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그 증거다.”
실새삼은 살짝 생소하단 눈으로 바곳의 열매를 가리켰다. 열매는 자연 발생 상태였던 바곳을 막 설익은 열매에 담아냈을 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충만한 금빛으로 채워진 열매, 바곳의 영혼이 담겨 우아하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열매를 보니 바곳과 처음 만났던 때부터 지금까지의 여정이 주르르 떠올랐다. 울보 꼬꼬마에서 어느새 의젓하게 자라나 길드전에서 큰 공을 세우는 모습까지.
하지만 바곳이 어째서 증거라는 걸까? 그것보다 대체 무슨 증거라는 거지?
“이건 좀 다른 형태군. 너의 그 어떤 드라이어드들 보다 가장 네 영혼의 색을 많이 띤 드라이어드다.”
내 드라이어드들 중 가장 내 영혼에 가까운 드라이어드.
‘드루이드 제이의 각시투구꽃.’, 바곳의 풀 네임에는 무려 내 이름이 박혀 있었다. 더구나 그 어떤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 오리지널 드라이어드였다.
이 세계에서 말하는 자연의 이치를 위반하여 인공 개량으로 태어났기에 같은 드라이어드들로부터 좋지 않은 시선을 많이 받았지만, 그런 것들을 상관하지 않고 기꺼이 내가 품은 존재였다.
그리고 난 바곳을 품은 것을 한 번도 후회해 본 적 없었고 오히려 아주 잘한 일이라 생각해 왔다.
애틋한 시선을 가득 담아 바라본 열매는 마치 그런 내 감정에 화답이라도 하듯 반짝거렸다.
“마치 어둠 속에서도 반드시 밝은 날은 올 거라는 것처럼 반짝이는군. 이게 네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당장이라도 불러만 준다면 달려올 듯 성화니 한번 의지해 보거라.”
실새삼은 움직이지 않는 내 손을 직접 들어 바곳의 열매를 쥐여 주었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진 말고.”
마치 내가 어딘가로 떠났다가 돌아올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그래도 걱정하지 말거라. 너무 늦는다 해도 또다시 내가 찾아가마.”
실새삼의 당부를 마지막으로 시야가 확 뒤바뀌었다. 세계수 힘의 폭주와 스텔라의 최후의 발악으로 정신이 없었던 전쟁터에서 잠시 빠져나와 주변이 온통 새까만 공간에 남겨졌다. 마치 꿈속에서 세계수를 만날 때 자주 본 듯한 공허의 공간이었다.
내 모습조차 보이지 않는, 빛 한 점 들지 않는 어두컴컴한 곳에서 덩그러니 서 있었다. 이곳은 대체 어딜까?
“제이 님…?”
조심스러운 물음이 지척에서 들렸다.
“바곳? 어, 나 드디어 말할 수 있네.”
“제이 님!”
훌쩍 자란 몸이 풀썩 안겼다.
“제이 님이 절 여기로 부르신 거죠? 감사해요…. 저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괴로워하시는 게 보이는데도 전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요. 죄송해요.”
울보를 졸업한 지 꽤 됐건만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목소리에 물기가 가득했다. 이젠 덩치가 커져서 어린 모습일 때보단 안아 주는 게 버거웠지만 그래도 좋았기에 천천히 바곳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내가 불렀다고?”
실새삼과 바곳의 열매를 두고 대화를 하긴 했지만 바곳을 불러내는 별다른 행동을 취한 것은 아니었다. 내겐 바곳이 직접 날 찾아온 것처럼 보였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야. 네 잘못이 아니야. 내게….”
“세계수의 힘인 거죠?”
역시나 다들 내게 내려진 이질적인 힘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있었다.
“세계수의 힘은 좋은 것이 아니었나요? 그런데 대체 그게 왜 제이 님을 힘들게 하는 거예요?”
“내가 많이 힘들어 보였어?”
일순 바곳이 그걸 말이라고 하냐는 눈이 되었다.
“겉보기엔… 겉보기에는 제이 님의 모습이 그대로였지만…. 제 눈에는 갈기갈기 찢어진 것처럼 보였어요…. 전 아직 배움이 부족해 다른 드라이어드들이 볼 수 있는 것들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지만… 찢긴 건 제이 님의 영혼처럼 보였어요.”
바곳은 곧 숨이 넘어갈 듯 삼킨 울음으로 헐떡거리면서 매우 힘겹게 말을 이어갔다.
영혼이 찢어졌다라….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내 시야가 여러 갈래로 조각나고 정처 없이 떠도는 것처럼 느껴졌던 건가….
그런데 영혼이 찢어진 상태는 대체 뭘까? 내가 죽었다는 걸까?
“실새삼이 바곳 네가 나의 어떤 ‘증거’라고 했어. 정확히 듣지는 못했지만 네가 있다면 내가 무사할 거라는 것처럼 들렸어. 그래서 지금 네가 여기 온 게 된 거고.”
“제가 제이 님을 구할 수 있어요? 하지만 저는 제이 님의 다른 드라이어드들보다 약하기도 하고…. 아직 모르는 것도 많은데. 제가 할 수 있을까요…?”
나의 영혼의 색을 가장 많이 닮은 드라이어드.
그 말의 의미를 다시금 고찰하게 되었다. 단지 내가 주웠고 내 이름이 붙은 꽃이기에 그렇다기보단 바곳의 성장은 내 여정을 많이 닮아 있었다.
외따로 떨어진 존재, 마치 다른 세계에서 넘어온 이방인인 나와 비슷했다. 또한 본래 성목이었다가 성장도가 퇴화하여 어린 모습이 되었던 데이지나 실새삼과 달리 바곳은 정말로 어린 묘목일 때부터 나와 함께했지. 꼭 초보였던 내가 커 나가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강한 힘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는 점까지.
“당연하지. 넌 세계수는 가지지 못한 나만의 특별한 드라이어드잖아. 아….”
세계수는 가지지 못한 특별한 드라이어드. 오롯이 나만의 드라이어드….
실새삼이 말했던 ‘증거’에 대한 윤곽이 어렴풋이 잡혀 가는 느낌이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하락했던 자신감이 조금 회복되었는지 목소리에 힘이 실렸지만 여전히 우물쭈물했다. 그런 바곳을 보니 정확히 자신이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 상황을 헤쳐 나갈 수 있는 열쇠가 바곳이란 건 실새삼의 힌트로 알 수 있었지만, 나 역시 바곳에게 어떻게 도와 달라고 해야 할지 잘 모르는 상태였다.
그러니 내가 직접 그의 역할을 제시해야 된다는 건데…. 바곳이 특별한 이유, 내가 세계수로부터 내 육체의 주도권을 찾아올 수 있는 방법….
애초에 주도권을 뺏겼던 이유를 따져 보면 내가 강한 힘을 원했기 때문이다.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더 빠른 길로 가고자 했었지.
“제이 님을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할게요!”
잠시 생각하기 위해 그를 아무 말없이 바라본 것이 그에겐 다른 의미로 해석되었나 보다. 마치 내가 자신감이 떨어지는 자신을 두고 가능성을 재보고 있다 여겼는지 다급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유심히 바곳을 바라보다 느낀 건데 그 역시 실새삼처럼 실체가 이곳에 있다는 느낌이 아니었다. 어쩌면 나처럼 정신만 나로 떨어졌거나 아니면 영혼이 넘어온 게 아닐까?
바곳은 빛 한 점 없는 어둠 속에서 스스로 은은하게 금색의 빛을 발하고 있었고 주위로 마치 열매 안에 있는 것처럼 둥근 빛의 막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래서 꼭 내가 열매 안의 바곳과 이야기하는 기분도 들었다.
“사실… 나도 네가 무슨 일을 해야 할지는 잘 몰라.”
내 말에 바곳은 크게 실망한 얼굴이 되었다. 내가 아닌 자신에게.
“물론 그건 네가 할 수 없다는 뜻과는 달라. 그러나 네게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찾아보려고 해. 내가 어떻게 너에게 구원을 요구해야 하는지 말이야.”
“죄송해요. 제가 아무것도 몰라서….”
푹 숙인 고개를 보니 나도 모르게 작게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우리 바곳은 항상 그렇게 성장해 왔잖아? 모른다는 걸 숨기려 하지 않고 가르쳐 주면 잘 배우고 말이야. 그래서 이렇게 잘 컸잖아.”
출생 때문에 자존감이 많이 낮은 아이였다. 아마 실새삼과 반반 섞으면 평균치가 나오지 않을까 싶다.
그런 바곳을 다독였던 것이 한두 번이 아니기에 새삼 특별할 것도 없었다. 오히려 그 모습이 더 바곳다워서 되려 나를 자극하게 된다. 난 항상 바곳에게 답을 주는 입장이었으니 이번에도 답을 알려 주기 위해 더 열심히 생각해야 된다는 거다.
“보자…. 내가 바곳에 대해 놓친 게 있는 건 아닐까?”
“음… 제이 님, 혹시 그건 기억나세요? 스승님이 제게 했던 말 중에….”
“나의 종과 너에게 섞인 투구꽃의 종은 선조 때부터 인연이 매우 깊으며 공통된 신화가 계승된다. 신의 명을 받들어 운명의 실을 끊어 내는 셋의 사자 중 둘이 우리였으니까.”
바곳의 스승인 벨라돈나가 바곳에게 독을 가진 꽃이 가져야 할 자세에 대해 언급하며 했던 말이었다. 그러고 보니 바곳이 가진 신화에 대해선 깊게 생각해 본 적이 거의 없었다. 오리지널 꽃이다 보니 신화도 없을 것이란 인식이 자리했던 터였다.
개량종에서 태어나 하나의 독립된 종의 길을 걷는 레드 데이지가 스스로 신화를 만들어 내야 하는 것처럼 바곳 역시 그러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바곳이 가진 칭호가 벨라돈나가 했던 모체 신화와 연관이 깊었지.
본래 바곳의 칭호는 독약의 왕, 오리지널이 되며 새롭게 개화한 칭호는 ‘운명을 결정하는 자’였다. 그렇다는 건 데이지의 경우와 달리 바곳은 어느 정도 각시투구꽃의 신화를 계승하는 게 아닐까? 운명이라….
계속 중점에 접근하지 못하게 어렴풋이 맴돌기만 했던 단서들이 강하게 빛을 발한다.
“이제 알 것 같아.”
세계수에게서 주도권을 뺏을 수 있는 방법, 내가 원했던 건 초월적인 힘….
세계수가 강하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건 내가 세계수를 유일한 초월적인 존재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서열로 따지면 신과 평범한 인간인 나 사이에 엄청난 간극이 존재하기 때문에 나는 세계수의 의지를 거부할 수 없게 된다. 하지만 나와 세계수가 대등한 존재라면?
실새삼이 말했던 ‘증거’, 그건 내가 세계수를 신으로 섬기지 않고 스스로를 신으로 여길 수 있는 그 증거를 말했던 것이 아닐까 싶었다.
열매를 맺고 드라이어드를 품는 건 세계수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내겐 바곳이라는 반증이 존재했다. 내가 스스로 열매를 맺어서 품은, 세계수에겐 없는 유일한 존재.
바곳은 칭호 그대로 운명을 결정하는 자가 맞았다. 그는 나의 운명을 바꿔줄 수 있는 사자였다.
“내 운명을 바꿀 수 있게 도와줘.”
그가 방법을 모른다고 할 줄 알았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내 요청에 바곳에겐 더 이상 망설임이나 주저함이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그의 청보라색 눈이 마치 내가 만물을 보는 눈을 발동했을 때처럼 찬란한 금빛으로 물들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