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 보면 이상했다. 인페르노의 활동은 과격을 넘어 유일신인 세계수에 대항하는 것들이 많았다. 제2의 세계수를 만든다든가 세계수 가지를 연료로 삼거나 오직 세계수만이 할 수 있는 테라리움을 인공적으로 조성해 보려 한다든가.
세계수의 화신이나 다름없는 드루이드와 드라이어드에 대한 반감은 그들이 갖지 못한 것들에 대한 질투나 박탈감으로 생길 수 있다지만, 신성 모독과 같은 크게 책잡힐 구실을 번번이 범하는 건 은밀하게 활동하는데 오히려 지장이 생길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스텔라가 뿜어내는 분노와 증오를 느끼며, 인페르노에 대한 모든 역사를 아는 것은 아니지만 어쩌면 그녀가 수장이 되며 색채가 바뀌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오래전부터 베스탈리스끼리의 응집은 존재하고 있었으나 그녀가 수장이 되어 단결시키며 그 안에 노골적으로 세계수에 대한 증오를 주입시켰다는 생각 말이다.
그동안 자신들을 직접적으로 핍박한 사람들을 증오하는 건 쉬워도, 세상의 모든 것들을 뒤로한다 하더라도, 원망의 주체를 신으로 돌리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세계수는 베풀기만 하는 자애롭고 신성한 신의 이미지였으니까. 탓하기보단 기대기에 걸맞은 존재란 말이지.
하지만 자신들의 모든 고통의 원인이 세계수에 있다고 스텔라가 불씨를 놓게 된다면, 처음 불붙는 것만 더딜 뿐 이후 활활 타오르는 건 삽시간이 될 것이다.
“내가 그토록 불렀건만…. 그리도 침묵만을 일관하더니…. 이리도 현신이 쉬운 일이었단 말인가? 고작 이까짓 난리로 불러낼 수 있는 거였다면, 겨우 그 한 명 죽이려는 일로 달려올 줄 알았다면….”
그토록 불렀다라….
스텔라는 입을 열 때마다 검붉은 피를 왈칵 쏟아 내며 처절하게 읊조렸다. 모두가 들어주길 바라는 목소리는 아니었고 정해진 청자는 초월적인 존재임을, 작고 분별없는 목소리라도 반드시 이야기가 닿을 것이라 확신하는 목소리였다.
증오를 내세운 얼굴 뒤엔 더 많은 감정들이 공존하고 있었으며 하고 싶은 말이 넘치도록 응어리져 있었으니 한탄하듯 토해 낸 말은 그간의 모든 마음고생을 다 토로하기엔 부족해 보였다. 하고 싶은 말이 수없이 많았으나 막상 몇 마디 내뱉지 못한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베스탈리스가 되어 세상의 기피 존재가 된 것을 세계수의 탓으로 보고 증오하는 걸까? 아니, 겨우 그 정도 이유로 움직였다기엔 어울리지 않았다. 좀 더 절실한 감정이 변질된… 그래, 배신이었다. 세계수가 자신을 배신했다고 여기고 있었다. 아무리 불러도 대답하지 않았다는 걸 보면 처음은 증오가 아닌 신뢰였을지도 모른다.
세계수의 무엇을 믿었고 또 그 세계수가 어떻게 믿음을 버리게 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내게 강림한 이 초월적인 힘은 그런 걸 상관하지 않으리라. 중요한 건 그녀가 결국 세계를 병들게 하는 병해충처럼 굴고 있기에 곧 처단 당하리라는 것이었다.
스텔라가 죽으면 인페르노는 큰 타격을 입을 것이 분명했다. 전 수장에 최고 간부였으니, 인페르노를 퇴치한다는 내 커다란 목표의 달성도가 올라가는 셈이었다. 하지만 여태 힘든 모험을 해 왔다 하더라도 사람을 죽여서 일을 끝내는 건 역시 마음에 들지 않는다.
웅웅.
기이한 울림이 마치 목표를 포착했다는 것처럼 날카롭게 진동했다. 지반을 붙드는 일을 하던 금빛 줄기들의 다음 목표는 화마의 발생지인 스텔라였다.
피아 가리지 않고 터져 나간 공격에 온전히 그 자리에 존재하는 건 스텔라뿐. 텅 빈 주변에 오롯이 그녀만 사형을 기다리는 사형수처럼 무릎 꿇고 있었다.
으드득.
줄기들이 땅을 기고 하늘을 날며 스텔라를 향해 나아가자 그녀는 반격이라도 하듯 용암을 한껏 끌어 올려 덮쳤다. 그리고 그 여파로 그녀는 피를 한 움큼 토해 냈다.
그녀는 이 자리에서 자신의 죽음은 전혀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그 반대를 노리고 있었다. 세계수의 힘이 이 재앙의 원인인 스텔라를 노렸다면 스텔라는 세계수의 힘의 현신 근원인 내 육체를 노리고 있었다.
넓은 지역의 불특정 다수를 향해 터져 나갔던 공격이 그 범위를 줄이고 단 하나의 목표를 노리며 좁혀졌다. 한쪽으로 응집된 힘은 더욱 강해졌으며 스텔라는 그 힘을 줄기에 대한 방어를 완전히 버리면서까지 내가 있는 곳을 향해 쏘아 보냈다.
그녀는 세계수를 증오함과 동시에 나 역시 증오하고 있었다. 자신은 배반당했는데 나는 그러지 않았음을 억울해한다.
나와 그녀는 여러모로 다른 점이 많다. 베스탈리스와 드루이드, 세계수의 축복을 받지 못한 자와 축복을 영혼에 심은 자, 그리고 부름에 응답을 받지 못한 자와 응답을 받은 자.
콰과광!
뻔히 공격이 다가오는 게 보여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내 육체는 그곳에 뿌리내린 나무처럼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러니 주위에 있던 내 드라이어드와 길드원들이 대신 공격을 막기 위해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그녀의 공격은 방어벽에 고이 막혀 줄 만큼 단순하지 않았다.
몹시 변칙적인 공격이 직선을 그리다 땅으로 뚝 떨어지며 경로를 틀었고 바닥의 틈새로 새로운 활로를 개척해 땅속을 움직이는 굴착기처럼 직진해 왔다. 그리고 내가 있는 바로 땅 아래에서 화산처럼 솟구쳐 올랐다.
화르륵!
지반을 꿰매고 열기를 잠재울 만큼 강력한 세계수의 힘이 불을 막아 내지 못했다. 아니, 막지 않았다.
세계수의 축복은 순수한 불을 배타하지 않는다. 뿌리 아래 흐르는 물을 내버려두는 것처럼 불 역시 타오르도록 내버려둔다. 정도를 벗어난 피해가 발생한다면 지금처럼 적정 수준을 넘지 않도록 복구 작업을 진행하긴 해도. 결국 그것 또한 자연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단순히 날 향해 쏘아진 스텔라의 불은 공격이 아니라 치부한 것이다.
멍청하다. 그 힘이 지금 누구 몸을 매개로 삼고 있는데. 난 불을 견뎌낼 수 있는 초월적인 존재 따위가 아니라고.
타 죽기 일보직전이 되어서야 내 육체를 지키기 위해 움직이려는 건가?
포르타가 만든 장비가 보통 소재가 아니었기에 단시간의 화재는 견딜 수 있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난 진즉 통구이가 됐을 것이다. 온몸이 뜨거웠고 장비가 미처 보호하지 못하는 부위는 화상 피해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괴로워도 피할 수가 없다는 사실이 미칠 노릇이었다.
불을 끄겠다며 외부에서 물을 뿌리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애초에 초월적인 힘이 아니면 쉽사리 잠재울 수 없는 끔찍한 화마였다. 불길에 둘러 싸여 있는데도 난 그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욕이 절로 나온다.
이로써… 세계수의 대리자가 의미하는 바가 명백해졌다. 내 육체는 화분이었다.
“이동하는 뿌리가 비로소 한곳에 붙박여 있던 나의 발이 되어….”
“나의 눈먼 축복이 영혼에 투영된 곳곳의 세상을 살피며 눈을 뜨게 되고….”
그동안 숱하게 떠올랐던 세계수의 성스러운 신언(神言)이 뇌리를 스친다.
세상을 고루 이동할 수 없는 세계수에게 이동하는 뿌리가 되어주는 것. 움직이는 화분, 그런 의미였던 거겠지. 하지만 화분이 깨진다고 곧바로 식물이 죽는 건 아니다. 새로운 화분에 옮겨 심으면 되니까.
신을 대리하는 자, 처음 들었을 땐 단어 그대로 굉장한 존재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세계에서 가장 대단한 존재가 한낱 인간인 나에게 분에 넘치는 관심을 주고 덕분에 범상치 않은 힘들까지 갖게 되니 더없이 특별한 존재가 된 것 같았지.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너무 과분했다. 세상에 제 축복을 뿌려 만든 수없이 많은 드루이드가 있는데 유독 내게만 과할 정도로 접촉해 왔다.
판타지 세계에서 신의 부름을 받고 온갖 대단한 일을 해내는 영웅들의 이야기는 흔했다. 하지만 이야기가 영웅에게 집중되지 않고 신이 필요 이상으로 개입한 순간, 그건 그 영웅의 일대기가 아니라 신의 서사시나 다름없었다.
영웅은 그저 신의 권능을 발휘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난 단지 수단에 그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 내 드라이어드들과 동료들과 이곳에서 함께 지내온 모든 일들이 다 세계수의 뜻대로 진행되어 버린 게 아닌가. 전부 내 선택이었고 내 의지였다. 모든 원인과 결과를 전부 내가 이뤘다. 주인공은 나지 세계수가 아니다.
하지만 결국 내 자리를 뺏긴 시점부터 주인공이 바뀌게 된 건 아닐까?
마거리트…. 네가 말했던 건 혹시 이런 결말이었니?
“다행히… 정신은 멀쩡하군. 영혼처럼 사방팔방으로 찢어져 일일이 조각을 맞춰야 하면 어떡하나 걱정했는데.”
그동안 불을 제외한 누구도 뚫지 못했던 무형의 방어막을 누군가 지나쳐 넘어왔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얼굴이었다. 옴짝달싹도 할 수 없던 내 몸이 그의 손짓을 따라 움직였다. 푹 숙이고 있던 고개가 들리고 놀라울 정도로 훌쩍 자란 실새삼의 얼굴이 보였다.
이제 그는 처음 만났을 때의 모습을 얼추 따라가고 있었다. 귀족적이면서 오만한 시선, 깔보는 듯하면서도 이젠 그 안에 나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 차 있다는 걸 알고 있다.
날 붙잡고 있기에 실새삼 역시 함께 불에 타고 있었지만 전혀 개의치 않는 표정이었다.
“이전에도 느꼈지만 넌 정말 생각이 많다. 입을 다물곤 있어도 머릿속에선 항상 이렇게 시끄럽단 말이지.”
어떻게 실새삼은 내게 접근할 수 있는 걸까?
“그래도 그 점 덕에 널 찾을 수 있었으니 될 수 있으면 널 놓치지 않게 계속 시끄럽게 떠들고 있어라.”
그의 요구에 오히려 생각이 뚝 멈춰 버렸다.
“멈추지 말래도?”
그러자 이런 나를 혼내듯 금방 실새삼이 말을 덧붙였다.
“살아 있는 인간은 끊임없이 사고한다. 그러니 네가 계속 너로 존재하고 싶다면 끊임없이 생각해라. 그동안 어지간히 억압받았을 텐데 너 좋을 대로 모든 상황을 의심하고 후회하고 고뇌해라. 지금 너의 생각이 그릇되다고 비난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넌 항상 그 결과물로 인연을 만들고 길을 찾았으니까. 난 너의 그 점이 마음에 든다.”
실새삼은 그렇게 말하며 내 멱살을 잡아 올린 채로 내 모습을 이리저리 훑어보았다. 당장 불을 끄지 않는 걸 이상하게 여기다가 문득 그가 실체가 아니란 느낌을 받았다.
즉, 진짜 드라이어드 본체가 이곳에 있는 것이 아닌 나처럼 정신만 붕 뜬 채로 접촉해 왔다는 느낌을 받았다.
“여기 어디 있을 텐데.”
그의 시선은 마치 내게서 무언가를 찾는 듯했다.
“넌 그릇 따위가 아니다. 이미 하나의 완성된…. 그런 거란 말이지. 그 증거를 찾으면 네가 세계수에게서 주도권을 빼앗아 오는 게 쉬울 텐데. 아, 그래. 이거였군.”
실새삼이 내 심장에서부터 이어져 있는 기묘한 실을 슬쩍 들어 올려 튕겼다. 그러자 파르르 떨리던 실이 두꺼워지고 곧게 뻗어 나뭇가지 같은 형태가 되더니 이내 그 끝에 동그란 열매를 맺었다.
그리고 난 본능적으로 그것의 존재에 대해 알아차렸다. 저건 바곳의 열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