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11화 (411/604)

지금 달려가는 곳은 테라리움의 정문이었다.

아스키아 길드보다 늦지 않게 도착하려면 빙 둘러 가는 것이 아닌 직선 경로로 달려야 했다. 그렇게 되면 정문 근처에서 그들과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결혼식 사건 때문에 내 인상착의를 알고 있는 자가 상당히 있었기에 곤히 테라리움 안에 숨어 있어야 할 내가 밖에서 돌아다니는 건 먹이가 스스로 밑간을 하고 냄비로 뛰어드는 것처럼 보일 테다.

아, 아스키아 길드 유니폼을 따라 흰옷이라도 맞춰 입을 걸 그랬나?

하지만 크게 걱정은 되지 않는다.

저 멀리 60번째 테라리움에서 누군가 성큼성큼 걸어 나오고 있었다.

햇빛을 받아 서슬 퍼렇게 번쩍이는 은빛 갑옷을 입은 거대한 기사, 시들링이었다.

“저자가 왜 벌써 밖으로 나오는 거지?”

시들링의 이른 출전에 아스키아 길드원들이 의심스러운 목소리로 수군거리는 것이 들렸다.

시들링이 할 일은 날 마중 오며 길을 트는 것이었다.

“저쪽에!”

그리고 유독 튀는 내 존재가 그들의 눈에 띄는 것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예상했던 대로 엄청난 어그로가 끌렸다.

“상징을 지키고 저자를 잡아라!”

내가 길드 상징물을 노리고 홀로 침투한 것이라 착각했는지 아스키아 길드원들은 그렇게 대놓고 자랑하던 황금 길드상을 가렸다.

“겁이 없구나!”

선두에서 전진하고 있을 라줄리가 소식을 듣고 날 잡기 위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로즈우드의 바이올린 소리가 들리고 페리윙클의 날카로운 채찍이 지면을 찢으며 날 향해 다가오는 적들을 막아섰다.

“잘 부탁해. 지나갈게.”

“내게 맡겨라.”

난 안전하게 시들링의 공격 구역을 지나치며 늦지 않게 정문에 도착할 수 있었다.

“겨우 이명(異名)따위에 겁먹지 말아라! 상대도 우리와 다를 바 없는 드루이드다!”

시들링은 그가 가진 위명 역시 하나의 전투력이나 다름없었다.

투기장의 제왕, 5회 연속 우승에 빛나는 제패자를 앞에 두고 섣불리 공격을 할 수 있는 자가 많지 않았다.

그들이 갈팡질팡하는 사이 망설임은 퍼지고 퍼져 잠시간 군단을 프리징 하는 결과가 나왔다.

겨우 사람 하나를 겁내서 동선이 꼬이는 걸 보며 그 수장은 얼마나 속이 탈까 싶다.

“이래서 유명인, 유명인 하는 건가 봐.”

난 아직까지 덜 완성된 정문의 상징물을 향해 뛰며 웃었다. 이 상징물은 내가 있어야 완성된다.

아스키아의 것처럼 금칠을 하지도, 예술성이 포함되지도 않은 정문의 상징물은 그저 포악해 보였다.

회오리 모양의 결대로 나무가 휘감아 올라간 기둥, 이를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뻗어 나간 뾰족한 나뭇가지들이 입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거대한 장애물이 되었다.

“저렇게 자랑스레 길드 문양을 상징물로 들고 올 줄 알았다면 우리 길드도 문양을 만들 걸 그랬나 봐. 배알이 꼴리네.”

난 시들링을 겨우 뚫는 데 성공한 적들이 정문에 당도하려는 걸 보고 가막살나무와 그래프트를 펼쳤다.

세계수의 가지로 만든 스태프를 들고 세계수를 불러와 내 영혼을 채웠다.

일시적으로 가막살나무와의 교감도를 증폭시켜 강제로 그래프트를 벌이는 일.

어쩐지 이런 방식으로 그래프트를 자주 벌여서는 안 되겠다는 예감이 문득 들었다.

가막살나무는 무기인 자신의 널찍한 대검을 들어 내가 든 스태프를 향해 찔러 넣었다.

그러자 마치 스태프에 검이 스르르 녹아드는 것처럼 삼켜졌고 이내 세계수의 가지로 이루어진 뼈대에 가막살나무의 가지와 꽃, 잎, 열매가 휘감기며 일제히 돋아났다.

검은빛을 띠는 유연한 줄기 위로, 빗살무늬로 쭉쭉 뻗은 너른 잎에 소복이 피어난 하얀 꽃 그리고 보석처럼 매달린 붉은 열매들까지.

단순히 백옥 같은 가지로 이루어졌던 스태프가 어느새 오색찬란한 모습으로 변모했다.

뒤이어 벅차오를 정도로 두근거리는 심장에서부터 온몸으로 뜨거운 열기가 삽시간에 퍼져 나갔다. 다른 드라이어드들과 그래프트를 펼쳤을 때보단 약하지만, 부족하지는 않았다.

코끝에 묵은 꿀의 냄새가 톡 퍼지면서 머리는 맑아지며 시야는 넓어지고 귀가 밝아졌다.

팔다리가 단단해지고 허리가 곧게 세워지며 필사의 방어를 가진 드라이어드의 기운이 오롯이 내 안에 가득 담겼다.

확실히… 이렇게 사용하게 된 그래프트는 뭔가 달랐다.

엘더와 메스키트의 그래프트는 날 집어삼킬 것 같은 기운이었다면 지금은 내가 가막살나무의 기운을 품어 주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런 방식이라면 엘더나 메스키트와 했던 것처럼 대단위의 엄청난 능력은 못 쓸 것 같은데?”

만약 둘과의 그래프트가 지금처럼 내 속성을 세계수로 채워 강제로 교감도를 올려서 사용한 거였다면, 바다를 막고 넓은 땅을 거대한 성처럼 두르는 그래프트는 못 썼을 듯싶었다.

“어차피 지금은 상징물을 지키는 거니까 이거면 됐어.”

난 아직 미완성인 상징물에 그래프트 활성화 상태인 스태프를 대었다.

그러자 황량한 나무 상징물에 가막살나무의 줄기, 잎, 꽃, 열매가 옮겨 가며 뼈대에 살을 더하듯 충만해졌다.

정문의 상징물에 가막살나무의 기운이 전염되며 드디어 완성이 되었다.

나와 일심동체로 굳건하게 세워진 상징물.

애초에 테라리움의 문 하나를 그래프트로 세울 생각이었다.

이 그래프트는 드라이어드 특성에 맞춰 방어형이며 메스키트처럼 대단위 방어진을 치는 것이 아닌 국소 방어형이었다. 조건부 불사의 능력을 그대로 발휘한 그래프트는 시전자가 쓰러지지 않는 한 방어가 절대 깨지지 않는다.

즉, 정문의 상징물은 내가 살아 있는 한 절대 무너지지 않았다.

반대로 나 역시 상징물이 무너지지 않는 한 안전했다. 상징물 자체가 날 지키는 작은 방어 요새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난 마치 감시대처럼 우뚝 솟은 상징물의 꼭대기에 왕좌처럼 걸터앉아 스태프를 높이 들고 빛을 쏘았다.

마침내 길드전이 시작되었다.

아스키아는 대뜸 상징물부터 공격하지 않았다.

정문 상징물과 함께 있는 날 보면 일망타진할 기회로 볼 수 있는데 오히려 당당히 나오니 뭔가 있다고 생각한 듯했다.

그들은 많은 머릿수를 제대로 활용하는 작전을 펼쳤다.

한데 뭉쳐서 전진해 오던 이들이 무리를 나눠 산개하기 시작했다.

몇몇은 정문에 남고 몇몇은 후문으로.

그리고 마치 미리 연습이라도 해 온 것처럼 일정한 간격을 가진 구역에 모여 무언가를 준비했다.

제법 높은 곳에서 보니 단순히 거리를 벌려 흩어진 것이 아닌 철저히 계산에 따른 산개라는 것이 한눈에 들어왔다.

곧 그들은 행동을 개시했다.

“와, 이건 제법 장관인데.”

순식간에 사방에서 시간과 장소를 무시하는 다양한 공간들이 생성되었다.

어떤 곳은 뜨거운 모래가 흩날리는 사막으로, 어떤 곳은 점성이 가득한 진흙이 깔린 늪지대로, 또 어떤 곳은 드넓은 초원의 평야로.

아스키아 길드가 일제히 시동한 것은 바로 드라이어드들의 자생 필드를 아티팩트 밖으로 불러내는 영역 선포였다.

“영역별로 모여서 산개한 거군.”

해당하는 자생 필드의 드라이어드들만 모일 수 있는 최선의 조합을 짜 최고의 혜택을 받기 위해 구역을 나눈 것이다.

그리고 테라리움을 두른 성벽을 향해 일제히 공격을 퍼부었다.

공격 방향으로 볼 때 아마도….

“정문과 후문 사이의 루트를 뚫어 버리려는 거네.”

일부러 정문과 후문으로 향할 전력을 토막 내기 위해 성벽을 테라리움의 경계보다 넓게 지었는데 간파했나 보다.

그러고 보니 자리 배치와 재빠른 시행이 어쩌면 이미 수차례 이곳을 정찰한 결과물인 것으로 보였다.

내가 열심히 일을 벌일 동안 저쪽도 마냥 놀고 있었던 건 아니었군.

저들이 상징물에 공격을 집중하는 것이 아닌 애꿎은 성벽까지 노린다면 오히려 우리의 경계가 분산되었다.

이렇게 되면 테라리움 내부에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기 때문이다.

그즈음 후문 쪽에서 전투가 벌어졌는지 멀리 소란이 들려왔다.

후문의 상징물은 정문과 달리 평범했다.

대신 주요 전력은 대부분 후문에 배치되어 있었다.

이건 이리스와 스코풀루스의 제안이었다. 그들은 이동 경로상 가장 먼저 맞붙게 되는 정문에서 가장 치열하게 전투가 벌어질 거라 보았고 후문은 우선순위가 떨어져 상대적으로 적은 전력이 붙을 거라 예상했다.

그러니 허를 찔러 정문은 절대 부서지지 않을 거란 가정하에 후문에 전력을 모으면, 이를 모른 채 적은 전력으로 진입하는 군단들을 깨부수어 빠르게 전력 소모를 유도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스키아는 생각보다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오지 않았고 적지 않은 전력이 후문으로 투입되었다.

우리 측 전력도 호락호락하지 않으나 저쪽은 머릿수가 너무 많다는 것과 체계적으로 영역 선포를 사용해 효율적으로 전투력을 높인 것이 신경 쓰였다.

“필드는 결국 수호자의 발아래 있는 것.”

아스키아 길드에 필드의 가디언은 없었다. 가디언이 뜨면 반응하는 내 핸드폰의 홀로그램이 아주 잠잠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바이러스처럼 필드를 주무르는 독불장군들을 막을 수 있는 장치가 없다는 걸 뜻했다.

야생이 아닌 드루이드 밑의 드라이어드들은 가디언들의 규율 강제에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지만 그래도 그 필드를 밟고 서 있다는 점은 달라지지 않는다.

총 세 개. 데저트, 바이오, 스노우 필드.

각각 메스키트와 실새삼과 포인세티아가 나와 필드에 내려진 고유의 축복을 거두며 그들이 받던 모든 보너스가 사라졌다.

데저트 필드는 파라다이스에서 경험했듯이 호전적인 드라이어드들이 모여 훌륭한 전투병들이 되어 줄 뿐만 아니라 수도 제법 많았다. 필드의 축복이 사라지니 이 호기가 한풀 꺾이는 역할을 했다.

더구나 바이오나 스노우 필드는 그 수는 적어도 워낙 희귀한 만큼 특수 능력에 특화된 드라이어드들이다 보니 변수를 창출할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필드의 축복을 거둔 이상 이젠 승패를 위협할 만큼 다이내믹한 전술은 나오기 어려우리라.

다들 갑자기 일부 필드에서 축복이 사라진 걸 느끼며, 사실상 영역 선포가 풀려 버린 것이나 다름없어진 상황에 놀라 우왕좌왕하는 것이 보였다.

이럴 때 보면 구성원 수부터 절대다수를 먹고 들어가는 노멀 필드의 가디언의 존재가 무척이나 아쉽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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