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당히 빽빽한 대나무 숲, 여기 있는 대나무는 모두 14번째 테라리움에서 사들인 것이었다. 다른 대나무는 안 된다. 오직 오래된 대나무 군락지의 것들만 효력이 있었다.
대나무 군락지가 제법 넓었기에 망정이지, 이곳 말고도 여러 테라리움에 적당히 장소를 조정할 정도로 대나무를 뽑아 가도 많이 티가 나지 않아 다행이었다.
물론 군락지인 만큼 그곳에 사는 드라이어드들이 있었고 포레스트의 왕도 있었다. 그들은 그동안 보존에 힘써 준 인간들에게 감사를 표했고 대나무를 왕창 뽑아 가는 것은 물론 드라이어드들까지 섭외해 데려가는데도 별다른 제지를 하지 않았다.
“완전히 멸종시키려는 것도 아니고 겨우 옮겨 심는 것인데 거절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어차피 이곳은 다시 새로운 세대로 빽빽해질 터이니 너무 심려 마십시오.”
메모리아는 보는 것만으로도 청량함이 느껴지는 신비한 대나무 드라이어드 왕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오랜 연구가 겨우 결과를 앞두고 있었으므로 안 된다고 하면 무력으로 빼앗아 갈 생각까지 했던 자신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썩은 양심을 욕하는 메모리아의 곁으로 누군가 다가와 보고했다.
보고를 한 이는 연금탑 내에선 자신 밑의 연구원들을 호령할 만큼 지위가 높은 연금술사였으나 학장 앞에선 한낱 월급쟁이였다. 그렇기에 그는 난데없이 집과 거리가 먼 30번째 테라리움에서 일주일 내내 외근 중이더라도 고분고분한 태도로 현장의 진행 상황을 보고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오차 없이 완벽하게 준비됐겠지?”
“네, 곧 있으면 반응을 보일 겁니다.”
물론 현장에서 직접 뛰는 건 연금술사와 함께 강제로 딸려온 산하 연구원들이었지만.
“편차는 어느 정도로 보고 있지?”
“60번째 테라리움과의 거리를 계산해 보면 세 시간 정도입니다. 앞으로 효율을 높이는 방법을 연구한다면 이 편차를 더 줄일 수 있을 겁니다.”
그 말에 메모리아는 대나무 숲과 관객석 사이에 크게 자리 잡은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뼈대는 살아 있는 대나무로, 직사각형 틀을 엮은 후 안에 끼운 얇은 유리막 사이에 순도 높은 포션을 가둬 유리창처럼 만들었다. 그리고 곁에 대나무 드라이어드가 서서 특수한 힘을 사용 중이었다.
“오, TV네요.”
완성된 결과물을 본 귀인이 ‘TV’라고 말했기에 정확한 뜻은 모르나 앞으로 저것은 TV라 불릴 것이다.
가장 투자를 많이 한 개인이나 기업의 이름 혹은 그들이 직접 지은 명칭이 연구물에 붙는 것은 흔했다.
메모리아는 대나무가 가지는 신화와 대나무 숲이 만드는 특이성을 통해 이 방법을 고안해 냈다.
‘참 신기한 신화였지.’
메모리아는 가정을 확실시하기 위해 얼마 없는 드라이어드 신화에 대한 자료를 모두 뒤져 겨우 대나무에 대한 신화를 찾아냈었다.
먼 옛날 인간의 힘으로 감당하기 힘든 엄청난 미래를 엿본 대가로 수명이 10분밖에 남지 않은 예언자가 죽기 직전 대재해를 예언하는 말을 읊조리고 숨을 거뒀는데, 그곳이 마침 울창한 대나무 숲이었다.
그리고 훗날 이곳을 방문한 사람들에게 예언자의 목소리를 그대로 간직하여 전달한 대나무 숲 덕에 생명들이 무사히 재해를 피할 수 있었다는 신화였다.
‘녹음과 전파, 어째서 여태 이런 힘을 가진 나무를 몰랐을까?’
대나무는 겉으로 다 다른 나무지만 땅속으로는 하나의 뿌리로 연결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기에 시들 때도 일제히 시든다고 했던가.
테라리움 곳곳에 산발적으로 만들어 놓은 대나무 숲도 고심해서 한 뿌리에 엮인 것들을 모아 심은 것이었다.
그리고 숲의 모체이자 왕이 태어나고 왕이 수호하며 왕의 그릇이 되는 모그룹은 각각 16번째, 28번째 그리고 60번째 테라리움에 심어져 있었다.
“한 뿌리로 이어지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문제는 이 ‘전파’라는 특성을 제대로 이용하기 위해선 뿌리가 이어져야 하는데 아무리 위대한 왕이라 해도 테라리움 단위로 떨어진 숲들을 하나로 이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 문제점을 듣던 귀인이 어려울 것 같은 문제를 단번에 해결해 주었다.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대신 기준점을 16번째, 28번째, 60번째 테라리움으로 잡으면 될 거예요.”
다만 모그룹이 이 세 개의 테라리움에 있다 보니 최초 전파지도 해당 테라리움에서부터 가능하다는 특수성이 있었다.
비록 2번째 테라리움에서 다른 곳으로 널리 퍼뜨린다는 메모리아의 원대한 계획과는 맞지 않았지만 음성과 영상을 널리 옮기는 것만 성공한다면 그런 문제 따위 차차 해결하기만 하면 된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메모리아 TV의 이론상 작동 방식은 다음과 같았다.
모그룹에서 음성과 영상을 입력하면 이어진 하위 그룹들의 TV에 전달되는 방식이었다. 포션을 정제한 유리창엔 영상이 담기고 드라이어드가 조정하여 숲에 바람을 불어넣으면 음성이 전달된다. 실시간은 아니고 거리에 따라 출력 시간 편차가 존재했지만, 아무리 빠른 이동 수단을 이용한다 한들 이보다 더 빠르고 끊김 없이 전달할 순 없었다.
‘성공만 한다면….’
연금술 역사에 커다란 한 획을 그으리라.
메모리아는 긴장과 흥분으로 떨리는 주먹을 꾹 쥐며 이를 악물었다.
‘어쩌면 내 이름이 포션을 개발한 ‘포티오’ 그리고 말없이 달리는 마차를 개발해 낸 ‘카루스’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될지도 몰라!’
귀인은 이 연구를 60번째 테라리움에서 진행될 길드전을 생중계할 목적으로 후원했다 말했지만, 제대로 완성된다면 보다 더 많은 용도로 이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저작권에 대해 큰 지분을 갖는 귀인이 허락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학장님, 뭔가 나옵니다!”
그 말을 시작으로 몰려 있던 사람들의 웅성거림도 커졌다.
모니터에서 정말 영상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세 시간의 편차가 있다고 했으니 아마 지금 보이는 장면은 세 시간 전 광경이겠지. 그런데… 정말 성공했다고?’
뒤늦게 대나무 숲에서도 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긴박한 전투 소리가 바람 소리를 타고 울창하게 퍼지며 군중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그제야 그들은 지금 듣고 보는 광경이 한창 세간을 뜨겁게 달구었던 길드전 실황이란 것을 깨달았다.
“세상에! 정말 여기서 60번째 테라리움의 일을 볼 수 있다고?”
“소식지 기자들도 위험 때문에 접근 금지당해서 실황은 알 수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생생하게 볼 수 있다니!”
“신기하다. 환각을 보는 기분이야. 이것도 드라이어드의 능력인가?”
“드라이어드 능력과 연금술을 합친 거겠지. 이야, 연금탑이 대단한 일을 해냈네.”
사람들의 반응을 들으며 비로소 메모리아는 자신의 연구가 성공했음을 느꼈다. 모두가 불가능할 거라 생각했던 난제를 자신이 해결하고 만 것이다.
오랫동안 1번째 테라리움의 연금탑을 제치고 2번째 테라리움의 연금탑이 권위가 가장 높은 자리라고 울려 퍼지리라.
“저것 봐. 하얀 유니폼, 전부 아스키아 길드원인 거야? 대형 길드답게 수가 어마어마하네.”
“그런데 상대는 그렇게 많아 보이지 않는데.”
“저거 설마… 아이언비스트 아니야?”
영상 구도는 적당히 높은 고지대에서 60번째 테라리움을 내려다보는 구도였다.
그곳의 모그룹은 일부러 생중계를 위해 테라리움 안이 아닌 밖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치는 길드전이 벌어지는 광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런데 왜 하필 전파의 첫 시작을 길드전으로 한 걸까?’
메모리아는 마치 홀린 듯이 집중해서 TV를 바라보는 군중들 사이에서 고민했다. 저걸 좀 더 유용하게 사용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는데. 그녀라면 당장 자신이 후원하는 무명 오케스트라를 대상으로 올렸을 것이다.
이런 방법이라면 단숨에 많은 이들에게 대상을 각인시켜 쉽게 명성을 얻을 수 있었다.
‘내용이 엄청 자극적이니 관객들의 집중도도 높아.’
대규모 드루이드들의 싸움. 그동안 보기 힘들었던 희귀한 드라이어드들이 수없이 참전해 온갖 진기한 기술들을 펼치자 모니터가 형형색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이거… 혹시 위험한 건 아닐까? 경계해야 될 수도.’
메모리아는 문득 이 사람들이 이런 장면에 길들여지는 미래를 상상했다가 소름이 돋았다. 얼마든지 유용하게 쓸 수 있었으나 그만큼 전파자의 의도에 따라 충분히 변질될 수도 있었다.
연금술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본디 자신이 만든 결과물이 어떠한 일을 초래할지도 끊임없이 경계해야만 한다. 불과 얼마 전 16번째 테라리움의 연금탑에서 터진 불경한 사건도 그러했다.
‘그래도 좋은 사람으로 보였으니 내가 우려했던 결과까진 가지 않겠지.’
메모리아는 자신의 연구에 아낌없이 투자한 귀인을 떠올렸다. 투자자 특유의 거만함도, 밑도 끝도 없이 진행을 의심하며 달달 볶는 초조함도 없었다. 물론 인상만으로 사람을 판단할 수 없지만 감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메모리아는 애써 불안함을 누르며 TV에 집중했다.
모니터엔 불길한 기운이 풍겨 나오는 의문의 검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에 놀라 허둥대는 아스키아 길드원들의 모습도 보였다.
“저게 다 뭐야?”
“맞은 사람들 얼굴 좀 봐. 완전히 새파래졌는데?”
“나 저런 비슷한 걸 본 적 있어. 독… 아니야?”
“드라이어드들 전투는 진짜 장난 아니네.”
비를 피해 도망치려는 사람들 뒤엔 넘실대는 끈적한 검은 물 늪이 자리하고 있었다. 아스키아 길드원들은 사면초가였다. 회복이 가능한 드라이어드들이 신성한 빛을 뿜으며 저항하지만 독의 잠식 속도를 막기엔 역부족인지 쓰러지는 사람들이 눈에 띄게 많아졌다.
“저러다 다 죽는 거 아니야?”
“어어…. 막는다!”
하지만 기세도 잠시, 곳곳에서 하늘을 향해 펼쳐진 방어막이 아래의 사람들을 지키기 시작했다.
“그래!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당하면 아스키아가 아니지!”
소문을 듣고 몰려온 사람들로 인해 주변이 북새통을 이르자 틈새를 노려 노점이 깔리고 잡상인이 호객 행위를 하기 시작했다.
더구나 이런 경쟁 구도에선 빠질 수 없는 것이 있었으니.
“자자, 다들 판돈 거세요! 과수원에 허가받은 합법 도박입니다! 하지만 금액 제한이 있으니 자세한 사항은….”
투기장에서나 성행한다는 내기 도박도 머리를 내밀기 시작한 것이다.
“아스키아에 너무 몰린 거 아냐?”
“저 인원수를 보고 누가 상대편에 걸겠어? 물론 상대가 이긴다면 배수가 어마어마하겠지만. 과연 대형 길드를 이길 수 있을까?”
가이아 대 아스키아의 배당률이 무려 190배에 달할 정도로 많은 이들이 아스키아의 승리를 점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