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0화 (400/604)

이리스와 제퍼가 시들링의 결혼 소식을 들었을 때,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격하게 반응하는 바람에 오히려 난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

“적어도 제퍼보단 늦게, 아니 어쩌면… 영영 못 할 줄 알았는데.”

“얌전하게 굴더니 뒤론 정인을 숨겨 놨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것보다! 시들링은 제이 님을 좋아하는 거 아녔어요? 그렇게 오만 티를 다 내고 다녔잖아요!”

“마스터, 제가 들은 게 있는데 바로 그걸 라플레시아처럼 군다고 합니다!”

둘은 다행히 시들링에게 배신감을 느끼는 것보단 놀려 먹을 구실을 잡아서 신이 난 것처럼 보였다.

내게 좀 더 마음의 여유가 있었다면 둘의 대화를 맞받아쳐 줄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질 못했다.

난 길드원들과 보좌관들이 하루 사이에 온 힘을 다해 긁어모은 57번째 테라리움에 관한 자료를 검토 중이었다.

잡지, 소식지, 심지어 탐문 수사를 거쳐 얻은 인터뷰 자료까지. 가릴 것 없이 57번째 테라리움과 관련되어 있다면 잔뜩 가져왔다.

시간이 충분했다면 적당히 정보 필터와 신빙성 검토를 거쳤을 텐데.

“아스키아는 지금보다 더 몸집을 키우려고 하나 봐요.”

내게 단서를 준 소식지를 펼쳐 놓고 길드원들에게 그렇게 추측하는 근거에 대해 입을 열었다.

“57번째 테라리움의 지분을 사서 차차 삼켜 버릴 모양인데.”

애초에 테라리움을 사기 위해 경매에 뛰어드는 건 아무나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테라리움을 노릴 정도였다니. 상상했던 것보다 더 대형 길드였네요. 하긴, 심벌만 봐도 길드를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유명하니.”

“그러고 보니 우리가 있던 건물이 길드 본관이긴 한데 주변에 작은 부속 건물이 두 채 더 있었어요. 오가는 사람도 많은 걸 보면 길드원 수도 아주 많은 게 분명해요.”

“그만큼 성장했으니 이젠 테라리움을 노릴 때가 됐다는 건데… 여기, 57번째 테라리움에서 일어난 대형 화재 사건에 대한 기사 말이에요.”

화재가 일어난 시기가 시들링이 갓 태어났을 시기와 얼추 맞았다.

그날 57번째 테라리움에서 일어난 대형 화재는 놀랍게도 몬스터 불에 의한 것이 아닌 전적으로 인재였다고 쓰여 있었다.

“인재라….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불행이라고 해야 할지.”

불에 의한 대형 화재였다면 테라리움은 괴멸을 피하지 못했을 것이고 인재였기에 그나마 수습이 가능했던 모양이다.

다만 걸리는 게 있다면, 아무래도 불과 연관된 일이다 보니 만약 이곳도 67번째 테라리움처럼 인페르노가 개입했으나 가시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묻힌 사건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화재가 과수원에서 시작됐네요? 이로써 확실한 건 과수원이 이 일로 완전히 주민들에게서 신뢰를 잃었다는 거죠.”

“그리고 이것도 봐요.”

난 소식지 위로 하나의 문서를 올렸다.

화재 피해 보상 안내. 기한은 놀랍게도 올해 2월 말까지. 종료일은 화재가 일어났던 날부터 22년째가 되는 날이었다.

“대상은 당시 거주하고 있던 57번째 테라리움 주민 한정. 현재 테라리움이 거주하고 있지 않더라도 주민임을 증명할 수 있다면 보상 대상에 포함될 수 있음.”

“특이하게 보상을 테라리움 지분으로 지불하네요?”

이리스가 흥미를 보이며 보상 부분을 손가락을 가리켰다.

“테라리움이 다이아로 보상을 해 줄 수 없을 만큼 아주 가난한가 보지. 내놓을 수 있을 만한 건 아무것도 없고, 그렇다고 피해 보상을 해 주지 않자니 주민들의 여론이 나빠져 테라리움을 떠나 버릴 테니 결국 지분을 뿌렸네.”

제퍼가 57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을 동정하는 얼굴로 보상 책정 방식에 대한 근거를 추리했다.

“보통은 4급 가드너부터 지분을 소유할 수 있으니, 이건 완전… 파격적인 보상이나 다름없는데.”

그렇다고 모든 주민에게 공평하게 지분을 나눠 주는 건 아니었다.

가드너 등급이 높을수록, 피해 규모가 클수록, 부양가족이 많을수록 등등 더 많은 지분율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이 존재했다.

“제이 님, 이거 설마….”

“아스키아 길드가 시들링을 57번째 테라리움을 삼키려는 수단으로 쓰려는 게 분명해요. 더 확실하게 결론을 내리려면 아스키아 길드에 57번째 테라리움 출신의 길드원이 몇 명이나 있는지 등의 조사가 필요하겠지만….”

당시 57번째 테라리움에 거주하던 사람들이 아니라면 이런 정보를 알기란 쉽지 않았을 텐데, 아마도 라줄리가 이 일의 키포인트인 것이 분명했다.

“시들링을 무슨 일이 있어도 포섭하려는 걸 보면, 그를 잘만 이용한다면 꽤 많은 지분을 획득할 수 있나 보죠.”

라줄리가 같은 고아 출신이자 눈에 띄는 큰 화상 흉터를 가지고 있는 시들링에게 접근했던 이유… 어쩌면 그건 동질감 때문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또한 시들링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다르게 57번째 테라리움 태생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가 거절해도 끈질기게 생존 사실을 신고하고 강제로 부모와 자리를 마련하려고 굴었던 걸 보면.

확실한 것은 그들이 그가 그곳에서 태어났다고 믿기를 원한다는 사실이다.

“대형 화재로 가족들이 흩어지거나 난리 통에 인명 피해가 발생했겠죠. 출신이 분명한 데다 나이도 알맞고 더구나 큰 화상 흉터도 있으니 57번째 테라리움의 어느 가족에게 끼워 넣어도 좋을 패로 보였을 거예요. 그리고 아스키아는 그 패를 가장 많은 지분을 얻을 수 있는 곳에 끼워 넣으려고 할 테고요.”

즉, 현재 시들링은 정략결혼으로 이용되고 있는 것일 확률이 컸다.

물론 정말 단적으로 라줄리가 시들링에게 반해서 이렇게까지 한다고 볼 수도 있지만….

난 시들링이 내게 전한, 라줄리에게서 알 수 없는 거부감을 느꼈다는 말을 믿었다.

애정에 목마른 그가 라줄리의 맹목적인 관심을 거부할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떻게 하실 건가요?”

이리스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의 눈엔 나를 향한 무조건적인 신뢰가 담겨 있었다.

길드원인 시들링을 구해 줄 거라고, 내게 분명 방법이 있을 거라고.

“후우…. 솔직히… 제가 여태 벌인 일 중 이 계획이 가장 무모하다고 생각해요.”

“역시 마스터! 좋은 생각이 있으시군요?”

“이걸… 좋다고 볼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아스키아는 시들링이 자신들에게 순순히 협조하도록 길드전이란 제약을 걸었다.

그 말은 곧 그가 결혼하지 않는다면 조만간 가이아와 아스키아가 길드전을 벌이게 된다는 것이다.

수배까지 풀어 시들링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되었던 길드였으니 그를 순순히 놓아주려고 하진 않을 것이다.

상대는 몸을 잔뜩 불린 데다 5번째 테라리움에 무리 없이 터를 잡을 수 있는 대형 길드.

그리고 우린 아직 길드원 수가 열 명도 안 되는 초소형 길드였다. 좋게 말하면 소수 정예지만.

그렇다고 체급 차이를 감안해 주며 길드전을 벌이진 않을 테고.

“시들링을 데려오려면 길드전을 피할 순 없을 거예요.”

“그렇다면 아이언비스트는 그냥 아스키아 길드에 줘 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은디.”

여태껏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헤르마가 영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 역시 길드 간의 체급 차이를 깨닫고 얼마나 불리한 길드전이 될지 예상한 것이다.

“야, 헤르마! 넌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우리 길드원이잖아! 다른 길드에서 이용해 먹고 있단 걸 알았는데 무시하자고?”

이리스와 제퍼가 헤르마의 반응에 성을 냈다.

“그래서 너흰 우리가 아스키아를 상대로 가망이 있다고 보는 거?”

하지만 그는 침착하게 둘의 분노를 받아쳐 냈다.

“용병을 모집할 수도 있잖아!”

“아서라, 상대는 아스키아인디. 어중이떠중이들론 애초에 상대가 안 될 거고 아스키아도 본래 용병 중개로 성장한 길드이니 그쪽도 용병을 쓸 수 있을 거라곤 왜 생각을 못 하는지.”

“우리 마스터가 얼마나 다이아가 많은데!”

제퍼 말처럼 내가 다이아를 뿌려 가며 온 세상의 용병을 쓸어 온다면 체급 차이를 메꿀 수도 있었다.

“아스키아에 연이 있다면 아무리 많은 다이아를 준다 한들 앞날을 위해서라도 포기할걸? 솔직히 이름 있는 용병 중에 소싯적 아스키아를 한 번도 거치지 않은 사람이 있다고 보는 거?”

“하긴… 우리도 간접적으로나마 아스키아의 중개를 이용한 적이 있긴 하니까.”

헤르마의 조곤조곤한 반박에 이리스와 제퍼의 발언이 점점 힘을 잃어 갔다.

“그렇다면 정말 뒤가 구린 놈들을 용병으로 써야 하는데, 그런 놈들에게 내 등을 맡기느니 그냥 항복하는 게 낫다고 보는디.”

난 한숨을 쉬며 논쟁을 끊었다.

“길드전은 일어날 거고 용병은 쓰지 않을 거예요. 물론 다이아를 주고 산 용병 말이에요.”

대형 길드를 상대하는 방법.

지금으로선 단 하나의 방법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오직 지금의 나만 생각해 낼 수 있는 방법이자 평소라면 너무 무모하여 절대 벌이지 않을 방법.

“그러니 도와줬으면 하는 일이 있어요.”

“역시! 맡겨만 주세요. 개처럼 뛰어서 완수하겠습니다!”

제퍼가 헤르마를 향해 그것 보라며 신이 나 소리쳤다.

그들에게 부탁을 하면서도 이게 과연 맞는 일인지, 이래도 되는 건지 수백 번 고민이 오갔다.

***

시들링의 결혼식이 막 열리려는 식장.

난 황금 호박 상회의 직원들을 섭외해 초대받지 않은 식장으로 향했다.

“초대장을 보여 주시겠습니까?”

“강제 집행하러 왔다고 전해 주세요.”

어차피 이쪽에서 아무리 이성적으로 굴어 봤자 결혼식이 끝날 때까지 아무런 성과도 못 얻을 것이 뻔했다.

손을 까딱이자 신호를 받은 내 드라이어드들이 일제히 아티팩트에서 튀어나왔고, 길드원들 역시 태세를 갖췄다.

콰쾅!

가로막는 이를 무력으로 치운 후 식이 막 진행되고 있는 거대한 홀의 문을 열어젖혔다.

대형 길드의 차기 마스터 결혼식답게 하객 수가 장난이 아니었다.

멀리 붉은 융단 로드 끝에 예식복을 입고 선 시들링과 라줄리가 보였다.

“이게 대체 무슨 소란입니까!”

뒤늦게 아스키아 길드원들이 몰려와 우리를 저지했다.

“진짜 소란이 뭔지 보고 싶지 않으면 비켜요.”

쾅!

이리스의 발길질에 화려한 꽃바구니를 얹은 받침대가 날아갔다.

“300다이아 청구되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황금 호박 상회에서 파견된 직원이 빠르게 가격을 매 계산서에 작성했다.

와장창!

이번엔 보석과 꽃으로 섬세하게 장식된 아치가 박살 났다.

“본 제품은 저희 상회에서 취급하지 않기 때문에 업체를 통해 비슷한 제품을 확인해 봐야 합니다.”

“뭐가 됐든 가장 비싼 걸로 책정해 줘요.”

“알겠습니다. 예상 비용 800다이아로 잡겠습니다.”

오히려 소란이 너무 크니 저쪽에서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맨 앞자리에서 딸을 지켜보던 라피스가 성난 얼굴을 하며 이쪽으로 걸어왔다.

오는 길에도 하객들을 향해 깍듯이 예의를 지키는 걸 보면 이 소란이 빨리 그리고 아주 조용히 진정되길 바라는 게 분명했다.

“뭐 하시는 거죠?”

“시들링! 어떻게 네가 내게 그럴 수가 있어? 결혼을 약속했던 건 그 여자가 아니라 나잖아!”

“맞아! 어떻게 그래!”

내 말에 이리스가 옹호하며 반대쪽의 받침대를 날려 버렸고, 어김없이 300다이아를 청구했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봐요!”

“지금 어제까지만 해도 제게 사랑을 속삭이던 애인이 바람난 꼴을 보고 있는데, 제가 제정신이겠어요? 피해 보상은 실시간으로 확실히 하고 있으니까 내버려둬요.”

“해 보자는 건가요?”

“걱정 마세요. 업계 최고에게 무조건 시장에서 제일 비싼 제품을 청구하라고 했으니까. 당장 결혼식을 중지하고 제 남자를 곱게 돌려주는 건 어때요? 지금 청구되는 피해 보상 수준이면 이곳보다 수십 배는 더 화려하게 결혼식을 다시 진행할 수 있을 텐데? 아 물론 신랑은 바뀌겠지만요.”

“지금 당신이 누굴 상대로 배짱을 부리는 건 알고 있겠죠?”

“배짱이라뇨? 전 하루 아침에 약혼자를 뺏긴 불쌍한 사람인데. 그쪽도 한통속이죠? 아, 이렇게 경우 없는 길드니 테라리움 하나 못 가져서 아득바득 구는 건가?”

으드득.

라피스의 주먹과 어금니에서 끔찍한 소리가 들려왔다.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테라리움이 그녀 안의 지독한 열등감을 자극한 것이 분명했다.

대형 길드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5번째 테라리움의 전속 길드가 아니었고, 밑작업을 벌이면서까지 얻으려고 했던 게 고작 한참 뒤 번대에 존재하는 57번째였다.

대형 길드로 키운 만큼 아주 노련한 사람이니 충분히 더 이성적으로 굴 수 있을 텐데도 내 간악한 도발에 넘어가 열을 올리는 걸 보면 답이 나왔다.

난 더욱더 그녀를 도발하기 위해 입을 놀렸다.

“마치 넓은 아량을 베풀어 주는 것처럼 길드전을 빌미로 내 남자를 데려갔던데. 그 길드전 해요. 난 피하지 않아요.”

“후회하게 될 텐데요?”

“후회할 일 없으니 그쪽도 최선을 다해서 임해요. 혹시 알아요? 내 두 번째 테라리움인 60번째 테라리움을 다음 결혼식 때 혼수로 챙겨가 볼 수 있을지도?”

일을 벌이면서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테라리움을 소유하지 못한 것에 대한 열등감이 있다면 60번째 테라리움에 대한 언급을 놓치지 않고 물 것이라 생각했다.

“가자, 시들링. 이렇게까지 했는데 남는다고 하면 가만 안 둬. 설마 내가 네 손목 잡고 끌고 가 주기를 기다리는 건 아니겠지?”

내 부름에 시들링이 예비 신부를 내버려 두고 성큼성큼 내게로 걸어왔다.

그러곤 우린 주저 없이 등을 돌려 식장을 떠났다.

“멈춰라!”

“아니, 보내줘라. 이 수모는 길드전으로 갚는다. 철저하게 박살내 주지. 60번째 테라리움이라고?”

그리고 등 뒤로 라피스가 제대로 미끼를 문 듯한 말이 들려왔다.

길드전은 예정대로 피할 수 없다. 다만 라피스는 완전히 다른 목표로 움직일 것이다.

우리 길드를 찍어 누르고 60번째 테라리움을 차지하기 위해서가 가장 큰 이유일 텐데.

공성전 지역을 그녀가 우리 길드의 본거지로 알고 있을 28번째 테라리움에서 노골적으로 60번째 테라리움으로 옮겼으니, 그녀 입장에선 공격 부담이 확 줄어들었기에 더 거리낌이 없어졌을 것이다.

난 식장을 나오며 내 보좌관들에게 연락을 돌렸다.

보좌관들이 빠르게 움직여 준다면, 28번째 테라리움으로 돌아가는 길에 중간 지점에서 석류 금융의 사장 딸인 보나와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아스키아는 내 두 번째 테라리움에 대해서 몰라요. 16번째에 관해선 언급을 계속 피했거든요.”

내가 5번째 테라리움을 떠나 가장 먼저 할 일은 파산해서 경매 매물로 나올 60번째 테라리움을 접수해 길드전 장소로 준비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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