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지 못한 상황이었지만 포인세티아와의 영혼의 연결을 서둘렀다.
내 영혼 속에 그녀를 품음으로써 적어도 내 드라이어드들만큼은 그녀를 같은 팀이라는 소속감으로 지켜 주길 바랐기 때문이다.
“아….”
처음엔 곧 죽어도 스노우 필드를 떠나는 걸 원치 않았던 포인세티아였지만, 새로운 사명이 생겼기 때문인지 이번엔 마다하지 않았다.
오히려 영혼의 연결을 재촉하는 그녀를 받아들이려는데…. 상당히 버거운 느낌이 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가득 차 있는 가방에 억지로 물건을 쑤셔 넣는 기분이었다.
고질적인 COST 부족 문제.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자랄 대로 자란 한 필드의 가디언을 심으려니 COST가 아슬아슬한 게 분명했다.
그러고 보니 내가 마지막으로 영입한 드라이어드도 역시나 필드의 가디언이었던 실새삼이었지.
이미 그때부터 내 영혼은 비상등을 울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표정이 좋지 않은데?”
“제이, 괜찮아요?”
“으응… 포인세티아의 영혼이 상당히 크네. 못 견딜 정도는 아니지만….”
속이 답답하고 목이 턱턱 막혔으며 멀미를 앓는 것처럼 머리가 어지러웠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게 담긴 포인세티아의 영혼이 내 영혼의 그릇을 깨뜨려 버릴 것처럼 버겁게 느껴졌다.
자그마한 충격에도 금방 금이 가 버릴 것처럼 위태한 상태가 바로 지금이었다.
“쉬어야겠어….”
엄청난 경쟁자가 등장한 마당에 한시가 급했지만, 숨을 삼키는 것도 힘들뿐더러 도저히 움직일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걱정스러운 얼굴의 드라이어드들이 내 부탁대로 날 침대까지 옮겨 주었다.
난 침대에 누워 한참을 끙끙 앓다가 어느새 기절하듯 잠에 빠지고 말았다.
***
“꿈?”
오랜만에 꾸는, 모든 것이 선명하게 시야에 담기는 꿈이었다.
난 새하얗게 탁 트인 공간에 서 있었다.
이곳에서만큼은 아무런 고통도 느껴지지 않아 다행이라 여기던 것도 잠시, 저 멀리 나 말고 누군가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낯익은 새하얀 꽃이었다.
“마거리트?”
내 꿈에 마거리트가 나온 건 처음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단번에 그녀에게 달려갔는데, 어쩐지 상태가 이상했다.
“마거리트? 왜 그러고 있는 거야?”
마거리트는 바닥에 엎드려 그녀의 무기인 책의 커버를 손으로 미친 듯이 문지르고 있었다.
“제이…. 내 진리야?”
내 기척을 느낀 그녀가 고개를 들어 날 올려다봤다. 얼마나 울었는지 얼굴이 온통 눈물로 젖어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야? 왜 그런 꼴이야?”
내 꿈인데…. 내 꿈 속인데도 왜 내 드라이어드가 이렇게 괴로워하는 모습을 봐야 하는 거지?
“어떡해… 제목이 바뀌지 않아.”
“제목?”
마거리트는 자신이 한참을 문지르던 책을 들어 내게 보여 줬다.
새하얀 하드커버엔 전에는 볼 수 없었던 책의 제목이 금박으로 적혀 있었다.
더구나 어찌나 문질렀던지 책 커버가 다 헐어 있었다.
<가장 소중한 존재가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
낭만적인 동화 같은 제목이었다.
“내가 선택했던 건 이 책이 아니었어. 그런데 언제부턴가 책의 제목이 바뀌어 버렸어.”
“일단 진정하고 눈물부터 닦자. 책의 제목이 바뀐 게 그렇게 큰일이야?”
“내가 선택한 진리는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이었어.”
무엇이 그렇게 서러운지 마거리트의 목소리를 갈수록 격해졌다.
달래 보려 했지만 그녀는 탈수 증상이 걱정될 정도로 쉴 새 없이 눈물을 흘렸다.
“둘 다 좋은 제목처럼 들리는데 뭐가 걱정이야?”
“아냐. 달라. 이건 안 돼.”
그녀는 급기야 책의 커버를 손톱을 세워 긁어 대기 시작했다.
마치 정신이 나간 것처럼 구는 행동에 놀라 황급히 마거리트의 팔을 붙잡았다.
“대체 뭐가 문제인데 그래? 진정하고 내게 말해 봐. 같이 고민해 줄게.”
평소엔 끈질길 정도로 내게 엉겨 붙었던 마거리트였지만 지금은 온 힘을 다해 내 팔을 뿌리쳤다.
“내겐 내 진리, 제이가 아주 소중해. 내 진리를 알게 된 순간부터 오랫동안 날 답답하게 만들던 모든 것들로부터 해방된 기분이었어.”
“그래, 그래. 나도 네가 소중해.”
드라이어드에게 드루이드가 소중한 존재이듯, 드루이드에게도 드라이어드는 아주 소중한 존재였다. 그녀를 진정시키기 위해 급히 꺼낸 말이지만 엄연한 진심이었다.
“그래서 언제부터였는진 모르겠지만, 나도 모르게 계속 내게 가장 소중한 존재인 제이에겐 행복한 미래만 가득할 거라고… 반드시 그렇게 될 거라고 예언을 했나 봐… 그래! 그래서 책의 제목이 바뀐 거야! 내가 책의 제목을 도중에 바꿔 버린 거야!”
“내 행복을 비는 게 잘못된 일은 아니잖니?”
“그런데 그래선 안 돼… 그건 안 돼…. 진리가 바뀌었어.”
난 도저히 마거리트가 왜 저렇게까지 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마치 세상이 무너지기라도 한 것처럼 격한 반응을 보이는 이유가 단순히 내가 행복해지는 예언을 했기 때문이라고?
“반드시 들어맞는 예언이라…. 내 드루이드는 이 능력이 갖는 위험에 대해 느껴지는 것이 없나 봐?”
문득 실새삼이 마거리트의 능력에 대해 내게 했던 경고가 떠올랐다.
설마 마거리트가 예언 과정에서 무슨 사고라도 친 건가?
“이젠… 아무것도 모르겠어.”
한참을 발악하던 마거리트는 양팔을 축 늘어뜨린 채 체념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내가 추구해야 할 궁극의 진리…. 앞으로 바뀌지 않을 절대적인 예언….”
“마거리트….”
“이 책에… 내게 가장 소중한 존재가 행복해지는 방법이 적혀 있어. 갑자기 생겨났어. 아마 제이가 벌써 세 그루의 필드의 가디언과 영혼의 연결을 맺었기 때문인 거겠지. 그건 예언이 그대로 흘러가고 있다는 증거니까.”
“아, 그래. 스노우 필드의 가디언인 포인세티아와 좀 전에 영혼의 연결을 맺었어.”
마거리트는 상처받은 눈을 하고 책을 꼭 끌어안았다.
“제이… 내 진리…. 나의 가장 소중한 존재…. 제이가 행복해지려면 더 이상 여기에 있으면 안 돼.”
“…응?”
갑자기 마거리트의 말을 듣고 나니 미친 듯이 불안감이 몰려왔다. 온몸이 저릿해질 정도의 엄청난 공포였다.
“이곳에 있으면 제이는 결국 가장 행복해질 수 없어. 제이는 돌아가야 해.”
“그게… 무슨 소리야?”
“제이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야만 해.”
머리를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다.
이곳의 어떤 누구도, 심지어 내 드라이어드들도 내가 다른 세상에서 왔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일부러 열심히 숨겼던 탓도 있지만, 애초에 이곳은 게임 속 세상인데 상식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하지 않은가?
그런데 마거리트는 마치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처럼 내게 말하고 있었다.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라고.
“내 진리는 가장 소중한 존재가 행복해질 수 있는 법. 그러니 제이를 원래 세상으로 돌려보내야 내 진리가 완성돼…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제이는…. 죽어야 해. 그래야 제이가 행복해질 수 있어.”
“잠깐만, 우리 진정하고….”
“그런데… 내가 진리를 추구하자고 제이를 죽일 수 있겠어? 내가 어떻게 제이가 죽게 내버려 둘 수 있겠어?”
“뭔가 네가 오해하고 있는 게 있을 수도 있어. 지금 넌 무척 혼란스러운 상황이니까 정상적인 사고가 안 되는 걸 거야.”
“아냐! 여기에 그렇게 적혀 있어!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는 제이가 죽으면서 끝나!”
마거리트가 보란 듯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펼쳤고, 그곳엔 검은 잉크로 글이 적혀 있었다.
공제희는 마침내 깨달았다. 이 길은 결코 트루 엔딩이 아님을. 그런 결말 따위 원한 적 없었기에 더 늦기 전에 선택의 갈림길로 돌아가 다른 길을 선택했다. 그 길만이 자신의 목숨 하나로 자신의 소중한 존재들을 살릴 수 있는 길임을 확신했다. 어차피 이곳은 원래 자신의 세계도 아니지 않는가?
‘본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자.’ 그렇게 마음을 먹은 공제희가 자살을 선택했을 때, 모든 게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