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맞부딪힌 두 회오리는 엄청난 여파를 남기고 소멸했다. 터져 나오는 엄청난 압력의 바람, 코와 입 속을 파고드는 매캐한 잿가루와 모래 먼지. 황급히 얼굴을 가린 후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시야를 확보할 수 있었다.
회오리가 소멸된 후 일대는 아비규환이었다.
주변의 사람과 드라이어드를 제외한 지지대 없는 사물들이 죄다 바람에 쓸려 갔으며 경치는 오색을 잃고 그 자리에 새카만 재와 반짝이는 모래만 깔려 일부러 망친 캔버스를 보는 듯했다.
화염 회오리가 이리 쉽사리 물러날 거라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래프트도 하지 않은 메스키트의 힘이 강력한 건지, 스텔라가 봐준 건지 모르겠다. 이 지역이 통째로 내 축복의 영역이니 평소보다 배는 보너스를 받고 있긴 하지만….
어쨌든 방금 활약으로 이쪽을 향한 시선에 특별한 감정이 실리는 것이 느껴졌다. 참전을 위해 정문 상징물에서 내려왔으니 기습을 노린다면 지금이 적기일 수도 있다.
그러나 무언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길드전이 휴전되었다. 좀 더 이기적으로 군다면 두 마리 토끼를 노려볼 작정으로 길드전을 진행해도 될 텐데.
“네 전투를 보지 않은 지 오래 되긴 했지만… 못 본 사이 더 강해졌네.”
파필리온은 어쩐지 허탈한 목소리였다.
난 인페르노를 바라봤다. 그들은 스텔라의 방금 공격이 무력화되어도 전혀 동요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면 스텔라가 힘을 다 보인 게 아니란 걸까?
일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스텔라와 두 눈이 마주친 것 같다. 루비처럼 새빨간 두 눈은 날 보며 확신의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너였구나.’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에서 만났던 날 알아보는 걸까? 내게 말하듯 뭐라고 입술이 움직이고 있었지만 알아볼 순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불현듯 무리를 헤치고 앞으로 걸어 나왔다. 자리를 바꾼다? 이제야 직접적으로 가담하겠다는 의지가 느껴지는데.
이곳을 곧장 노려보는 얼굴엔 옅은 희열과 정도가 과한 살심이 담겨 있었다. 그녀가 나와 만났을 때 여유를 부리며 나를 애쉬의 장애물로 쓰겠노라 말했던 자와 동일 인물이 맞나? 어째서 저렇게 여유를 완전히 잃은 모습이지?
우우웅.
그녀가 우아하게 두 손을 들자 일대에 불길한 기운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대체 왜? 조용히 수장직에서 내려와 아들에게 대를 물릴 만큼 세간의 눈에 띄지 않고 살았던 그녀인데 대체 왜 이렇게까지?
기세만 봐도 좀 전의 화염 회오리보다 더 엄청난 것이 온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건 이전과 같이 단순히 무력으로 물리칠 수 있을 만한 것이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그만둬!”
기세에 질린 사람들이 당황하며 물러나는 것이 보였다. 몬스터 불은 여럿 상대해 봤지만 실제로 사람이 순수한 힘으로 만들어 내는 불은 얼마나 상대해 봤을까?
화르륵.
크게 원을 그리며 불규칙적으로 여기저기 피어오른 불꽃들이 점차 좁혀들며 경로에 놓인 모든 것들을 태웠다. 매개체 없이 타오를 수 있는 불꽃들은 거침없었고 꺼트려도 다시 타오르니 그런 집착적인 공격에 다들 화상을 입지 않으려 허둥댔다.
본직이 불을 상대하는 것이다 보니 대부분의 장비가 내열 소재였지만 끓는 듯한 열기만큼은 감당하기 힘들었다. 드라이어드들이 주인을 지키기 위해 나섰음에도 당장 이곳을 피하는 것 외엔 묘수가 없었다. 비라도 시원히 내린다면 모를까.
“엘더!”
광범위한 회복의 비를 뿌릴 수 있는 내 드라이어드.
아티팩트 안에서 자신이 활약할 때를 기다리고 있던 새하얀 드라이어드가 부름과 동시에 내 앞에 나타났다. 이 아비규환 속에서 본인이 할 수 있는,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뻔히 알고 있지만.
“왜 그래…?”
나의 첫 그래프트이자 위기의 순간마다 날 도왔던 그래프트가 바로 엘더와의 그래프트였다. 그런데….
“그래프트를 사용할 수 없다고…?”
이상했다. 우리 사이에 교감도는 항상 채워진 편이었고 원한다면 언제든 그래프트를 쓸 수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엘더와 그래프트를 사용할 수 없었다.
나의 아름다운 새하얀 꽃나무를 아무리 바라봐도 그래프트를 사용하려고 할 때면 으레 날 잠식해 오는 기분 좋은 열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심장이 두근거리지도 않고 엘더를 향한 깊은 동화력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우리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이 존재해 우리의 교감을 가로 막는다는 기분이 들었다.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최근 어려울 것 같았던 메스키트와의 그래프트도 성공했고 세계수의 힘을 빌리긴 했지만 가막살나무와의 그래프트도 성공했다. 그렇기에 어쩌면 당연할 수도 있는 엘더와의 그래프트를 사용할 수 없다는 사실에 갑자기 엄청난 불안과 두려움이 머릿속을 잠식했다.
“어… 어째서…. 왜 갑자기 이렇지? 아냐. 내가 좀 피곤할 수도 있고.”
“엘더….”
나 또한 큰 충격을 받았지만 엘더 역시 나와 그래프트를 사용할 수 없다는 사실에 상당히 큰 충격을 받은 걸로 보였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고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는 일순 그늘이 짙게 깔린 표정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엘더 역시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엘더에겐 그가 나와 최초로 그래프트를 사용했다는 사실을 은근히 특권처럼 여기며 자랑하는 심리가 존재했다. 처음으로 영혼의 연결을 맺은 드라이어드란 사실에도 자부심을 가질 정도니.
난 나의 모든 드라이어드를 공평하게 사랑했지만 어쩌면 그 점을 자신이 나와 더 가깝다고 여기는 근거로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러니 그 정도 잘난 척은 내 입장에서 애교처럼 보일 뿐이었다. 그런데 이젠 알 수 없는 이유로 그래프트를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다.
“엘더 설마…. 그날 일 때문에 그래?”
엘더와의 다이아 제로 그래프트 후유증으로 한 달이나 기절했었지. 하지만 그건 엘더 탓이라기 보단 주체 못 하고 내 영혼까지 빨아들이려고 했던 세계수 가지 때문이다. 엘더 잘못이 아니니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는데.
이젠 아무렇지도 않은 줄 알았는데 설마 아직도 심리적 요인이 작용하여 그래프트를 사용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 그동안 엘더와 그래프트가 필요한 상황이 없어서 이 지경일 줄은 전혀 몰랐다.
만약 이유가 그 때문이라면 나 역시 충격이 컸다. 극복하지 못했구나. 그것도 모르고 난 지금까지….
“괜찮아. 다른 방도를 찾자.”
“아니! 좀 더 집중해서 교감도를 끌어 올리면 될지도 몰라.”
당장 엘더를 토닥이며 마음의 교류를 나누려 해도 상황이 좋지 못했다. 되지 않는 그래프트를 성공시켜 보려고 여러 번 시도해 볼 시간이 없었다. 엘더는 자신과 그래프트를 포기하려는 날 필사적으로 말렸다.
다이아 제로 그래프트 이후 깨어났을 때 더 이상 나와 그래프트를 사용하지 않겠다고 말했었지. 그래, 내가 다시 쓰러질까 봐 두려워서 그렇게 말했지만. 지금의 엘더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아예 그래프트를 쓸 수 없는 상황에 당황을 넘어선 공포까지 느끼고 있었다.
“난….”
“물론 이대로 너와 그래프트를 사용할 수 없다고 포기하진 않을 거야. 하지만 당장은 무리잖아, 응? 난 너를 책망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아.”
툭, 내 옷을 붙잡았던 엘더의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이번에도 부디 자신을 탓하지 않으면 좋으련만.
“그래프트로 안 된다면 세계수 가지의 축복의 힘을 써야겠어.”
이 영역이 내 테라리움의 영역이라 다행이었다. 테라리움 밖에선 가드닝 스킬을 사용할 수 없으니까.
세계수 가지의 축복은 기이하게도 몬스터 불을 억누르지만 베스탈리스들의 불, 순수한 불은 억압하지 않았다. 그러니 화재가 발생해도 그것이 몬스터 불에 의한 경우가 아니라면 축복이 다스리는 범위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거다.
몬스터 불은 세상에 해롭지만 순수한 불은 인간에게 이롭기 때문일까? 그러니 굳이 막아야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 걸까? 그 불이 아무리 집을 태우고 생명을 화상 입혀도 말이야.
그렇다면 직접 세계수 가지를 조종해 이 일대의 순수한 불이 해로운 것임을 알리고 정화 작업을 진행하도록 만들어야 했다.
차라리… 차라리 처음부터 가드닝 스킬을 썼다면 지금 엘더가 실망하는 일은 없었을 텐데.
“가지가 셋이니 이제 가드닝 스킬도 셋이지.”
28번째 가지의 힘은 내 스스로 가지를 조종할 수 있는 힘이었고 16번째 가지의 힘은 내 생명력으로 주인 없는 드라이어드를 담을 수 있는 가상 아티팩트를 만들어 낼 수 있는 힘이었다.
화재가 빗발치는 이 상황에서 세계수 가지를 끌어왔다간 길드전에서 패하고, 가상 아티팩트 공간을 만드는 건 도움이 되지 않았다.
60번째 가지의 힘은 아직 일깨운 적 없지만….
그래프트 스킬이 드라이어드의 영혼을 느껴야 하는 기술이라면 가드닝 스킬은 내 영혼을 느껴야 하는 기술이었다. 영혼 어딘가에 박혀 있을 세계수의 축복을 느끼고 그곳과 연결된 세계수의 가지들을 느낀다.
부디 이 상황에서 유용한 기술이길.
나와 스케어크로우가 같은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임에도 불구하고 기술이 달랐으니 어쩌면 해당 번호의 세계수 가지가 갖는 고유한 특성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혹시 그 힘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발현할 수 있진 않을까?
하지만 가지를 조종하는 능력은 나도 모르는 사이 갑자기 일깨운 거고 가상 아티팩트를 만드는 능력은 파필리온에게 전승을 받아 배웠는데, 스스로 찾아보려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불을 잠재우기 위해선….
가드닝 스킬의 연료는 그래프트와 같이 시전자의 생명력이었다. 이걸 영혼이 어떤 방식으로 구현화시키느냐가 관점이었다.
꼼실꼼실, 내 영혼 안에서 마치 새싹의 잎처럼 춤추는 작은 형태의 기운이 느껴졌다. 작지만 가진 기운은 결코 연약하지 않았다.
새싹이라고 생각했더니 그 기운이 정말로 새싹처럼 느껴졌다. 갓 잎을 틔워 낸 여린 생명. 이게 잘 자라기 위해선 땅을 잘 골라 줄 필요가 있었고….
핑.
갑자기 28번째 세계수 가지의 가드닝 스킬을 사용할 때의 기운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안전한 곳에서 보호해 준다면 더 잘 자라겠지.
핑.
뒤이어 16번째 세계수 가지의 가드닝 스킬의 기운 형태가 스쳐 지나갔다.
새로운 가드닝 스킬을 스스로 일깨우는 건 어려울 거라 생각했는데 어쩐지 그 방법을 방금 깨달은 것 같다.
생명이 잘 자라길 바라는 소망, 마치 자애로운 신이 세계를 창조할 때 그 안에 살아갈 것들을 위해 내려 주는 축복이 담긴 소망이 구현된 형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달리 구현할 수 있는 소망이라면….
투두둑.
지면을 가볍게 내리치는 경쾌한 소리, 테라리움 주변 일대에 냉기를 머금은 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내가 늘 봐 왔던 푸른빛을 띠는 빗방울이 아닌, 금빛을 띠는 빗방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