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의 모험이 꿈처럼 느껴지는 현실을 보내고 있는데 내 몸에 각인된 기억들은 놀랍도록 생생하다. 그건 마치 완료되지 않은 퀘스트처럼 시야 한쪽에서 계속 날 괴롭히는 것과 같았다. 그래서 더욱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테라리움 어드벤처>를 떠올릴 때마다 현실의 죄책감이 더욱 무겁게 날 짓눌렀다. 자꾸만 현실을 버리고 넘봐선 안 될 것을 넘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어쩌면 바곳이 운명의 실을 끊어 낸 결과가 제이와 나를 분리시킨 것으로 나타났기에 더욱 그런 마음이 드는 게 아닐까?
적당히 한산한 식당에 들어가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는 도중 때를 놓치지 않고 자동 전투를 돌리기 위해 핸드폰을 꺼내는 혜리를 보며 물었다.
“혜리야, 만약에 우리가 했던 게임 중 하나 선택해서 그 게임 속에서 살게 해 준다면 넌 어떡할래?”
“응? 갑자기? 하다 하다 이젠 게임에서 살고 싶다는 소리까지 하네.”
몇 번의 조작으로 게임 세팅을 끝낸 혜리가 내 질문에 턱을 괴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내가 고를 수 있는 거야? 그럼 완전 개이득인데. 일단 소울라이크 게임은 거르고. 귀신이나 좀비 나오는 공포 게임도 거를래. 완전 지옥이잖아. 힐링 게임 중에서 고르는 게 좋겠지? 평화롭게 농장 가꾸는 시뮬 게임들이 좋을 것 같은데. 아, 그러고 보니 나 어릴 때부터 포켓몬 세계에서 사는 게 꿈이었어!”
혜리가 거른 게임들을 듣다 보니 나도 머릿속에 절대 가고 싶지 않은 게임 세계관들이 떠올랐다. <테라리움 어드벤처>에서 죽을 뻔한 고비를 많이 넘기긴 했지만 그 게임들에 비하면 천국이었다. 새삼… <테라리움 어드벤처>에 끌려간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그럼 게임 속에 당장 보내 준다 해도 갈 거야?”
“당연한 거 아냐? 그럼 학자금 대출도 안 갚아도 되고 취업 준비도 안 해도 되잖아.”
문득 게임 속임에도 불구하고 빚에 힘겨워하던 루프와 과수원에 취직하기 위해 입사 지원서를 보내고 시험에 참가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떠올랐다. 그곳에서도 이곳과 다를 바 없이 치열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비록 그곳에선 내가 꽃밭 속에서 모험이 가득한 생활을 하긴 했지만 만약 드루이드가 아니었다면 현실의 나와 다를 바 없는 플레이를 하지 않았을까? 어쩌면 드루이드가 된 것부터 특혜 같은 것일 수도 있으니까.
생각해 보면 그곳에선 이곳보다 좀 더 판타지가 가득한 특별한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다른 세계에서 온 나에게나 특별해 보이지 원주민들에겐 일상이나 다름없겠지.
반대로 그들이야말로 이곳 세계를 엿보게 된다면 이쪽이 더 판타지스럽다고 여길지도 모르겠다. 드라이어드가 없고 연금술도 없으며 세계수와 같은 신이 없는 세계….
“아니다. 그럼 앞으로 내 가족들이나 친구들은 못 보게 될 수도 있는 거 아냐? 당장은 좀 그렇고 현실을 좀 정리할 시간을 주면….”
농담으로 여길 법한 주제를 갈수록 진지하게 고민하는 그녀를 보며 쟤도 많이 힘들구나 싶었다. 하긴 내가 바쁜 만큼 같은 사정인 혜리도 바빴다. 힘든 현실을 벗어날 수 있다는 건 꽤나 달콤한 제안이긴 했다.
“그래서 결론은… 난 그냥 게임 속으로 안 갈래. 내가 23년 동안 살면서 열심히 한 인생이 조금 아깝기도 하고. 차라리 더 어릴 때 갔다면 아쉽지라도 않지. 내가 이 대학 오려고 그 고생을 하고 학점도 잘 받고 자격증도 따려고 그렇게 노력했는데 다 물거품이 될 걸 생각하니 아깝기도 해. 물론 우리 엄마 두고 가는 것도 마음이 걸리네. 그런데 갑자기 이런 질문은 왜 한 거야? 너 많이 힘들구나….”
“아니 뭐… 다른 사람 생각은 어떤가 해서. 그냥 인터넷에서 우연히 본 거야.”
결국은 현실이 족쇄라는 거다. 완전히 다른 삶이 기다리는 공간. 혜리의 이야기를 들으니 더욱 더 <테라리움 어드벤처>로 돌아가는 일에 대해 주저함만 남게 되었다.
1년 넘게 공부에서 손을 뗀 탓인지 학업 뇌가 청결해진 탓에 밤늦게까지 도서관에서 복습을 하고 막 집에 돌아온 참이었다. <테라리움 어드벤처>가 내게 준 가장 큰 단점이 있다면 이거였다. 가뜩이나 강의 따라잡기도 힘든데….
거실에서 TV를 보며 날 기다리던 엄마가 뜬금없이 내게 제안을 했다.
“이번 주말에 할머니 댁 갔다 올래?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너 많이 보고 싶으시다는데.”
시골이라면 친할머니 댁을 말하는 거였다.
“응? 나 혼자?”
“너희 아빠랑 난 주말에 모임이 있어서 혼자 가 봐야 할 것 같은데. 가는 길은 알지?”
그러고 보니 부모님들이 명절 때도 바쁜 바람에 건너뛴 날이 꽤 되어서 못 본 지 오래되긴 했다.
“그래, 갔다 올게.”
흔쾌한 내 대답에 물어본 건 엄마면서 도리어 의아하단 얼굴이 된다.
“바빠서 안 간다고 할 줄 알았는데?”
“그냥. 마침 기분 전환이 필요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아도 이곳의 좋지 않은 공기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겨우 1년 정도 깨끗한 공기에 노출되었다고 반작용을 겪기엔 상당히 비정상적이긴 하지만…. 할머니 댁은 산도 있고 아직까지 논농사를 짓는 곳이니 여기보다는 공기가 훨씬 낫겠지.
바로 내 방에 가서 옷을 갈아입으려다 문득 든 생각에 엄마 옆자리에 앉았다.
“엄마, 내 태몽 기억나? 황금빛 열매 말이야.”
“태몽은 갑자기 왜?”
“아니, 뭐… 엄마가 앙상하게 마른 나무를 발견했는데 근처 냇가에서 물을 퍼 줬다며. 그 냇가 할머니 댁 근처에 있는 냇가라고 했잖아. 할머니 댁 가는 김에 가 볼까 하고.”
나도 왜 갑자기 불현듯 태몽이 떠올랐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나무, 열매란 조합이 묘하게 <테라리움 어드벤처>를 떠오르게 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곳에서 돌아온 지 불과 하루 만에 내 마음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현실을 향해 기울어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미련을 갖게 된다. 어쩌면 난 강제로 게임 속에 떨어졌던 때처럼 현실을 밀어낼 수 있는 어쩔 수 없는 당위성을 찾고 있는 게 아닐까? 내 마음속의 현실에 대한 죄책감을 밀어내고 마음 편히 <테라리움 어드벤처>를 선택할 수 있는….
“그랬지.”
내 보챔에 엄마는 이젠 잘 기억도 나지 않는 태몽을 떠올려 보려 노력하며 꿈을 묘사하다가 이전엔 듣지 못한 이야기를 덧붙이셨다.
“그러고 보니 할아버지께서 지어 주신 네 이름도 말이야. 태몽을 들으시더니 마침 자기도 꾼 꿈이 있다며 이름을 지으신 거거든. 그땐 꿈이 부정적으로 해석될 수도 있어서 말을 아꼈지만….”
할아버지께서도 비슷한 시기에 특이한 꿈을 꾸셨는데 꿈이 영 좋지 않았기에 임신한 엄마에게 안 좋은 영향이라도 끼칠까 봐 전전긍긍하셨다고 한다. 외갓집과 달리 친가 쪽은 손이 귀해서 더욱.
“갑자기 땅이 메마르고 작물들이 죄다 죽어 나가는 꿈을 꾸셨다고 했지. 그때 열매가 열릴 리 없는 커다란 당산나무에서 알 수 없는 황금빛 열매가 한가득 열렸는데 그마저도 맺는 족족 전부 떨어져서 땅을 굴러다녔다고 하셨어.”
갑자기 엘더가 말했던 세계 멸망의 징조들이 떠올랐다. 세계수의 가지에서 다 익지 않은 열매들이 비처럼 떨어진다고 했던가.
“확실히 안 좋은 꿈이긴 하네.”
“그렇지. 할아버지께서 계속해서 나무가 열매를 맺었다 떨어뜨리는 모습만 반복해서 보시다가 꿈에서 깼다고 하셨어. 그 이야기는 제희, 네가 내 배 속에서 아주 건강히 자라고 있다는 걸 확인한 후에야 해 주셨는데 처음엔 불길한 꿈을 꿔서 개꿈이라고 치부하셨다가 네 태몽을 뒤늦게 들으시더니….”
갑자기 그 길로 달려 나가 어디선가 내 이름을 받아 왔다고 하신다. 그것도 자신의 주장이 강하게 담긴.
“사실 그건 흉몽이 아니라 길몽일지도 모른다고. 해석하기 나름이라고 하셨거든. 네 이름이 복으로 세상을 구제하란 뜻이잖아? 나무가 열매를 우수수 떨어뜨리긴 했지만…. 그 열매들이 거름이 되어 메말랐던 땅을 비옥하게 만들어 줬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셨어. 꿈을 좀 더 꿨다면 죽었던 작물들이 되살아나는 모습을 봤을 거라면서.”
어떻게 보면 서로 관련이 없는 꿈처럼 들려도 태몽 속의 정체를 알 수 없는 황금빛 열매가 할아버지 꿈에도 등장했다는 점에서 연결 고리가 생기긴 했다. 그나저나 그런 꿈을 길몽으로 해석하시다니.
단순히 좋은 사람이 되라며 제희란 이름을 갖게 된 줄 알았는데 아예 길몽으로 점찍어 버리기 위해 그런 이름이 됐을 줄은 몰랐다. 듣다 보니 왜 내 어릴 때 별명이 복덩이인지도 어렴풋이 알 것만 같다.
꿈은 해석하기 나름이란 말에 동의한다. 메말랐던 땅에 떨어진 열매들이 거름이 되어 준다. 꼭 나무가 복을 베푸는 모양새긴 하네.
“그럼 엄마 꿈에 나왔던 앙상한 나무가 자라서 당산나무가 됐다, 그런 결말이려나?”
“뭐 해석하기 나름이니까.”
엄마와 이야기를 끝낸 후 내 방으로 가며 생각했다. 열매가 떨어지는 건 <테라리움 어드벤처>에서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그런데 비슷한 내용의 꿈은 오히려 복을 주는 길몽으로 해석되었다. 신기하네.
할머니 댁으로 갈 버스를 기다리는 터미널, 예매 시간보다 일찍 도착한 바람에 시간이 남았다.
시간을 때울 곳이 필요하여 카페를 찾던 도중 전에는 못 본 작은 공방을 발견했다. 직접 만든 수공예품을 파는 곳인지 유리창 너머 진열대에 아기자기한 제품들이 많이 보였다.
그중 눈길을 끄는 진열대가 있었는데 온갖 모양의 유리 용기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수조처럼 보이는 직사각형의 유리부터 원형의 둥근 유리구까지. 더구나 유리 안엔 다육 식물들을 비롯한 여러 식물들이 오밀조밀 심겨져 있었다. 어떤 곳엔 작은 모형 집이나 귀여운 동물 인형이 그 안에 함께 장식되어 있었다. 단순히 화분이라기엔 특이한 모양이었다.
“어디 보자 이름이… 테라리움?”
저게 테라리움이었구나. 실제로 보니 더욱 신기하다. 테라리움이 이름으로 붙는 게임까지 즐기다 왔으면서 막상 원형이 되는 물건을 눈앞에 두고도 바로 알아보지 못하다니.
유리 안의 또 다른 세상. 외부 환경과 극도로 차단된 용기 안에서 작은 자연이 순환되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