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1화 (401/604)

“성급한 결정이었다.”

결혼식장을 깽판치고 당장 떠날 준비를 하는 동안, 시들링은 아스키아에서 준비해 준 정장을 쓰레기통에 버리며 단호하게 말했다.

“비싸 보이는데.”

쓰레기통을 보며 그 정장을 되팔 궁리를 하던 제퍼의 등짝을 이리스가 아프게 내려쳤다.

“길드전이 벌어지면 넌 위험해진다.”

“제이 님이 팔려 가듯 결혼하는 걸 구해 줬으니 감사 인사부터 하는 건 어때?”

이리스의 퉁명스러운 목소리에 그는 인상을 썼다.

“내가 결혼을 했다면 일은 평화롭게 해결됐을 것이다.”

“대단한 희생 정신이네.”

시들링과 다른 길드원들의 관계는 개선되어 가는 과정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번 일로 약간 후퇴할 걸로 보였다.

“그렇게 길드원들을 믿지 못해서 앞으론 어떡하나?”

“너 너무 비꼬는 거 아냐? 시들링에겐 그게 최선이었겠지. 나도 아스키아를 상대할 생각을 하면 쫄리는 건 어쩔 수 없는데.”

제퍼가 힘겹게 등짝을 문지르며 둘의 눈치를 살폈다.

“이번 일을 성급하게 결정했다는 시들링의 의견에도 동의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내 행동을 후회하진 않아. 결국 이게 내 방식이니까.”

체급 차이를 겁냈다면 대형 길드에 비교도 되지 않는 인페르노에 도전장을 내밀지도 않았다.

“그리고 내 결정을 모두가 후회하지 않도록 결과로 보여 줄게.”

그 후로 마차를 타고 5번째 테라리움을 떠날 때까지 다들 각자 고민에 빠져 입을 다문지라 다 같이 모인 자리는 여느 때보다도 조용했다.

안건이 안건인지라 빠른 콘택트가 필요해 무리하게 출장이 결정됐음에도 불구하고, 보나는 중간 지역인 16번째 테라리움에 먼저 도착해 날 기다리고 있었다.

다만 표정이 좋지 않은 걸 보면 자신이 무슨 사고를 쳤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무리하게 이곳까지 와 달라고 해서 미안해요.”

“아… 아니에요! 출장이 결정된 대신에 휴가를 받기도 했고…. 저 혹시 무슨 사유로 절 여기까지 부르신 건가요? 제가 정확한 사정은 듣지 못해서.”

그녀는 일부러 밝은 말투를 내기 위해 노력했지만 얼굴에 드리운 걱정 어린 기색까진 감추지 못했다.

일이 급했기에 보좌관 쪽도 보나를 부른 정확한 이유에 대해서 모를 것이다.

“아버지께서 석류 금융의 사장이라고 하셨죠?”

“아, 네! 다섯 개 테라리움에 분점을 가지고 계시기도 해요.”

“아버지와는 연락을 잘 주고받고 계시나요? 이런 부탁을 드리는 게 죄송하긴 한데… 혹시 석류 금융 사장님과의 중개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면접 때를 떠올려 보면 집안 배경을 최대한 배제하고 독립하시려는 건 알고 있지만, 막상 떠오르는 게 보나 씨뿐이라서요.”

내 부탁에 보나는 놀란 얼굴이 되어 되물었다.

“정말로 제 아버지를요? 바로 사장 직통을 원하시는 거면 엄청 중요한 사안이실 텐데…. 저 혹시 대출이 필요하실 정도로, 아! 제가 거기까지 묻는 건 너무 주제가 넘었네요. 이 정도는 충분히 해 드릴 수 있습니다. 채용 시험 때 그런 만행을 보였어도 뽑아 주신 은혜는 갚아야지요!”

“보나 씨도 과수원 직원이신 데다 금융 관련 업무를 맡고 계시니 사안 정도는 알려드릴 수 있어요. 최근에 60번째 테라리움이 파산 조짐을 보인다는 정보를 입수했어요. 석류 금융을 포함한 다수 금융 기업이 채권 정리에 열을 올리고 있다는 것도요.”

내 말을 들은 그녀는 대답을 잠시 미룬 채 생각에 잠겼다.

이리저리 움직이는 눈동자에 섣부른 대답을 삼가는 태도. 자신의 기억 속에 존재할지도 모르는 60번째 테라리움에 대한 정보를 되짚어 보거나 혹은 단순 중개만으로도 자신이 리스크를 짊어질 수 있는지 고민해 보는 모습처럼 보였다.

전자라면 내게 최대한 협조를 해 주려는 태도기에 고맙지만, 후자라면 오히려 신중한 접근에 믿음이 간다.

“물론 완전히 확실한 정보는 아니에요. 하지만 전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렇게까지 외부에 유출될 정도라면 확실히 60번째 테라리움에 문제가 있다는 거겠죠.”

“어쩌면 외부 세력이 60번째 테라리움을 공격하기 위해 조작된 정보를 푼 걸 수도 있어요. 어쨌든 제이 님께서 원하시는 건 석류 금융이 보유한 60번째 테라리움의 채권이 맞으신 거죠?”

고개를 끄덕이자 보나의 얼굴이 한결 편안해지는 것이 보였다.

“그렇다면 절 거치는 게 최적의 판단이라 볼 수도 있어요. 만약 제이 님이, 그것도 20번대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이 공식적으로 채권에 관심이 보인다는 정보가 새어 나간다면 일이 복잡해질 수도 있었을 거예요. 관심 없던 이들까지 채권에 달라붙을 수 있고… 경쟁이 생기겠죠.”

“그럼 부탁드릴게요.”

보나에게 석류 금융 쪽의 일을 위임하고 다음 계획을 준비하기 위해 과수원으로 향했다.

“오늘까지 안 온다면 직접 찾아갈 생각이었는데. 서운할 뻔했어.”

파필리온이 기다렸다는 듯이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날 맞이했다.

아직까지 16번째 테라리움에서의 유명세는 나보다 파필리온이 높았기에 과수원에서 날 알아보는 직원들은 많지 않았다.

차라리 이게 나았다.

28번째 테라리움은 특수성을 가지니 괜찮았지만 16번째 테라리움은 행정 관리원이 장기 부재인 데다 그 보좌관이 거의 모든 일을 도맡아서 하고 있으니 의심과 뒷말이 나오기 딱 좋았기 때문이다.

귀찮게 치근대는 파필리온의 정강이를 발로 뻥뻥 차가며 집무실에 도착했다.

“1번째 테라리움에서 16번째 테라리움까지 오는 길은 안전했어?”

“내 걱정해 주는 거야?”

“너에 대한 인페르노의 관심이 식었어, 안 식었어?”

파필리온은 서운하단 눈을 하면서 아티팩트를 차고 있는 왼팔의 소매를 걷어 내게 보여 줬다. 최근 부상을 입은 것인지 하얀 거즈가 붙어 있었다.

“공격 당했어?”

“1번째 테라리움에 보호 요청을 안 했으면 죽었을지도 몰라. 내 월렛이 네게 있으니 정보 확인이 늦었던 건가 봐. 그래서 1번째 테라리움에서 진을 치며 날 기다리고 있었던 거겠지.”

“경호원들을 끼고 있었는데도 공격을 했다고?”

“뭐, 숨어서 저격을 하다 정체를 들통날 것 같으니 도망가긴 했지만.”

파필리온이 끈질기게 16번째 테라리움에 숨어 있어서 관심이 식을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나 보다.

그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내겐 다행이었다.

“이건 감이긴 한데, 아무래도 날 노리는 세력이 늘어난 것 같아. 어머니 쪽도 움직인 거 같거든. 앞으로 16번 밑으론 못 내려가겠어. 다음 출장 땐 애쉬가 올지도 모르겠는데?”

안전을 꾀하는 그에겐 미안한 일이었지만.

난 주머니에서 파필리온의 월렛을 꺼내 그에게 던져 줬다.

주인을 떠나 비활성 상태로 있던 월렛이 주인 손에 들어가자마자 활성화되는 것이 보였다.

“네가 필요해.”

내 말에 파필리온은 잠깐 동안 말을 잃고 멍한 눈이 됐다.

“…녹음해도 돼? 그것도 안 되면 다시 말해 줘. 귀에 새길게.”

“월렛을 가진 네가 필요해.”

“내가 필요한 거야, 아니면 내 목숨을 노리며 침을 질질 흘리는 인페르노의 사신들이 필요한 거야?”

알고 있는 듯해 굳이 답을 하진 않았다.

“그럼 죽기 전에 나랑 데이트 한 번 해 주면 안 돼?”

“죽을 거라곤 안 했어. 죽게 내버려 둘 생각도 없고.”

“그럼 됐어.”

미끼로 사용하겠다고 해도 더없이 환하게 웃는다.

“그래도 죽기 직전까지 가면 데이트해 줄 수 있어? 목숨을 걸었는데 나도 뭔가 얻는 게 있어야지.”

“생명 수당 줄게.”

“그럼 10번대 테라리움 근처에 별장 사 줘.”

두려움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은 뻔뻔한 태도에 오히려 내가 더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한 자릿수 테라리움 근처 별장도 사 줄게. 그거면 돼?”

“더 불러도 돼? 두 채 사 줘. 이왕이면 해안 테라리움 근처에. 보트도 사 줘.”

“어차피 16번째 테라리움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면서. 에휴, 그래. 사 달라는 거 다 사 줄게.”

“사랑해.”

“미친놈.”

욕을 먹어도 마냥 좋다고 헤실헤실거린다.

난 앞으로의 계획을 계속 머릿속에 그리며 그 안에 파필리온을 끼워 넣었다.

“60번째 테라리움을 매입할 거야.”

내 말을 들은 파필리온의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그런 영양가 없는 테라리움은 왜? 내가 준 캐치 다이아 안 봤어? 사 봤자 마이너스인데. 차라리 더 앞 번대를 노려 봐.”

60번째 테라리움이 어지간히 마음에 들지 않는지, 온갖 불평이 다 튀어나왔다.

“그럴 거면 38번째에서 그 꼬맹이가 찾아왔을 때, 거길 접수하지 그랬어?”

“전쟁터로 쓸 거야. 곧 우리 길드랑 아스키아 길드가 길드전을 벌일 거거든.”

내 말에 그는 자신을 미끼를 쓰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보다 더 참담한 얼굴을 하며 이마를 짚었다.

“아스키아면 5번째 테라리움에 둥지를 튼 그 대형 길드 아냐? 대체 이 사랑스러운 작은 머리통으로 무슨 생각을 하길래 그런 깜찍한 일을 벌였을까? 우리 행정 관리원님은 인페르노를 상대하는 것만으론 심심한가 봐?”

오히려 더 깜찍하게 구는 파필리온을 말없이 쳐다봐 줬다.

한참을 비아냥대던 그의 눈빛이 별안간 바뀌었다.

“아하…. 그래서 내가 필요한 거였구나? 둘이 붙이려고? 적의 적은 아군이라 이거지?”

“아군 따위 없어. 불구경을 할 생각이지.”

파필리온의 짐작은 맞았다.

난 애초에 내 전력만으로 아스키아를 상대할 생각이 없었다.

파필리온이 언급했던 것처럼 인페르노를 상대하기도 벅차다는 고민을 하다가 떠오른 묘안이었다.

“하하하, 인페르노를 이용해 맞불 작전을 벌일 생각을 하다니. 난 그래서 네가 좋아. 네가 애쉬를 쫓아내는 방식으로 물리쳤을 때, 그때 첫눈에 반했어.”

“네 애정 전선 따위는 궁금하지 않아. 그런데 단순히 널 죽이러 올 인페르노만으로 아스키아를 흔들 수 있을까?”

인페르노를 불러낼 구실은 찾았으나 화력이 약할까 봐 걱정됐다.

아스키아는 아예 60번째 테라리움을 무너뜨린 후 흡수할 작정으로 병사들을 끌고 올 것이 분명했다.

인페르노 쪽도 작정하고 수를 불려서 쳐들어와야만 했다. 아예 아스키아를 잡아먹을 정도로.

“내게 맡겨. 60번째 테라리움은 확실히 손에 넣을 수 있긴 한 거야?”

난 내 폰을 흔들며 말했다.

“고삐 풀 거야.”

내가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를 아낌없이 사용할 생각이었다.

“그래, 알겠어. 그럼 인페르노가 더 활활 타오를 수 있도록 장작을 넣어 볼까? 이 경우 네가 간부진을 건드려 준다면 아주 좋긴 한데 내게 바로 이야기를 꺼낸 걸 보면 그건 아닌 것 같고.”

그의 말처럼 인페르노 조직도의 상단에 위치한 이들을 들쑤신다면 큰 효과를 볼 수 있긴 했다.

“그렇다면 온건파 베스탈리스 쪽에 협조를 요청하는 건 어때? 인페르노는 온건파들도 조직의 배신자들로 보거든. 더구나 넌 이미 그들과 인연이 있잖아?”

난 28번째 테라리움에 찾아왔던 미미르의 가족들을 떠올렸다.

“직접 참여할 필요도 없이 60번째 테라리움에 방문할 거란 허위 정보만 뿌려도 좋다고 달려들 거야.”

그의 제안을 수락했다.

그리고 오래 지나지 않아 파필리온의 연락을 받은 미미르 가족이 기꺼이 협조하겠다고 답변을 보내줬다.

더구나 파필리온이 루프가 운영 중인 비밀 조직을 이용해 외부에 대대적인 어그로를 끈 탓에 불길이 더 거세어졌다.

정보원을 이용해 얻은 아스키아의 대규모 전투 준비 소식까지.

계획은 이상하리만치 착실히 흘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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