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1화 (421/604)

끊어져 이음새가 사라진 지반이 하나둘 차례차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발 디딜 곳이 줄고 지지대가 없다면 곧게 서 있는 것도 힘들 지경이 되었다.

이쯤 되자 일대에 모였던 사람들은 본래의 집합 목적을 완전히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마치 실수로 자신도 모르게 지옥의 초입에 발을 디딘 사람처럼 온 힘을 다해 도망치기 바빴다.

숨 막힐 정도로 옥죄는 열기, 흔들리는 땅, 도망치기 위해 동료까지 밀치고 달리는 사람들로 인해 주변이 아비규환이 되었다.

이 난리통에서 그나마 의연하게 자리를 지키고 서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방편을 찾고 책임을 다하려는 자는 그 용기와 의지에 크게 칭찬해 줄만 했다. 비록 우리가 적으로 만났지만 다른 상황에서 만났다면 기꺼이 신뢰를 내어 줄 수 있을 의인이라 생각했다.

그렇다고 도망치는 자들을 마냥 욕하고 비난할 의향은 없었다. 방도가 없다면 피하는 것이 맞았다.

드루이드의 사명이 불로부터 세계수를 지키기 위한 것이나 이곳에 사자(使者)의 눈처럼 타오르는 지옥불은 명칭이 같다고 해도 그 차원이 달랐다. 도망간 자들의 사명은 조금이라도 더 늦게 등을 돌린 것에서 이미 다했다고 볼 수 있었다.

다만 두려워도 남는 자들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남기로 한 이상 투쟁해야만 한다. 괜히 얼어붙어 주변인의 발목을 잡지 말고 이왕 남기로 한 것, 머릿속 어딘가에 본인이 생각하는 방편이 희미하게라도 존재하기에 선택했을 터이므로 시도는 해 봐야 한다.

그것이 통할지 안 통할지 장담할 수 없으나 드라이어드와 손을 잡고 모험가가 되기로 했으니 공격 하나라도 더해 봐야 할 것 아닌가?

찰랑.

근처에 바다가 없으나 파도가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흙먼지가 섞여 거무죽죽한 물이 갈라진 지반 틈 사이로 스며들었다가 들끓는 용암을 만나 뿌연 수증기를 일으켰다.

넘실거리는 새하얀 빛, 도저히 혼자 낼 수 없는 환한 빛이 어딘가에서 터져 나왔다.

“수류를 만들어 파괴력을 갖춰라!”

“물과 친화력이 큰 필드의 드라이어드라면 누구라도 좋다!”

“아직 그래프트를 펼칠 수 없다면 드라이어드의 자체 기술을 최대한 보조하는 방향을 선택해라!”

“길드의 이름을 지고 부끄러운 선택을 하지 마라!”

그곳엔 도망가지 않고 모인 드루이드들이 연계 그래프트를 펼치고 있었다. 오션 필드와 리버 필드, 스왐프 필드의 드라이어드들이 힘을 합쳐 조각 바다를 흉내 내고 있었다.

또 어딘가에서 다른 기운의 새하얀 빛이 터져 나왔다.

활짝 열린 지반을 닫기 위해 데저트 필드와 스톤 필드의 드라이어드들을 필두로 한 연계 그래프트였다. 그들은 흔들리는 땅을 안정화시키고 빈 곳을 메꾸기 위해 곳곳에 조각 산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한편으론 전혀 다른 방향에서 차가운 냉기를 품은 빛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요정처럼 옹기종기 모여 있는 스노우 필드의 드라이어드들이 연계 그래프트로 소박하게나마 눈보라를 불러들이고 있었다.

지형 특색이 떨어지는 드라이어드들은 앞선 이들을 뒷받침하는데 주력했다.

비록 초반엔 길드전을 치르기 위해 필드의 가호를 거두어들였지만 이런 상황에서까지 그럴 이유는 없었기에 나의 세 그루의 가디언들이 각각 해당하는 필드에 넘치는 가호를 선사하며 기운을 북돋고 응원을 보냈다.

스텔라의 첫 공격엔 오합지졸로 덤비던 자들이 위기의 위기 끝에 내몰리자 극적으로 단합력이 터져 나온 모양이다. 아니면 미처 맞설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도 못했다가 내린 비를 보고 깨달아 용기를 얻었거나.

어려울 것만 같았던 방어와 대처가 성공한 것을 직접 봤으니 더한 상황이 되었어도 막아 낼 수 있을 거란 희망이 생겼을 수도 있다.

도망친 자들이 본다면 그들의 협동력과 희생정신에 눈물을 흘릴 테지만…. 스텔라가 생명을 태워 가면서까지 펼치는 필살기를 막기란 역시나 역부족이었다. 저런 무리가 10배는 더 모인다면 가망성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생명력을 거름으로 쓰는 기술. 지반 밑에 거대한 불의 바다를 소환해 낸 스텔라의 모습은 어딘가 익숙했다.

나를 비롯한 드루이드들, 그리고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들. 우리가 그래프트를 쓸 때나 가드닝 스킬을 쓸 때 역시 생명력이 소모되었다.

그녀와 우리의 결정적인 차이점이라면 불씨를 영혼에 품은 베스탈리스와 축복을 영혼에 품은 드루이드라는 차이점뿐이지만, 결국 같은 사람이며 힘을 사용하는 방식도 똑같기에 직업을 분리하고 본다면 우리는 다 같은 존재들이었다.

영혼에 연결된 드라이어드의 기술을 생명력을 태워 사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혼에 연결된 불의 기운을 생명력을 태워 빌리는 게 아닌가.

이 상황에서도 끝판왕처럼 등장한 스텔라에게 연민을 느끼는 내가 어이없었지만 그녀를 마냥 상종 불가한 존재로 대할 순 없었다.

이렇게 수많은 드루이드와 드라이어드들이 대규모로 정연한 연합작전을 벌이는 모습은 처음 봤고 진기했지만, 조금이라도 선방하는 기세를 보이다가 금세 밀리는 걸 보니 빠르게 절망이 밀려오기도 했다.

온몸이 뜨거웠다. 비단 땅 아래 용암이 들끓기 때문이 아닌 보다, 근본 적인 열기가 내 몸속에서 기생충처럼 좀먹어 가는 기분이 들었다.

얼음물을 왕창 들이켠다 하더라도 쉽사리 해소될 것 같지 않은 진득한 열기가 자꾸만 스텔라에게로 시선을 이끌었다. 마치 그녀가 느끼는 속이 타들어가는 고통을 공감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동시에 일단 뭐든 해 보라는 무언가 재촉하는 안절부절한 느낌도 머리를 들이밀었다. 모두가 타 죽어 가는 꼴을 그대로 보고만 있을 거냐며 내 안의 누군가가 처절하게 외치고 있었다.

어쩌면 끊임없이 비명을 지르는 세계수 가지의 바람일지도 모른다. 이 일대는 60번째 테라리움의 세계수 가지 영역이므로 스텔라가 이리 난동을 부리니 가지에 영향이 없을 리가.

하지만 가지의 축복을 있는 힘껏 끌어다 회심의 일격으로 부린 가드닝 스킬이 스텔라의 필살기 전 단계를 겨우 무마하는데 그쳤다.

드루이드들의 연계 그래프트에 자극을 받은 나 역시 비를 멈추지 않고 뿌리며 성원을 보태고 있었지만 현 상황은 화로 위에 올려진 냄비나 다름없었다. 계속해서 열기가 치솟았다.

“살려 주세요!”

“여기, 사람이…! 도와주세요!”

끝내 방어에 실패한 연계 그래프트 군단도 무너지고 있었다. 균열의 틈으로 사람이 빠지고 튀어 오른 용암에 신체가 손상되고, 드루이드가 정신 줄을 놓으니 드라이어드들도 미처 날뛰기 시작했다.

그나마 모두가 힘을 합하여 간신히 최악을 막고 있던 상황에서 탈락자들이 우수수 발생하자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균형이 삽시간에 무너져 내렸다. 언제 무너져도 이상할 것 없던 젠가에서 탈락자들이 발생한다는 건 빠르게 블록들이 빠져 버리는 것과 같았다.

“아악! 내 다리! 다리가…!”

“흐윽… 드루이드님, 정신을 잃으시면 안 돼요… 제발.”

고통에 신음하는 소리, 슬피 우는 울음소리, 단말마의 비명 소리….

모든 소음이 여과 없이 고막을 때리니 정신이 아득해질 것 같았다.

어느새 후문에 모여 있던 길드원들까지 합심해서 이젠 적을 넘어 부상자들을 구조하기 위해 뛰어다니는 게 보였다.

불현듯 이 상황에서 마거리트가 떠올랐다. 날 위해서 날 버리고 떠났던 내 하얀 드라이어드.

네가 있었으면 이런 상황을 예측할 수 있었을까? 네가 떠난 건 결국 지금의 내가 못 미더웠던 게 아닐까?

애정을 다해 키웠다 생각한 내 첫 드라이어드 엘더 마저도 끝내 내게 불안을 느끼고 있는데 하물며 너는 어땠을까? 그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불안을 떨칠 수 없을 만큼 내가 엇나가고 있는 걸까?

메스키트가 항상 내게 드라이어드에게 믿음을 보인다면 그들도 내게 믿음으로 보답한다고 했었다. 드라이어드들을 믿어 주는 것, 그것만은 가장 잘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잘해 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아비규환 속에서도 떠나 버린 마거리트를 질척하게 그리워하기나 하고 세계수의 대리로 세상을 구하겠다는 큰 포부를 펼쳐 놓고도 스텔라를 상대로 어쩌지도 못하고 있었다.

내 구역에 발을 디딘 자들도 구해 내지 못하고 소음에 귀가 멀어 애써 겁나지 않은 척 두 눈만 부릅뜨고 있었다.

스텔라…. 당신은 정녕 내가 넘어야 할 시련인가요?

빨리 이 모든 일들을 마무리하고 도망쳐 버린 하얀 꽃을 찾으러 가야하는데, 마치 그 앞길이 어려운 장애물들이 가득하단 걸 암시하는 것처럼 스텔라의 용암이 발목을 붙잡았다.

이 정도도 이겨내지 못하면 내 하얀 꽃은 물론 곁의 누구도 지킬 수도 믿음을 보여 줄 수 없다는 것처럼.

카수스의 부활과 인페르노 소탕, 길드전 등등…. 그리고 마거리트와의 헤어짐… 스스로 연결을 끊은 나의 마거리트…. 내 머릿속에 해결되지 못한 무거운 짐들이 육중하게 자리를 차지해 생각의 흐름을 죄다 끊어놓고 고립시키는 기분이 들었다.

마거리트, 이것 봐. 네가 날 위해 떠났다지만 지금의 내 모습이 좋아 보이니?

내게 강한 힘이 있었다면, 모두를 압도할 수 있을 만큼 강한 힘이 있었다면. 짐처럼 자리한 모든 일들이 삽시간에 해소되고 평화로운 나날만 가득 이어질 수 있을까?

당장 스텔라를 이기려면….

그 순간.

뜨드득….

온몸이 찢어지는 듯한 소음이 들렸다.

***

“저것 봐. 네 전 주인도 별수 없이 같은 선택을 하게 될 거라니까?”

수많은 사람이 신음을 흘리고 비명을 지르는 지옥도를 바라보면서도 전혀 어울리지 않는 웃음기 섞인 쾌활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목소리의 주인은 결코 평범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 기괴한 형상의 남자였다. 마치 시간의 흐름을 위반하듯 푸석푸석한 잿빛 머리칼은 윤기 나는 결 좋은 머리칼로 바뀌었다가 다시금 지푸라기처럼 변하기를 반복했다. 장작처럼 삐쩍 마른 몸은 핏기 하나 없는 시체처럼 바뀌었다가 순식간에 따뜻한 혈색이 도는 피부로 바뀌기를 반복했다.

모든 형상이 고장 난 인형처럼, 아니 정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끊임없이 수리를 반복하는 인형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런 기괴함 따위는 정작 본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의연했다.

그의 퀭한 두 눈은 쉴 새 없이 펑펑 울고 있는 하얀 드라이어드를 향했다가 다시 지옥도가 펼쳐진 풍경으로 향했다. 이 모든 광경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높은 절벽에서 그는 기대로 가득 찬 눈빛 속에 모든 것을 담아냈다.

아비규환 속에서도 마치 구원을 위해 지상에 강림한 천사의 것처럼 금빛으로 펼쳐진 거대한 나무줄기 날개가 보였다. 그리고 그 가운데 고통에 허덕이며 주저앉아 있는 여인까지.

“특별할 것도 없지.”

그 말에 드라이어드의 울음소리가 더욱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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