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16화 (416/604)

E는 스텔라의 신임을 얻기 위해 이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이용했다.

다년간의 유랑을 통해 세상 각지의 수많은 정보를 끌어모은 점술단의 힘도,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묵묵히 자신을 서포트해 주고 있는 자매들의 힘도. 그리고 아무런 무리 없이 행동할 수 있도록 상사가 과하게 챙겨 준 행동 자금까지.

증거는 절대 남기지 않는다. 모든 내용은 전부 기억력이 뛰어난 E의 머릿속에 있었기에 필요에 따라 꺼내서 짜 맞추면 될 일이었다.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집단의 소굴에 제 발로 들어가는 꼴이기에 E의 안위를 걱정하는 이들이 모두 그녀의 행동을 말렸지만, E에게는 그런 위험 따위 전혀 두렵지 않을 만큼 자신의 힘으로 보답하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

존재도 모르던 자매들을 만나게 해 주고 더 나아가 조부모까지 찾게 해 주었다. E는 조부모의 저택에서 어머니의 초상화를 본 순간, 자신이 혹시 이들의 혈육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모두 떨쳐 버렸다.

“눈은 언니와 닮았어. 분홍빛이 도는 보라색 눈. 저건 우리 중 유일하게 언니만 엄마와 닮은 거야.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다른 친척들도 닮은 사람이 없었는데 오직 언니만.”

“그러게… 정말 누가 봐도 엄마 딸이란 걸 알 수 있잖아. 우리를 모르는 사람이 봐도 눈만 본다면 둘을 모녀지간이라고 골라낼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난 엄마의 머리색과 코를 닮았고 넌….”

“와, 나 엄마 어렸을 때랑 완전 똑같이 생기지 않았어? 이것 좀 봐.”

세 자매 모두 자신의 핏줄임을 여실히 증명해 주는 구석을 한데 모아 온화한 웃음을 짓는 초상화를 보며 E는 다짐했다.

이대로 어린 시절이 완전히 떠오르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소중한 추억을 잊고 사는 건 슬프지만 이젠 곁에 그 추억들이 빚은 존재들이 함께하고 있었다. 함께한다면 언제든 더 소중하고 빛나는 추억들을 새로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의심하고 불안에 떨며 주어진 시간을 아깝게 낭비하는 건 멈추고 현재를 더 가치 있게 살아가야 할 때였다.

자신에게 이 모든 행운을 안겨 준 계기가 된 사람. E는 기회만 온다면 자신의 모든 걸 다 바쳐 반드시 보답하고 싶었다.

그러니 이번 일은 반드시 성공해야만 했다. 스텔라의 신임을 얻고 더 나아가 그녀를 60번째 테라리움으로 이끈다.

상사의 모든 계획은 짧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철두철미하게 쌓아 올려졌지만 단 하나, 외부의 군대를 부르는 계획만큼은 통제가 되지 않는 데다 불확실성이 너무 큰 요소가 가득했다.

기껏 그 외부의 군대, 인페르노를 끌어들여도 제한 시간을 넘겨 버린다면 큰일일뿐더러 자칫 잘못하다간 손해를 더 크게 볼 수도 있었다.

인페르노를 끌어들이기 위해 많은 공작들을 펼쳤지만 아직 낚싯대를 당길 만큼 확실한 입질이 없었다. 그래서 E가, 아니 에우노미아가 직접 그들의 입에 바늘을 꿰어 넣기 위해 나섰다.

예언자? 아니, 에우노미아에게 예언 능력 따윈 없었다. 조부모가 전전대 폴리움텔러였다고 하더라도 세 자매 중 점술은 물론 드루이드의 능력을 타고난 사람도 없었다.

현재 에우노미아가 스텔라의 통찰력을 가리고 현혹하는 모든 건 그저 철저히 계산된 행동에서 비롯된 잡기술에 불과했다.

스텔라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를 곁에 가까이 둬선 안 됐다.

아무리 일상이 지루해 자극이 필요하더라도, 해묵은 꿈에 생기를 불어넣어 줄 사람이 나타났다 하더라도, 모든 일이 잘못되어도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을 거란 넘치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에우노미아처럼 신원이 불확실한 자에게 곁을 내어 줘선 안 됐다.

에우노미아는 스텔라를 끈질기게 관찰한 끝에 그녀가 달갑게 여기고 선호하는 인간상을 완벽하게 흉내 낼 수 있었다.

붙임성이 좋아 곧잘 따르고 함부로 의심하지 않으며 자신이 관련되지 않은 모든 일엔 관심을 끄는 신중함. 마치 스텔라를 위해 존재하는 맞춤 인형… 아니 그보다는….

“그런데 궁금하군. 그쪽이 내게 이렇게까지 해서 뭘 얻으려는 걸까? 아직까지 다이아를 달라는 이야기는 한 적 없는데.”

“그냥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인걸요. 아, 이건 너무 그런가? 솔직하게 말해도 돼요?”

“어디 말해 봐요.”

“당신이… 제가 어릴 때 돌아가신 어머니를 닮으셨거든요.”

“…….”

“그리고 그분도 당신처럼 더 대단한 일을 하실 수 있었는데 그러질 못하셨어요. 그래서 이건… 음, 어머니의 한을… 아니, 그분은 그런 현실에 그냥 순응하셨으니까. 그냥 저의 자기만족이에요.”

“어머니라…. 그러고 보니 내 아들과 비슷한 나이대로 보이네요.”

“아들은 좋겠네요. 이렇게 좋은 어머니도 계시고. 전 너무 어릴 때 돌아가셔서 항상 어머니가 그리웠거든요.”

스텔라가 아들 대신 원했던 그리고 상상했던 이상적인 딸의 모습을 에우노미아는 찾아낸 것이다.

두 모자 사이가 소원한 것과 별개로 스텔라는 베스탈리스의 힘을 온전히 이을 수 있는 딸을 바라 왔다. 더구나 저물어 버린 꿈을 딸을 통해 이룰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왔기에 의식의 한켠에 그런 바람들이 항상 남아 있었다.

에우노미아가 거짓된 진실을 드러낸 이후로 스텔라는 그녀를 대할 때 좀 더 경계가 허물어졌다.

인간적인 호감을 얻고 나니 에우노미아에게는 스텔라를 속이는 일이 더 쉬워졌다. 예언의 힘이 있다고 믿게 만들기 위해 미리 조작된 결과와 플로라에게 슬쩍한 정보를 들이밀며 철저히 공략해 냈고, 마침내 원하는 결과를 목도한 상태였다.

“요즘 60번째 테라리움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듣긴 하지. 후원 행사가 열릴 예정이라거나….”

조직에서 제2의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의 기반을 만들기 위해 경매에 나갔다가 정체를 들켜 체포되었다고 했던가. 스텔라가 맡고 있는 ‘상속되는 불꽃’이 아닌, 요새 봄버부터 이래저래 사고가 끊이질 않는 ‘개척하는 불꽃’의 교단원 하나가 잡혔다.

어떻게 정체가 들켰는지도 궁금하지만 만약 쓸데없이 이쪽에 대한 정보를 분다면 그것대로 곤란했기에 ‘내밀한 불꽃’ 쪽에서 암살을 노리고 있었다.

“그 모든 게 당신을 향한 신호였던 거예요. 끊임없이 당신을 불러들이는데 눈치채지 못했던 거죠.”

“날 부르는 신호?”

“네, 운명은 제아무리 가려지고 비껴 간다 하더라도 결국은 정해진 방향을 향해 나아가려는 성질이 있어요. 어쩌면 당신은 그동안의 삶에서 수없이 많은 신호를 받았겠지만 업이 시야를 가리고 방해하니 알아차리지 못했던 거예요.”

“그 말은 꼭 내가 많은 기회를 놓쳤다는 것처럼 들리네.”

스텔라는 에우노미아의 운명 말장난에 제법 맞장구를 잘 치며 놀아 주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본인이 생각보다 그녀를 많이 믿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아직까지 에우노미아와 어울려 주는 일이 마치 호수에 발 한쪽만 담근 듯 언제든지 빠져나올 수 있는 상태라 착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가슴께에 물이 들이차는 수심에 서 있었다.

스텔라는 어느새 자신이 놓쳤던 그 많은 기회들을 잡았을 때 달라졌을 미래를 상상하며 아쉬워하는 데에 아무런 이상도 느끼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많이 바쁘시면 살짝만 다녀와도 괜찮지 않을까요? 물론 인과 관계를 따져 가며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운명을 따라가는 게 좋긴 하지만….”

“아니, 어차피 조직에서 조만간 그곳에 사람을 보낼 것 같은데 책임자 자리를 바꿔 내가 직접 다녀오는 게 좋겠어. 그편이 더 자연스럽겠지.”

“맞아요. 그렇다면 그날을 빨리 앞당기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늦게 가면 효력이 떨어질 거예요.”

“빨리라….”

에우노미아는 슬쩍 캘린더를 바라보는 스텔라의 시선을 쫓았다. 그리고 제이가 인페르노가 제때 도착하지 않을 일은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라고 생각하며 살포시 웃음을 지었다.

***

길드전 2일 차, 늦는 일 없이 감시자들의 주관하에 다시 전투가 재개될 것이다.

나와 길드원들 역시 미리 자리에 나와 시작을 기다렸다. 멀리 어제와 다른 형태로 진을 치고 있는 적들이 보였다. 간밤에 머리를 참 많이들 굴리셨는지 전투의 양상이 어제와 달라질 것으로 보였다.

먼저 밤과 낮의 형태가 다른 정문의 상징물을 보고 그것이 드라이어드의 그래프트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어느 정도 눈치를 챈 듯하다. 그래서인지 어제처럼 후문을 먼저 무너뜨리려는 시도를 버리고 정문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아스키아 길드는 어제의 깔끔하고 단정한 모습으로 열 맞춰 나타났던 모습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새하얀 옷은 때가 탔으며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한 사람들과 드라이어드들은 모두 초췌한 모습으로 전쟁터에 서 있었다.

그래도 아직까진 다들 얼굴에 생기가 가득해 보였는데 고작 하루 만에 저만큼 무너진 거라면 3일째는 어떻게 될지 기대가 됐다.

“결국 추가 보급은 받지 못한 것 같던데.”

아스키아가 보급을 받았다는 소식 대신 간밤에 50번째 테라리움 부근에서 참혹한 강도 사건이 일어났다는 소식은 들었다.

겁도 없지. 새까만 밤에 치안도 나쁜 테라리움 근처를 값비싼 물건들을 잔뜩 들고 지나가려고 하다니. 그것도 타깃이 되기 딱 좋은 소수 인원으로 말이야.

그래도 어제보다 대치 인원수가 좀 더 늘어난 듯하다. 정문으로 전력이 몰린 데다 길드 이터도 끝내 토벌됐는지 분산시켰던 전력도 돌아왔다.

길드 이터는 발목을 붙잡는 역할에서 더 나아가 몇몇을 전투 불능 상태로 만들었고 본래 만들어진 목적보다 더 훌륭한 소임을 완수한 채 사라졌다.

“당분간 이 근처에 불이 나타나진 않겠네. 잔뜩 긁어모아서 만든 거니까. 그나저나 이젠 어떻게 상대해 줘야 하려나.”

이젠 내가 지켜야 할 정문이 타깃이 된 상황이지만 그렇다고 후문의 전력을 빼 와 메꿀 생각은 없었다. 더구나 1일 차처럼 시들링 혼자 방패막이로 내세워 시간을 끌게 만드는 작전도 끝이었다. 지금이야말로 새로운 전력들이 나설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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