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7화 (407/604)

남들이 우러러보는 대형 길드에 가입했다는 기쁨도 잠시, 최근 며칠은 길드 분위기가 마치 살얼음판을 걷는 것과 같았다. 주된 원인은 바람결에 흩날려온 잡초처럼 어디선가 툭 튀어나온 ‘가이아’라는 길드 때문이다.

“말도 마라. 요즘 얼마나 길드 분위기가 거지 같은 줄 아냐? 틈만 나면 집합이 걸리고 회계 쪽은 마주칠 때마다 신경질 부리고.”

“그래도 우리 중에 네가 제일 성공한 거 아냐? 죽는소리해도 우리만 할까.”

철없는 친구들은 길드에서 독식한 의뢰로 다이아를 많이 버는 만큼 만날 때마다 술을 쏘라고 하지만 사실 우리 길드가 최근엔 의뢰는 거의 뒷전이고 다른 프로젝트를 하느라 바빴다는 말은 할 수가 없었다.

내가 충성을 맹세한 아스키아 길드는 뚜렷한 목표가 있었다.

비록 길드 간부들이 내세운 목표였지만 나처럼 평범한 길드원들도 소속감을 크게 느끼고 함께 열망하는 목표였다. 바로 4번째 테라리움에 스톤헨지를 둔 ‘소리움’ 길드를 넘어서 7대 대형 길드에 포함되는 것이다.

자잘한 우세가 아니라 압도적으로 다른 길드들을 능가하는 것.

그러기 위해선 아무리 한자릿수 테라리움에 스톤헨지를 둔 길드들이라도 차마 생각하지도 못한 업적을 세워야만 했다. 겨우 번호 하나 앞선 것만으로 잘난 척하는 소리움 따위는 도전도 못 해 보는 업적을 말이다.

“그나저나 너 곧 큰돈 들어올 거라고 하지 않았냐? 그럼 좀만 참으면 되는 거 아닌가?”

“하, 말도 마라.”

오늘따라 술맛도 나지 않는다. 걱정으로 꽉 막힌 목구멍은 일상의 유일한 낙을 거부하고 있었다.

벌써 맥주잔을 몇 잔씩이나 비운 친구들과 달리 내 잔에 담긴 맥주는 가득 찬 채로 밍밍하게 식어 가고 있었다.

마치 점차 식어 가는 길드에 대한 내 충성심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큰돈, 그래 들어올 예정이긴 했다.

우린 소리움 길드를 뛰어넘기 위해 길드 최초로 테라리움을 손에 넣는 걸 계획하고 있었다.

테라리움을 대표하는 전속 길드가 있긴 해도 길드가 열심히 힘을 합쳐 테라리움을 통째로 손에 넣는 일은 전무후무했다.

행정 관리원들이 잔뜩 경계하는 게 가장 큰 이유였지만 일개 길드가 경매에서 기업을 이길 만큼 다이아를 모으는 것도 어려웠다. 더구나 전속 길드가 아니면 스톤헨지 주둔 세금도 많이 내야 하니 그저 현재 테라리움에 평화롭게 주둔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하고 마는 거다.

물론 입이 쩍 벌어지게 대단한 번호대의 테라리움은 무리지만, 그래도 우린 적어도 뒤 번대의 치안 나쁘고 외면받는 테라리움 정돈 그동안 중개업으로 모은 길드 자금과 길드원들이 합심하여 노려볼 만했다.

그게 바로 57번째 테라리움이었다.

완전히 말단 길드원들은 겨우 큰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정도로만 알고 있을 테지만, 적어도 나처럼 꽤 오래 활동을 한 길드원들은 자세한 내막에 대해 알았다.

아스키아 길드는 아주 오래전부터 57번째 테라리움을 집어삼키기 위해 꾸준히 물밑에서 지분을 늘리는 일을 해 왔었다. 그런데 방식이 좀 신기하긴 했다.

과거 큰 사고가 났던 57번째 테라리움은 주민들에게 지급할 보상금을 다이아 대신 지분으로 책정했고, 이를 이용하여 57번째 테라리움 출신 길드원들을 포섭하는 방법으로 지분을 모은 것이다.

행정 관리원들은 대형 길드가 주둔하는 것을 치안 상승적인 측면에선 좋아했으나 길드가 테라리움의 지분을 사는 건 극도로 경계하며 제한을 뒀고 57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과거 사고를 당했던 주민 출신이란 걸 이용하면 이 제한의 허를 찌를 수 있었기에 길드는 길드원들에게 투자를 받아 테라리움 출신 길드원들로 하여금 지분을 긁어모으도록 했다.

나중에 테라리움을 손에 넣게 되면 사업을 크게 벌여 다이아를 불려서 돌려주겠다고 약속했다.

테라리움을 안전히 손에 넣기 위해선 과반수가 넘는 지분율이 필요했고, 그래야만 경매를 열 수 있는 이유가 생겼다.

우리 길드가 오랫동안 추적하는 아이언 비스트라는 드루이드만 잡아들이면 길드의 오래된 숙원을 이루게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안주 좀 더 시켜도 되냐? 넌 안 마셔?”

“시킬 거면 차라리 독한 술을 시켜라. 겨우 이 정도로는 안 되겠다.”

내 앞에 놓인 맥주가 치워지고 아주 도수가 높은 위스키가 자리했다.

난 그날 있었던 일을 안주 삼아 술을 들이켰다.

계획대로만 진행됐다면, 그날 결혼식만 제대로 치러졌다면. 지금쯤 난 이런 허름한 술집이 아닌 57번째 테라리움의 으리으리한 길드 저택에 앉아 있었을 것이다. 혹은 경매에 참가할 간부들을 수행하는 근사한 업무를 수행 중일지도 모르지.

길드가 영혼까지 긁어모아 간신히 지분을 마련했지만 과반수를 넘기지 못했다.

우리의 작업을 눈치챈 행정 관리원이 기를 쓰며 막다 보니 딱 하나의 결정타가 필요했는데.

듣기론 아이언비스트가 그 테라리움 과수원의 고위 간부의 잃어버린 자제였다고 했던가.

그래서 유달리 보상으로 받을 지분도 많다고 했는데, 그자만 성공적으로 길드에 끌어들였다면 모든 것이 완벽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눈치 없는 길드가 진작 채 가 버렸더라.

더구나 무려 차기 마스터와의 결혼식장에서 깽판도 부리고 대체 무슨 믿는 구석이 있는지 당당히 길드전 선포도 하고 가고.

‘가이아’ 길드.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소위 말하는 쩌리 길드였다.

길드 간부들이 욕하는 걸 엿듣게 된 후 그 길드가 28번째 테라리움의 전속 길드라는 것까진 알았지만, 그래 봤자 쩌리에서 겨우 몇 레벨 상승했을 뿐이다.

우리는 비록 전속은 아니어도 무려 5번째 테라리움에 당당하게 스톤헨지를 둔 길드였다.

그리고 7대 대형 길드 리스트의 문지기인 소리움만 젖힌다면 당당히 입문할 수 있는 파워를 가진 길드였다.

그런 우리 길드에 부딪혀 보려면 적어도 10번째보다 더 앞 번호의 전속 길드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나?

어쨌든 그 길드가 초를 치며 우리는 쓸데없는 57번째 테라리움 지분만 잔뜩 끌어안게 되었다.

애초에 테라리움을 먹을 게 아니라면 그딴 가치가 낮은 테라리움의 지분 따윈 낭비나 다름없었다. 그 말은 즉, 내가 투자한 다이아도 채 다 돌려받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상황이다.

다이아를 돌려 달라는 길드원들에게 오죽 시달렸는지 회계팀은 마주치기만 해도 행여나 다이아 돌려 달라고 할까 봐 엄청 날을 세웠다. 비록 우리에게 빚을 진 상태였지만 회계팀과 척을 져 봤자 좋을 일은 없었기에 제대로 항의도 못 했다.

간부들은 그 일이 있고 난 후 무슨 속셈인지 하루가 멀다 하고 회의실에 처박혀 나오질 않고.

우리 길드는 대체 어떻게 되는 걸까?

“길드 마스터가 중대 발표를 한다는데?”

숙소에서 자고 있던 날 깨운 건 같은 길드의 동료였다.

“으으… 갑자기 무슨 중대 발표?”

간밤에 마신 술 때문에 숙취가 심했다. 고주망태가 되어서 친구들에게 길드를 탈퇴하네 마네 하며 주정을 부렸던 것 같기도 하다.

길드의 오랜 숙원이었던 목표가 좌절된 게 어쩐지 나의 원대한 목표도 좌절된 것처럼 느껴져 심란했다. 그래서 차라리 아스키아의 경력을 가지고 더 높은 길드로 이직하는 것도 낫지 않겠나 싶었다.

57번째 테라리움을 차지하기 위한 계획은 결국 무산된 듯하고 그동안 미뤄 왔던 의뢰를 끌어오며 길드를 정상적으로 돌리기 위해선 꽤 시일이 걸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동안 우리 같은 평범한 길드원들만 발을 동동 굴러야 하겠지.

“글쎄, 가서 들으면 되겠지. 길드홀로 모이라신다.”

대충 씻고 비척비척 향한 길드홀엔 사람들로 가득했다.

다들 그늘이 드리운 것처럼 얼굴들이 썩 좋지 않았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곧 57번째 테라리움을 먹을 거란 희망에 힘들어도 활짝 웃고 다녔는데 말이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간부들과 길드 마스터가 길드홀에 나타났다.

그러곤 아스키아 길드의 새로운 원대한 목표를 말했다.

첫 번째는 길드전.

결국 우릴 물 먹인 그 중소 길드와 길드전을 치르게 되었나 보다.

하지만 이제 와서 무슨 이득이 있을까 싶었다. 몇몇은 테라리움과 척을 져서 불이익을 받게 되는 건 아닌지 걱정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우리 길드의 테라리움 획득을 향한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번 길드전이 끝나면 우린 60번째 테라리움을 얻게 될 겁니다.”

중대 발표는 아주 놀랄만한 것이었다.

60번째 테라리움을 먹을 수도 있다고?

길드홀에 모인 모든 이들이 믿기지 않는다는 목소리로 수군거렸다.

“그러니 다들 원대한 목표를 위해 조금만 더 힘을 냅시다.”

그날 홀의 분위기는 마치 57번째 테라리움을 목전에 두었을 때처럼 뜨거웠다.

겨우 중소 길드를 상대로 한 길드전이었다.

듣기론 길드원도 얼마 되지 않는다. 아이언비스트가 가입되어 있다는 건 신경 쓰이지만 그걸 빼면 그다지 유명세도 없는 길드였다.

길드전은 공성전의 방식으로 상대가 주둔하고 있는 60번째 테라리움의 수성을 무너뜨리고 취하면 되는 건데.

굳이 난관을 꼽자면 이 공성이었다.

보통의 성벽을 무너뜨리는 게 아니라 테라리움을 직접 공격해야 하니 아무리 만만한 상대라 하더라도 준비가 필요했다.

우수한 드라이어드들로 공격을 퍼부을 수도 있지만, 드라이어드들은 본질적으로 세계수에 속한 것들을 공격하는 데 주저함이 있었다.

더구나 세계수의 일부인 가지가 있는 테라리움을 직접 공격해야 된다고 하니 보수적 사상이 아주 강한 드라이어드라면 공격 자체를 거부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바로 공성 병기였다.

연금술과 기계술의 힘을 빌려 만든 병기는 목표한 굳건한 구조물을 박살 내는 데 꼭 필요했다.

그리고 길드전의 날짜가 확정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전투조를 맡은 우리 같은 평범한 길드원들에게도 명령이 하달되었다.

“공성 병기 주문 발주를 받아오라고?”

“이런 건 회계나… 뭐 다른 팀이 해야 하는 거 아냐?”

“내가 그쪽에 친구가 있어서 들었는데, 거기 지금 난리라더라.”

명령서 붙은 게시판을 보고 눈만 끔벅이던 우리는 일제히 은근하게 말을 꺼낸 이를 바라봤다.

“연금탑이든 공방이든 전부 거절해서 수급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혹시라도 테라리움들이 보유한 공성 병기까지 대여 요청을 해 봤는데 전부 막혔다고 하더라.”

“왜 갑자기?”

“뭐랬더라. 기술 저작권 문제라고 했던가?”

정확한 이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되었다.

시중에 공개된 설계도대로 공성 병기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 설계도는 물론 공성 기술의 저작권을 누군가 독점하다시피 죄다 쓸어갔다는 것이다.

그래서 공성 병기를 제작하거나 타인에게 양도, 대여하려면 저작권료를 내야 하는데… 그 비용이 어마어마하게 비쌌다. 분명 다이아 냄새를 맡은 누군가가 길드전 소식을 듣고 선수를 친 모양인데, 그렇게 과하게 비용을 올려 버리면 양쪽 다 손해가 아닌가?

하지만 차라리 제작하지 못하게 만드는 한이 있어도 절대로 저작권료를 내려 줄 생각이 없다는 것처럼 막무가내로 굴었다.

기존 예산보다 몇십 배나 더 비싸게 내고 제작 의뢰를 하든가, 아니면 직접 새로운 설계도를 만들든가 해야 하는데. 전자는 차라리 길드전을 포기하는 게 나을 만큼의 예산이 소모되고 후자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별수 없이 일반 길드원들까지 동원해 민간 업체나 암거래를 알아보려고 한 것인데….

놀랍게도 그 모든 루트까지 죄다 쓸어 가서 우리 길드는 길드전 당일까지 단 하나의 공성 병기도 얻지 못했다.

대체 누가 우리 길드의 앞길에 재를 뿌리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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