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9화 (429/604)

오랜만에 도착한 할머니 댁은 예상했던 대로 공기가 훨씬 나았다.

비록 <테라리움 어드벤처>에 있을 때보단 못하지만 실시간으로 땅에 즐비한 식물들이 내뿜는 공기가 무척이나 상쾌하게 와닿았다. 할머니께 붙잡혀 포옹 세례와 푸드 러시를 받고 나니 금세 중천에 떠 있던 해가 많이 기울었다.

이곳은 밤이 되면 불빛이 적어 돌아다니기 힘들었기에 더 늦기 전에 문제의 태몽 속에 등장했던 냇가를 방문하기 위해 움직였다.

자박자박, 덜 포장된 길을 걷고 있자니 드라이어드들과 함께 걸었던 길들이 떠올랐다. 그곳은 아스팔트 길이 없기에 항상 신발에 흙과 자갈이 툭툭 걸렸는데.

게다가 땅의 높낮이가 고르지 않아 비가 내리면 진창이 되고 웅덩이가 생겨 신발 밑창이 잔뜩 더러워졌으나 그런 것쯤은 상관도 하지 않고 걸었었다. 현실이었다면 신발 세탁할 일에 골머리를 앓았을 텐데 말이지….

냇가가 있는 곳은 할머니 댁에서 좀 더 걸어 작은 뒷동산이 있는 곳까지 가야만 했다. 담벼락을 세운 집들이 줄고 논밭의 영역도 끝나고 마구잡이로 피어난 야생화와 수풀들이 가득한 공간에 들어섰을 때였다.

수군수군….

어디선가 아주 작게 속닥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라 주변을 둘러봤는데 이 시간에 이곳을 걷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었기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뭐야, 설마 귀신?

소곤소곤….

여럿이 모여 떠드는 소리는 묘하게 기운이 없었고 걱정이 가득했다. 다만 아직까지 휙 둘러본 내 시야에 목소리의 주체들은 보이지 않았기에 바짝 얼어 걷던 것도 멈추고 다리에 힘을 줬다. 여차하면 왔던 길을 다시 뛰어갈 생각으로 준비 중인데….

“이를 어째….”

“비가….”

“물이 너무 마시고….”

소음을 내던 내 발소리마저 사라져 적막한 가운데 작은 목소리들에서 흐릿하게나마 단어들을 캐치해 낼 수 있었다. 더구나 집중하다 보니 묘하게 소리의 근원지가 매우 ‘낮다’는 걸 느꼈다. 마치 무릎 아래의….

“못 버틸 텐데.”

“어쩌면 좋아. 비가 내린 지 오랜데 곧 말라 죽겠어.”

휙 고개를 돌려 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잡아냈다. 그곳엔 여전히 사람이나 기계 따위는 없었지만 쓰러진 거목이 하나 보였다.

가까이 가 볼까, 말까? <테라리움 어드벤처>였다면 곁에 드라이어드들이 있으니 좀 더 과감한 선택을 해 봤겠지만 지금의 난 혼자고….

만약 저게 귀신이 내는 소리라면 반응해 주면 큰일 난다는데….

“바로 옆이 물인데 어쩜 좋아.”

“큰일인데. 쟤들은 여려서 더 못 버틸 거야.”

그 내용들이 너무 딱한 데다 묘하게 친근한 기운도 느껴져서 차마 모질게 발길을 돌릴 수가 없다는 게 문제였다. 할 수 없이 비상시를 대비해 핸드폰을 꺼내 긴급 연락처를 띄워 두고 조심히 소리가 난 방향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하필이면 물길을 막아서….”

“앗, 저기 사람이 온다.”

흡, 내 기척을 들켰다! 여전히 사람은 보이지 않아도 누군가는 내가 오고 있다는 걸 봤다는 뜻이니 등에 식은땀이 났다. 어쩌지? 이대로 도망가 버릴까?

“도와주지 않으려나?”

“하지만 방치된 지 너무 오래됐고….”

내 도움이 필요한 건가? 갑자기 네 목숨을 내놔! 이러진 않겠지…?

쓰러진 나무 근처에 다다르자 주변에 졸졸 흐르는 물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근방의 냇가에서 파생된 물줄기가 여기까지 흐르는 것이 분명했다. 멀지 않은 곳에 하수도가 존재했다. 물이 넘칠 때를 대비해 마련해 둔 게 분명했지만 물소리와 거리가 꽤 된다는 게 의아했다.

“아, 여기 원래 이쪽으로 물이 흘렀구나.”

그래서 혹시나 싶어 쓰러진 거목 쪽을 자세히 훑어보니 오랫동안 물이 흘렀다는 걸 알려 주듯 물길이 나 있었다. 비록 지금은 나무와 돌에 막혀 끊겨 버렸지만. 막힌 바람에 물길이 바뀐 것이 분명했다.

주변에 물길이 막히기 전 수혜를 보던 식물들이 꽤 있었는지 말라서 흰 흙을 드러낸 땅엔 곧 죽을 것처럼 시들시들한 화초들이 많이 보였다.

“물을 주고 갔으면 좋겠다.”

“조금이라도 좋으니… 한 모금이라도….”

나는 비로소 느껴지는 이 이질감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설마… 지금 내가 식물들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 거야?”

낮은 곳에서 들리는 소리, 기가 막히게 상황을 알아들은 나.

물론 그동안 숱하게 꽃들과 의사소통을 해 온 나였지만 그들의 모체가 아닌 드라이어드들과 이야기해 왔고… 더구나 여긴 <테라리움 어드벤처>가 아니잖아? 난 드루이드 제이가 아닌 그냥 평범한 공제희인데?

내가 입을 열자마자 시끌시끌하던 주변이 일제히 뚝 입을 다물어 버렸다. 덕분에 졸졸 흐르는 물소리만이 소리를 좀 더 키우게 되었다.

“하….”

일단 핸드폰 화면을 끄고 주머니에 넣었다. 일단 귀신…은 아닌 것 같으니까.

“혹시… 너… 너희 내게 말을… 하, 아니다, 됐다.”

아래의 식물 중 하나에 말을 걸어 보려다가 문득 현타가 와서 입을 다물었다. 계속해서 목소리가 들리면 또 모르겠지만 지금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한마디도 안 하니까.

혹시 지금 내가 너무 <테라리움 어드벤처>에 대한 스트레스를 들은 나머지 환청을 들은 건 아닌가 싶기도 했다.

“그래, 보통은 환청… 을 먼저 생각하지. 뭐가 신나서 식물들이랑 이야기할 수 있는 거 아니냐고 들떴던 건지. 여긴… 아니잖아.”

더구나 식물들이 말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거짓말처럼 두려움이 확 사라진 게 어이가 없기도 했다.

어쨌든 환청이든 아니든 본래 있던 물길이 끊긴 바람이 이 구역이 고생을 겪고 있단 걸 알았으니 조금 도와줘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핸드폰을 꺼내 확인해 보니 당분간 이 근방의 비 소식도 없는 듯했고 내버려 두면 말라 죽을 게 분명했다.

이쪽은 물이 부족해 곤란을 겪고 있다면 물길이 새로 생긴 다른 쪽은 물난리로 고통받고 있으려나?

쓰러진 거목은 썩어서 밑동부터 넘어간 바람에 내 힘으로 옮기는 것은 도저히 무리였다. 더구나 도로나 인도와 거리가 먼 곳이라 이곳의 주민들도 굳이 나무를 치우지 않고 방치해 둔 것이 분명했다.

다만 나무가 쓰러지고 구르며 주변을 뭉개 자체적으로 작은 댐을 만들었는데, 나무 아래의 돌과 흙을 치워 낸다면 다시 물길을 뚫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비탈길을 올라 먼저 크고 작은 돌들을 치워 내니 확실히 틈이 보였다. 단시간에 더러워진 내 맨손을 보며 평소라면, 보통의 나라면 나이 먹고 하지 않았을 흙장난에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더러워질 옷도 걱정되고…. <테라리움 어드벤처>에서는 잘만 흙바닥에 누워 잤었지.

주변에서 굵은 나뭇가지를 주워다 진흙을 긁어냈지만 물길은 돌아오지 않았다. 나무가 쓰러진 지점보다 더 위쪽으로 올라가니 물길이 끊기며 약해진 물살 때문에 쓰레기나 낙엽들이 뭉쳐 1차 수벽을 만든 곳이 보였다.

흙먼지가 잔뜩 낀 비닐을 주워 쓰레기와 낙엽을 담아 치우자, 비로소 물길이 나무가 쓰러진 곳까지 뚫려 내가 만든 수로를 따라 아래로 흐르는 것이 보였다.

잠시 비닐봉지를 내려 두고 흙탕물에 대충 손을 씻고 있는데 끊겼던 목소리가 다시금 들렸다.

“살았다! 물이 다시 흐른다.”

“드디어 살 것 같아.”

처음 들었던 것보다 기운이 생기고 기뻐하는 말투였다.

“도와줬어.”

“착하다.”

핸드폰으로 녹음하려고 해 봤자 안 되겠지.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안녕?”

난 유독 발랄하게 떠들고 있는 작은 꽃에 다가가 도박하는 심정으로 말을 걸어 보았다.

“안녕.”

마침내 꽃이 내게 답인사를 해 줬을 때 머릿속에 벼락이라도 내리꽂힌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난 더 이상 대화를 이어 나가려 하지 않고 내려뒀던 비닐봉지를 다시 주워 들었다. 그리고 그 자리를 빠르게 떠났다. 등 뒤로 신이 나서 속닥거리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내가 말을 걸었다는 것에 대해 언급하는 목소리는 없었다.

그게 맞았다. 원래 인간과 식물을 대화할 수 없으니까. 하지만… 난 겨우 답인사 정도지만 대화를 나눴다. 마치 <테라리움 어드벤처>에서 그랬던 것처럼.

어쩌면, 좀 더 이야기를 나누면 더 확실히 알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쩐지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익숙한 느낌에 좋아할 땐 언제고 답인사를 듣자마자 삽시간에 가슴속에 차오른 불안감에 당황스러웠다. 난 대체 뭘 불안해하고 있는 걸까?

냇가에 가까워질수록 시원하게 흐르는 물소리가 들렸다. 좀 전에 들었던 작은 물줄기가 내는 소리와는 차원이 다른 상쾌함이었다. 하지만 막상 냇가에 도착하니 갈피를 잃었다. 태몽에 나왔던 냇가에 도착하면 뭔가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주변에 엄마가 말했던 황금빛 열매를 맺는 나무는커녕 수상해 보이는 나무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냇가 근처에 커다랗고 평평한 바위를 위에 걸터앉아 잠시 흐르는 물소리를 들었다. 청량한 소리는 차분히 내 머릿속을 정리해 줬다.

어쩌면 난 찾기 위해 이곳에 왔는지도 모른다. 내가 <테라리움 어드벤처>에 가야만 하는, 가라고 등 떠밀어 줄 수 있는 당위성을 말이다. 가뿐히 현실을 버리고 게임 속 세상을 선택할 수 있도록 외면하기 힘든 사명 같은 걸 발견하기를 기대했는지도 모르지.

나도 혜리의 의견과 다를 바 없었다. 게임 속으로 보내 준다고 하면 당장이라도 좋다고 받아들일 것 같으면서도 막상 가려니 걱정이 된다. 이곳엔 내가 평생을 살아온 모든 것들이 존재했다. 게임 업적처럼 대단하게 표현할 건 없지만 초중고를 졸업하고 사회의 첫 문턱이라고 말하는 대학까지 왔고 다음 문턱을 넘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쏟아부어 만든 결과물들…. 꽤나 열심히 살아왔기에 단번에 포기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하… 그러고 보니 웃기네. 이렇게 계속 고민해 봤자 ‘테라리움 어드벤처’에 다시 돌아가고 싶다고 바로 갈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어쩌면 다시 돌아가지 못할 수도….”

무한 다이아가 있는 핸드폰도 먹통이 된 마당에 유일한 연결고리라곤 왼쪽 손목의 열쇠 문양뿐.

내가 현실에 대한 고민과 같은 중요도로 고민하고 찾아봤어야 하는 것이 바로 <테라리움 어드벤처>로 돌아가는 방법이었다.

“어쩌면 내가 계속 이런 미적지근한 마음만 품고 있으니 입구도 안 보이는 게 아닐까?”

돌아가고 싶다고 강렬히 염원하는 것도 아니며 한편으론 이대로 돌아갈 방법을 찾지 못하면 순응하고 살겠다는 작은 마음까지 존재했다.

그때였다.

웅웅.

예전 핸드폰을 넣어둔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먹통이 되어 작동될 리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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