뚝뚝 흘릴 것 같은 얼굴이 된다. 내면에서 받아선 안 된다는 자아와 받자는 자아가 매몰차게 싸우는 게 분명했다.

“어서. 그리고 다 먹으면 내게 네가 알고 있는 나에 대해 이야기해 주겠니?”

좀 해괴한 질문이긴 했다. 서로 잘 아는 사이인 듯한데 뜬금없이 나에 대해 알려 달라니.

“그렇게 하면 네게 도움이 될 수 있어?”

“물론.”

하지만 아이는 과하게 의심하지 않았다. 내가 하는 건 모두 합당한 뜻이 있을 거라 생각하는 태도였다. 난 열심히 과일을 먹는 아이의 옆에 똑같이 앉아 나무에 등을 기댔다. 내가 들고 있던 핸드폰은 어디론가 사라졌지만 이상하게도 옷은 그대로였다.

“난 사실 너에 대해 그렇게 많이 알지는 못하지만… 네가 내게 해 준 이야기를 다시 해 주는 거나 다름없는데 괜찮아?”

“전부 들려주렴.”

“내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에 그러니까 이곳에 마을이 생기기도 전부터 네가 여기 있었다고 했어.”

그 말을 듣자 머릿속에 내가 모르는 기억이 불쑥 재생되었다.

아주 까마득한 옛날, 난 빛 덩어리였다. 어디서 날아온 건지 알 수 없는, 바람을 타고 흐르고 흘러 도달한 꽃씨처럼. 첫 기억의 시작이 땅에 푹 박혀 있는 작은 빛 덩어리였다.

밤낮이 셀 수 없이 많이 바뀌고 비가 내리고 눈이 내리는 등 계절도 많이 바뀌었다. 그리고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는 봄날, 빛 덩어리에 작은 변화가 생겼다. 작은 싹이 튼 것이다.

“내가 왜 이곳에 왔냐고 물어보니까 네가….”

아무래도 내가 이곳에 온 건 다 어머니의 뜻일 거야. 세상에 축복의 힘이 닿지 않는 곳이 없도록 하라는 게 어머니의 뜻이었거든.

싹은 자라고 자라 나무가 되고 세상이 바뀌어 가는 수많은 과정을 눈에 담았다. 어느새 주변의 가장 오래된 나무가 되었을 땐 갑자기 사람들이 찾아와 기도를 하고 가기도 했다. 난 찾아온 모든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말을 걸었지만 아무도 알아듣지 못했다.

찾아오는 사람은 많아도 외롭고 쓸쓸한 마음이 가득할 즈음 이 아이가 꾀죄죄한 몰골로 찾아왔다.

“혹시 제게 말을 하신 건가요? 신령님.”

그것이 아이와의 첫 만남이었다. 유일하게 나와 말이 통하는 어린아이.

“먹을 게 없어서 굶어 죽기 직전이었는데 네가 내게 열매를 줬어.”

아이는 부디 살려 달라고 없는 힘을 쥐어짜 내게 기어 온 것이었다. 열매를 줬다고 했던가? 기억 속의 내가 아이의 부탁에 망설임 없이 손을 뻗었고 어느새 내 손엔 황금빛으로 가득 찬 열매가 있었다. 잠시 망설이던 아이는 황급히 내게서 열매를 받아 가 허겁지겁 먹어 치웠다.

열매를 먹자 피골이 상접했던 아이는 놀랍게도 살이 오르고 죽어 가던 두 눈에 생기가 돌아왔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아이의 경험이 입소문을 타고 널리 퍼져 더욱 찾아오는 사람이 늘었고 그때마다 난 아이에게 했던 것처럼 열매를 맺어 건넸다.

열매는 복덩어리였다. 병상에 누워 있던 사람도 일으키고 사람뿐만 아니라 가축도 식물도 살려 냈다.

하지만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난 더 이상 열매를 맺을 수가 없었다. 무수히 많이 찾아오던 발길도 점점 줄어들었지만, 아이는 꾸준히 날 찾아와 시시콜콜 사람 사는 이야기를 전해 주었고 유일하게 말이 통하는 상대였기에 어느새 서로 친구가 되었다.

“넌 언젠가 돌아가야 한다고 했어. 그건 신들이 사는 저기 하늘 위가 맞지?”

아이는 하늘 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손으로 열매를 맺을 수 있었던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며 손을 내밀자 놀랍게도 내 손안에 작은 열매가 담겼다. 다만 황금빛이 아니라 반짝이는 까만 빛이었다.

“와, 그거 드디어 네가 말했던 때가 된 거 맞지?”

열매를 보고 좋아하는 아이의 얼굴을 보자 불현듯 그 얼굴이 누구였는지 기억이 났다.

“제희야, 왜 이제 왔어.”

메스키트의 기억 속에서 봤던 그녀의 전 주인의 얼굴과 놀랍도록 많이 닮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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