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개자식… 내게서 다 빼앗아 가려는 게 분명해. 감히 내 소중한 꽃을 빼앗아 가?’
꿈속에서 마거리트를 잃고… 깨어나자마자 곧바로 그녀의 행방을 찾았다.
단순히 꿈일 뿐이라고, 아주 기분 나쁜 꿈을 꿨을 뿐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아티팩트 안에도 내 영혼 그 어디에도 그녀가 없었다.
마거리트가 스스로 영혼의 연결을 끊고 가 버린 일은 나뿐만 아니라 내 드라이어드들에게도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더구나 그녀가 묘목일 적부터 세계수 안에서 함께 지내 왔던 걸로 알고 있는 메스키트와 엘더는 더욱 그러했다.
‘죽었으면 곱게 죽지. 49재도 한참 전에 다 끝났을 시체 따위가 왜 다시 살아난 거야?’
소중한 꽃을 잃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그건 아주 악랄하고 참담한 경험이었다.
드루이드와 영혼의 연결이 끊긴 드라이어드만 홀로 매우 끔찍한 고통을 겪는다고?
고통은 결코 드라이어드만 겪는 게 아니었다.
나 역시 심장을 난도질당한 것처럼 매시간이 괴롭고 고통스러웠다.
이건 단순히 드라이어드가 날 떠나는 걸로 끝나는 게 아니었다. 마치 내 안의 무언가를 잃어버린 기분이었다.
‘마거리트가 시작일 거야. 필드의 가디언을 다 모을 거라고? 그럼 내게서 또 다른 드라이어드들을 빼앗아 가겠지.’
꿈에서 마지막으로 보았던 의기양양한 카수스의 표정을 도저히 잊을 수가 없었다.
승자라도 되는 것처럼 굴고 있던 그 재수 없는 표정.
그대로 깨어나지 않고 그 자식에게 주먹이라도 날렸어야만 했다.
그리고 날 떠나려는 마거리트를 붙잡고… 다시 대화를 나눠야만 했다.
‘마거리트도 그래. 그런 말도 안 되는 책의 결말을 믿고 그렇게 날 떠나 버리면….’
마거리트가 믿고 있던, 내가 죽으면서 이야기가 끝난다는 엔딩. 애초에 그건 말이 안 됐다.
내 몸에 작은 상처 내는 것도 끔찍이 무서워하는 난데… 스스로 목숨을 끊을 리가 없었다.
‘분명 그 새끼가 수를 쓴 거야.’
내 꿈임에도 불구하고 난 앞서 열거한 행동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저 카수스가 마거리트를 품에 안고 사라지는 걸 멍하니 바라만 보다 다급하게 잠에서 깨어난 것이 전부였다.
‘찾으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그 자식이 나보다 얼마나 더 살았든, 얼마나 더 경험이 풍부하든. 반드시 패 버릴 거야. 내 손으로 직접 관짝을 짜서 못을 박고 이번에야말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도록 파묻어 버릴 거야. 아니 아예 불에 태워 버려서….’
“제이, 괜찮아요?”
5번째 테라리움으로 향하는 마차 안, 드라이어드 중 유일하게 내 옆에 앉은 메스키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게 물었다.
“난 괜찮아.”
사실은 괜찮지 않아. 미쳐 버릴 것 같아. 하지만 사실 그대로 입 밖으로 내뱉을 순 없었다.
그날 이후로 매 순간 내 속에서 타오르는 분노에 잠식당해 모든 일상이 불가능해졌다.
카수스에 대한 분노가 식으면 금세 마거리트에 대한 심려가 차올라 사고를 마비시켰다.
그런 나를 포인세티아를 비롯한 드라이어드들이 적어도 미뤘던 일이라도 계속하면서 생각을 분산시키라며 떠밀었다.
덜컹거리는 소리만 들리는 마차 안의 고요가 다시금 그때의 기억을 떠오르게 만든다.
“미안해. 아마도 전대가 전부 박살 낸 게 분명해….”
포인세티아는 줄곧 카수스의 흔적을 찾기 위해 세상 곳곳에 퍼져 있는 포인세티아 장식들의 힘을 빌리려고 했다.
제자리에서 분신을 이용해 순식간에 세상 한 바퀴를 돌고 올 수 있는 기동성, 그 어떤 자들보다 앞서는 정보력 등, 그녀가 가진 모든 장점을 십분 활용해서 흔적을 찾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전대 포인세티아는 자신이 죽기 전 모든 포인세티아의 장식들에 지금의 포인세티아가 깃들 수 없도록 무효화를 시키고 가 버렸던 것이다. 끝까지 내게 빅 엿을 먹이고!
어쩔 수 없이 포인세티아는 네트워크 재구축에 나섰는데 하필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그녀가 깃들 수 있는 장식품이 조건을 갖추기 위해선 숨뭄데이의 염원이 담겨야만 했는데, 전대가 무효화시켜 버린 장식품 중 올해의 숨뭄데이 끝자락의 장식품들까지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이전보단 훨씬 적지만 곳곳에 느껴지는 축복의 기운들이 있어. 시간이 많이 늦어질 테지만 최대한 노력해 볼게.”
부족한 자신감으로 어깨를 움츠렸던 포인세티아가 나보다 빨리 정신을 차리게 됐다.
그녀는 자신의 조상이 모든 원흉의 신호탄이 된 것에 큰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누구도 그 점을 지적해 그녀를 원망하지 않았으나 그녀는 기꺼이 이를 원동력 삼아 가디언으로서 첫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열의에 넘쳐 행동하기 시작한 그녀에게 스노우 필드의 드라이어드들은 끝내 감응했고, 모든 눈꽃들이 숨뭄데이의 관습에 따라 그녀에게 과거, 현재, 미래의 선물을 주며 응원의 마음을 보탰다.
눈꽃들은 드디어 깨달은 것이다.
“스노우 필드의 드라이어드들아, 부디 내 이야기를 들어줘.”
자생 필드의 드라이어드들에게 호령하는 매서운 가디언의 모습은 찾아볼 순 없었지만, 포인세티아는 소복이 내리는 눈처럼 눈꽃들의 마음에 호소를 통해 젖어 들기를 선택했다.
“난 우리 스노우 필드의 드라이어드들이 겁쟁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우린 고독한 동토의 은둔자, 그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제자리에서 맡은 바에 최선을 다하는 꽃들이야. 우린 변화할 필요가 없어. 때로는 변화하지 않는 것이 가장 나은 결과를 가져올 때도 있어.”
눈꽃들이 포인세티아에게 준 과거를 추억하는 선물은 그들이 보물찾기 시합에서 이기기 위해 열심히 모았던 다이아였다.
“우리의 뿌리가 추위를 잘 견뎌 낼 수 있는 이유는 누구도 찾지 않는 추운 대지에 반드시 피어나야 하기 때문이야. 그게 우리 스노우 필드 꽃들이 굳이 특별함을 내세울 필요 없는 이유고. 우린 다른 필드의 꽃들처럼 비를 기다리지 않아. 우리에겐 눈이 있으니까.”
눈꽃들이 포인세티아에게 준 현재를 잘 지낼 수 있도록 도움이 되는 선물은 각자의 서식지에 장식한 포인세티아 조화였다. ‘언제든지 놀러 와도, 돌아와도 좋아’라는 의미가 담긴.
“우리가 변함없는 마음으로 제 자리를 지키는 한, 가끔은 눈이 녹아 우릴 적셔 줄 거야.”
“우리의 특별한 스노우 필드의 수호자. 힘든 길을 대신 걷게 해서 미안해. 우린 제자리를 떠나 변화하는 걸 두려워하지만 넌 한곳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를 수용해야 하는 길을 선택한 꽃. 오로지 너만이 가능한 일이겠지.”
눈꽃들이 포인세티아에게 준 아름다운 미래를 기원하는 선물은 규율의 협약자로서의 맹세였다. 포인세티아가 호소를 통해 확립한 필드의 규율을 무슨 일이 생겨도 반드시 지키겠다는 협약자로서의 맹세, 가디언에 대한 충성이었다.
“제이, 아스키아에서 마중을 나온 듯해요.”
메스키트가 다시금 내 상념을 깼다. 그녀의 얼굴엔 걱정이 여전했으나 적당히 내 상황을 모른 척해 주는 것인지 괜찮냐고 되묻진 않았다.
“내립시다.”
대형 길드인 아스키아와 만나서 시들링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많은 준비가 필요한 일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산에서 내려오자마자 바로 이것부터 하기로 선택했다.
차라리 이런 복잡한 일에 얽혀서 내 머릿속을 휘저어 놓는 게 나았다.
그게 아니라면 난 내 발로 마거리트를 찾겠다고 뛰어다니거나, 그럴 수 없다면 그저 안달 난 채로 달달 떨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가이아 길드의 마스터, 제이 님 맞으십니까?”
마차에서 내리자 아스키아 길드의 문양이 그려진 새하얀 유니폼을 입은 사람이 다가왔다.
“28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이자 또 다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이기도 한 제이가 왔다고 전해 주세요. 오랫동안 억류 중인 내 길드원이자 소중한 거주민을 찾으러 왔다고요.”
상대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아무런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나와 에이레네는 거대한 길드 건물 안, 이리스를 포함한 다른 길드원들이 있는 곳으로 안내되었다.
“앗! 마스터, 예상했던 것보단 빨리 오셨네요.”
“어서 오세요. 오느라 고생하셨어요, 제이 님. 그동안 저희가 시들링과 관련하여 지속적으로 이야기를 나눠 보려 했지만…. 표정이 많이 좋지 않으시네요. 혹시 일이 많이 고단하셨나요?”
날 보고 반색하던 이리스의 눈빛이 점점 걱정에 물들어 가는 것이 보였다.
“아… 제가 없는 동안 수고해 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제 표정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그저… 조금 피곤할 뿐이라.”
“그럼 조금 쉬고 이따 이야기를 마저 할까요?”
“아뇨, 여러분이 아스키아 길드 일로 떠나신 지 2주가 넘었는데 아직까지 시들링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를 나눠 보지 못했다는 게 걸리네요. 당장 강경하게 나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하지만 온갖 핑계를 대서 면담을 회피하는 데다 겨우 만나도 시들링에 대해선 입을 다물고 있어요.”
“아마 나는 바로 만나 줄 거예요. 그럴 수밖에 없게 만들었으니까.”
난 오늘 길드 대 길드로 맞짱 뜨러 온 게 아니었다. 일부러 두 개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이라는 신분을 내세운 것도 그 이유였다.
전속 길드란 타이틀을 달고 갔음에도 불구하고 2주가 넘도록 시들링 소식이 없었다.
겨우 전속 길드 정도론 꿈쩍도 안 한다는 게 분명하니 차라리 테라리움 쪽에 힘을 실었다.
“마스터께서 지금 바로 행정 관리원님과 면담하시길 원하십니다.”
그리고 여태 내 길드원들과의 면담 시간을 회피해 왔다면서 나는 단번에 불러들이는 걸 보면 맞는 선택을 한 것이 분명했다.
“혼자 다녀올게요.”
길드원들을 모두 대기시키고 나 홀로 가기로 했다. 내 편인 다른 이들과 함께하면 든든할 터였으나 지금의 내겐 필요 없었다. 난 당장이라도 불쑥 튀어나오려는 카수스에 대한 분노와 마거리트에 대한 걱정을 잠재우기 위해서라도, 스스로 더 많은 일을 맡아 바빠져야만 했다.
아스키아의 길드 접견실은 과수원에 길드 룸을 둔 우리 길드만큼 넓었다.
찾아오는 이에게 기선 제압을 하듯 위용이 대단했으나 지금의 내겐 어떠한 감흥도 주지 못했다.
“반갑습니다, 행정 관리원님. 저는 아스키아 길드를 운영하는 길드 마스터 라피스라고 합니다.”
새하얀 갑옷을 입은 큰 체격의 중년 여성이 거만한 몸짓으로 날 맞이했다.
이 길드의 상징색이 마치 하얀색이라도 되는 것처럼, 모든 길드원들이 하얀 장비를 착용하고 있었다.
난 라피스가 안내한 자리에 앉자마자 바로 입을 열었다.
“2주나 질질 끌었으면 곧바로 본론으로 넘어가죠. 실종 신고된 우리 거주민을 이곳에서 억류 중이라 하여 찾으러 왔습니다. 각각 제가 운영하는 두 개의 테라리움에서 신고 접수가 됐으니 죗값도 두 배로 무는 걸 각오하세요.”
정색한 얼굴로 단호하게 말했으나 라피스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내 말을 받았다.
“글쎄요. 과연 무슨 죄를 물을 수 있으실까요? 제 사위는 제 발로 이사 왔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