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12화 (412/604)

한 번 쓴 기술은 숙련된 드루이드에게 통하지 않는다.

이곳에서 태생 등급이 높은 드라이어드는 당연히 등급이 낮은 드라이어드보다 강력하지만, 등급이 가장 낮은 노멀 등급의 드라이어드라도 애정을 들여 육성하면 얼마든지 강해질 수 있었다.

시작점이 다를 뿐 끝이 존재하지 않으니 결국 시간을 들인다면 드라이어드들의 전력 싸움은 거기서 거기라는 거다.

그렇기에 전투에서 승패는 전부 드루이드의 경험에 의해 갈리게 된다.

얼마나 많은 드라이어드들을 접해서 그들의 특성을 알고 있는지, 특수한 전략으로 맞서는지에 따라서 말이다.

양성소 직원 채용 시험에서 스코풀루스가 단번에 승리를 거뒀던 것처럼, 노멀 등급이라 얕보였던 데이지가 상상도 못 했던 스킬을 일깨우며 곧바로 전황을 뒤바꾼 것처럼.

그래서 후문의 전투처럼 막싸움이 벌어지지 않는 한, 이 정문에선 최소한의 전력으로 최대한의 효율을 내기 위해 드라이어드를 전투를 내보낼 때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만 했다.

그런 의미에서 시들링은 미끼이자 좋은 선두 주자였다.

그는 매우 강했기에 초반엔 상대를 압도했지만 시간이 흐르자 점점 밀리는 추세였다. 그들이 시들링의 전투 방식을 모두 학습해 버렸기 때문이다. 오히려 홀로 정문 앞을 틀어막는데 이 정도까지 시간을 번 것만으로도 놀라울 정도였다.

괜히 투기장에서 5연승을 거둔 사람이 아니었다. 연속으로 투기장에 출전했으니 상대는 시들링이 데리고 있는 드라이어드들을 이미 어느 정도 다 파악했을 것이다.

더구나 그도 나처럼 드라이어드들을 굳이 숨기지 않고 함께 여행을 다니는 타입이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버티고 있다는 건 전투 패턴을 간파당해 쓰러지는 일 없도록 계속해서 전투 방식을 바꿔 가며 변칙적인 플레이를 선보이고 있다는 뜻이었다.

같은 드라이어드들을 데리고 있어도 그의 오랜 전투 경험을 바탕 삼아 수십 가지가 넘는 전략을 선보인다. 그가 길드에 가입하며 얻게 된 특별한 길드 특성 ‘견고한 뿌리’는 그냥 생긴 것이 아니란 거다.

저 멀리 벨라돈나가 주축이 되어 광범위 독을 뿌려 가며 벌이던 전투도 기세를 잃자 메인이 바뀌는 것이 보였다.

저 수많은 드라이어드들 중에 독에 면역이 있는 드라이어드나 디버프를 해제할 수 있는 드라이어드가 존재하지 않을 리 없었으니 결국 벨라돈나의 광범위 공격에 대해 적들이 모두 적응을 끝냈다는 말이었다.

그래도 독을 완전히 거두진 않겠지만 이전처럼 압도적인 위력은 기대하기 어려우리라. 벨라돈나가 기술을 사용하려고 하면 그녀의 공격 범위 밖의 원거리 드라이어드들이 일제히 그녀를 저지하기 위해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지금쯤이라면….”

이 전투에 시작부터 내 드라이어드들을 전부 출전시키지 않는 이유가 모두 이 때문이다.

난 벨라돈나의 공격이 주춤하는 때에 맞춰 바곳을 불러왔다.

익숙해져 버렸다면 변칙을 주어야 할 때. 남들 사정 봐줄 필요 없이 마음껏 날뛸 수 있는 공간. 바곳이 눈에 띄게 활약할 수 있는 전투이기도 했다.

“출전하게 된다면 나보다 시들링의 드라이어드들에게 맞추도록 해.”

“열심히 할게요…!”

공격형으로 턴 오버한 바곳이 스태프를 굳게 쥐고 전장으로 뛰어갔다.

광역 공격이야말로 대규모 전투의 꽃이었다. 특히나 디버프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더욱. 그만큼 적들이 가장 경계할 공격이지만 그렇다고 금방 쓰임새를 다해 뒤로 물러나기엔 너무나도 아까운 공격이기도 했다.

그러니 지금부터 바곳이 합세해 다시금 광범위 공격의 두려움을 심어 주는 거다.

디버프를 해제할 틈도 없이, 버텨 낼 수 없을 정도로.

바곳이 나서자 시들링이 기다렸다는 듯이 벨라돈나와 그래프트를 펼치며 극독과 극독이 만나는 최고의 시너지를 이끌어 내려는 것이 보였다.

벨라돈나와 바곳의 기술 공통점이라면 아군을 제외한 모든 이들에게 해롭다는 것이었다. 세부적으로 특정한 적을 고르거나 제외 후 공격할 수 있는 컨트롤이 안 되는 기술. 즉, 매우 위력이 강하나 기술을 펼치는 순간 아군 제외 모두가 적이 되어 당할 수밖에 없게 된다.

상대편에게도 같은 기술을 사용할 수 있는 드라이어드가 있을 수 있으나 지켜본 바론 그들이 나선 적은 없었다.

모두가 하나의 길드에 묶여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다간 동맹까지 공격에 당할 위험이 있을뿐더러 아군의 공격에 맞지 않기 위해 거리를 벌린다면 되레 우리에게 사정 범위를 대놓고 알려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이 모든 인원이 하나의 파티로 묶일 수도 없겠지.

그렇다는 건 지금 이렇게 막무가내로 광역 공격을 퍼부을 수 있는 건 우리뿐이란 뜻이었다.

하지만….

“4일…. 이런 식으로 4일을 버텨야 해.”

물론 1번째 테라리움이 정한 소강 타임이 있긴 했다. 지금도 그들이 내건 룰을 제대로 지키고 있는지 감시하기 위해 파견된 사람들이 60번째 테라리움 안에서 지켜보고 있는 중이었다.

해가 완전히 사라져 어두워지면 양측 모두 전투를 그만두어야 했다.

우리 모두에게는 원초적으로 서로가 아닌 공통된 적, ‘불’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지금 이 상황도 따지고 보면 전력 낭비나 다름없기에 불을 상대해야 하는 입장에서 보면 자멸을 부르는 모순적인 행동이었다.

그러니 피해를 최대한 줄이며 다시 서로가 회복할 수 있는 시간을 끼워 넣은 것이었다.

밤이 되려면 아직 멀었고 적은 여전히 많았다.

공을 세우기 위해 득달같이 달려드는 기세는 첫날인 만큼 유독 거셌다.

“그래도 아직 내 패를 다 보인 건 아니니까 괜찮아.”

상대적으로 정문을 방어하는 수가 적다는 소식이 들어갔는지 후문으로 향했던 전력들이 돌아오는 것이 보였다. 어쩌면 예상했던 것보다 좀 더 빨리 가진 패들을 까야 할지도 모르겠다.

***

“여기서 뭐 한다고 하지 않았어?”

“그랬지. 그래서 다들 몰려 있는 건데 대체 뭘 하려는 걸까나?”

연금탑에서 파견된 사람들이 빈터에 대나무를 심어 작은 숲을 조성한 것이 바로 저번 주였다. 그 이후 연금술 실험을 벌이느니 마느니 하며 오가던 사람들을 전부 통제하더니 갑자기 특별한 행사를 할 거라며 사람들을 불러 모은 게 오늘이었다.

“엄청 대단한 연금술을 성공시켰다던데.”

“그럼 그걸 시연하려는 게 아닐까? 그럼 좀 기다릴 만하지. 원래 그런 건 돈 주고도 못 보는 거 아냐?”

“뭐 얼마나 대단한 걸 하려고. 그런데 좀 기대되긴 하네.”

대나무 숲을 전면에 두고 후면에는 사람들이 앉을 수 있는 자리가 빼곡히 놓여 있었다. 그리고 워낙 홍보 효과가 대단했던 터라 마련된 자리는 빠짐없이 사람들로 채워져 있었다.

이런 기이한 장소가 마련된 것은 이곳 30번째 테라리움뿐만이 아니었다. 연금학회, 특히나 2번째 테라리움의 연금탑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고 단기간에 넓은 장소를 확보하고 인력을 불러 모을 행동력이 어느 정도 있는 테라리움이라면 이곳과 똑같이 기이한 대나무 숲이 조성되어 있었다.

다만 1번째 테라리움은 예외였다. 그들은 이런 방식의 연금술에 의구심을 품을뿐더러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고 이 연금술을 개발해 낸 2번째 테라리움도 굳이 라이벌 관계나 다름없는 그들에게 강하게 권고하지 않았다.

‘하여튼 의외로 꽉 막힌 것들. 이런 역사적인 순간을 놓친 것을 땅을 치며 후회하게 될 것이다.’

오늘 이 자리에 나와 있는 2번째 테라리움의 연급탑 학장 ‘메모리아’는 1번째 테라리움을 까며 일이 제대로 진행되고 있는지 살폈다. 굳이 본진인 2번째 테라리움이 아닌 30번째 테라리움에서 일을 벌이고 있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마치 세계수가 주신 기회와 같았지. 연구비가 너무 많이 들어서 테라리움에 계속 요청하는 것이 미안해질 지경이었는데 마침….’

마침 메모리아의 오랜 숙원과 같은 연구에 마침표를 찍어 줄 귀인이 나타났다. 물론 그 귀인이 메모리아에게만 나타난 것은 아니었지만 우연히 메모리아의 연구와 이해관계가 잘 맞았기에 그녀는 이것이야말로 자신에게만 주어진 기회라고 생각했다.

다른 연금탑에서 뒤늦게 귀인의 요구를 맞추기 위해 연구에 뛰어든다 해도 이미 몇 해에 걸쳐 해당 주제로 연구를 진행해 온 메모리아를 이길 수 없었다.

메모리아는 먼 거리에 있는 사람들과 벌을 이용해 단편적인 문자만 주고받는 답답한 현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문자에서 더 나아가 소리와 영상을 전달하고 싶었다.

그녀의 고향인 2번째 테라리움은 예술과 학술의 테라리움으로, 특히나 이 둘은 많은 이들이 음미하고 학습할 때 가장 가치 있는 것들이었다.

그녀는 힘 있고 부유한 자만이 이것들을 독차지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자만이 오직 2번째 테라리움에 도달할 수 있었으므로 오랜 시간 동안 이 격차를 해소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고민했다.

그래서 오랜 고민 끝에 나온 해답이 사람들이 올 수 없다면 ‘가져가서 보여 주면 된다’였다.

물론 연금탑이나 아카데미를 통째로 옮기는 것과 같은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음성과 영상을 이동시키는 것 말이다. 마치 먼 거리에서 벌을 이용해 문자를 주고받는 것처럼 예술과 학술을 전달할 수 있다면.

하지만 그게 가능한 벌조차 겨우 제한된 수의 글자만 옮길 수 있었기에 다른 수단을 찾아야만 했다.

그녀의 오랜 연구가 실패를 거듭하고 제자리걸음만 하던 때, 실마리는 아주 의외의 곳에서 찾게 되었다.

“학장님, 그 소문 들으셨어요? 유령이 나온다는 소문이요. 14번째 테라리움에 대나무 숲이 있는데 거기서 유우령이 나온대요, 글쎄.”

“유령? 아니 연금술을 한다는 사람들이 그런 걸 믿어? 드라이어드를 착각한 게 아니라?”

“아니 글쎄 아무도 없는데 목소리가 들리고 웃음소리도 들리고….”

14번째 테라리움의 남쪽에 위치한 오래된 대나무 군락지, 정취도 있고 오랜 세월 불을 이겨 내고 자라난 만큼 역사적 가치가 있기에 14번째 테라리움이 잘 관리하고 있는 곳이었다.

과거엔 숲을 보존하기 위해 사람들을 통제했지만 테라리움이 새로운 연합 사업에 뛰어들며 바빠지다 보니 아예 관광지로 오픈 후 부가 수입을 내는 방향으로 노선을 틀었다.

그런데 이상한 소문이 돌게 된 것도 그때부터였다.

대나무 군락지에 아무도 없는데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는 괴소문.

“아무도 없는데 소리가 들린다고?”

메모리아는 곧장 14번째 테라리움의 대나무 군락지를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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