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나 오래 기다렸어?”
능글거리는 목소리가 멀리서부터 기름처럼 미끄러져 왔다.
밤이나 새벽쯤에 도착할 줄 알았던 파필리온은 길드전이 시작하기 직전에 도착했다.
아무래도 날이 밝을 때가 덜 위험하겠다고 판단한 거겠지. 언제 도착하나 전전긍긍하던 사람 속은 모른 채 낯빛이 아주 반짝거렸다. 옷도 새하얀 걸 입어서 저대로 아스키아 쪽에 던져놔도 위화감이 없을 지경이었다.
“오는 길은 어땠어?”
파필리온은 아티팩트를 만지작거리며 내 곁에 선 시들링 쪽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곧장 내게로 다가왔다. 그를 바라보는 시들링의 눈빛도 썩 좋진 않았다.
“뭐, 잔뜩 장난을 치면서 온 덕에 어그로는 제대로 끌렸는데.”
예상대로 그가 안전한 16번째 테라리움 밖으로 나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습격이 벌어졌나 보다.
그런데 잔뜩 장난을 쳤다고? 저놈이 죽는 게 두려워서 테라리움 밖으로 못 나오던 놈이 맞나?
“50번째 테라리움 근처에서 마침 강도 사건이 일어나서 그 일대가 떠들썩하더라고. 그래서 도움 좀 받았지. 덕분에 시선을 좀 분산시켜서 제때 도착할 수 있었어.”
소풍이라도 나온 것처럼 생글생글 상쾌한 웃음. 이곳에서 저를 노리는 이들을 꼬리에 잔뜩 달고 왔으니 이제부턴 생사를 걱정해야 하는데 뭐가 저리 여유로운지 모르겠다.
“그런데 일이 좀 커질 수도 있을 것 같아. 아스키아도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머릿수가 적은 것 같고.”
“저게 적다고? 밖에 눈이라도 내린 것처럼 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로 득실대는 게 안 보여?”
“그렇지만, 어쩐지 예감이 안 좋은 게 그 녀석이 올 것 같거든. 날 죽이겠다고 온 놈들이 영 꺼림칙해서.”
뭔가를 알아본 걸까?
“그러니 저 인원으로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모르겠네.”
“그 녀석…? 설마.”
“그래, 애쉬가 올 수도 있을 것 같아.”
파필리온의 가정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인페르노를 불러들이긴 했는데 애쉬가 온다면 조금 다른 문제였다. 난 아스키아와 인페르노가 맞붙어 자멸하기를 노렸던 거지, 인페르노의 수장이 직접 나서서 아스키아와 우리 모두를 상대하길 바란 게 아니었다.
“너 그놈한테 대체 얼마나 밉보인 거야? 그게 아니라면 너 죽이겠다고 수장이 올 이유가 있어?”
외부에 인페르노의 정체가 드러나면 안 된다며. 그런데 수장이 직접 납신다? 너무 지나친 기우였다.
“뭐 60번째 테라리움은 상당히 뒤떨어진 곳이니까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는 거지. 확실한 것도 아니고 그저 예감일 뿐이니까 너무 신경 쓰지는 마.”
자기가 한껏 신경 쓰게 만들어 놓고는.
“됐어. 온 김에 너도 전투나 거들어. 일단 오늘 인페르노가 올 것 같은 예감이 드는 건 나도 마찬가지야.”
준비됐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