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6화 (396/604)

같은 시기에 파종한 씨앗 중 가장 마지막에 싹을 틔운 꽃에서 태어난 드라이어드는 남의 속을 엄청 썩이는 말썽꾸러기라는 속설이 있었다.

그리고 난 곁에 있던 꽃들이 하나둘 아장아장 걸어 나가고 마침내 나만 남을 때까지, 그 속설을 몇 번이고 귀가 닳도록 들었다.

‘온몸이 근질근질해. 나도 빨리 밖으로 나가고 싶다.’

씨앗에 있을 땐 행여 무슨 문제가 있어 태어나지 못할까 지켜보는 이들을 전전긍긍하게 만들더니, 태어나서도 그 성향 어디 안 간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의 걱정을 먹고 자라 태어난 것이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 하여 자중하자는 움직임이 일었지만, 오랫동안 싹을 틔우지 못하는 씨앗을 모른 척할 수도 없는 노릇일 것이다.

“자, 오늘도 친구에게 인사해 볼까요?”

“친구야, 얼른 밖으로 나와서 함께 놀자.”

항상 우려 섞인 말만 듣다가 언제부턴가 전혀 다른 어투의 인사를 받게 되었다.

다정한 목소리, 그리고 뒤따라 들리는 목소리는 덜 여물어 풋풋한 느낌이 났다.

아마 저 목소리의 주인도 나와 같은 시기에 파종한 꽃이겠지.

“우리 친구가 아직 씨앗 속에서 좀 더 많이 배우고 나오려나 봐요. 공부 욕심이 아주 많은 친구네요, 그렇죠?”

“공부는 밖에 나와서도 할 수 있어요.”

“그래요. 그 사실을 얼른 이 친구가 알아줬으면 좋겠네요. 자, 그럼 우리도 뒤처지지 않도록 공부하러 가 볼까요?”

토닥토닥, 내 위를 덮은 흙을 조심히 두드리는 게 느껴졌다.

“또 올게. 얼른 네 모습을 보고 싶어.”

채근하는 목소리에 나 역시 안달이 났다.

‘나도 같이 가.’ 그렇게 말하며 멀어지는 목소리의 주인을 붙잡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날 감싸는 딱딱한 껍질을 부술 수가 없었다. 왜 나만 이렇게 느린 걸까?

“무슨 종이라고 했죠?”

“마거리트라고 들었는데. 바깥 경험은 없고 이번에 새로 태어나는 꽃이라고 해요.”

“마거리트라…. 그 종이 새로 태어나는 일은 드문데. 원래 발아가 이렇게 느린 종은 아니지 않나요?”

“글쎄요. 같은 마거리트 성목에게 조언을 구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애석하게도 모두 세계수 밖에 있네요.”

“그 꽃은 기이하게도 주인들이 대를 이어 물려주는 경우가 많다 보니…. 지금으로선 어쩔 수 없군요. 그저 늦게 태어난 만큼 건강한 묘목이 태어나기를.”

“세계수께서 아이를 굽어 살펴보고 있을 거예요.”

‘세계수님, 저도 얼른 껍질 밖으로 나가고 싶어요.’

날 감싸는 아늑하고 자애로운 기운이 위대한 세계수의 것임을 태어날 때부터 알고 있었다.

모든 식물들의 신, 세상과 만물을 품에 안고 보살펴 주는 신,

나 역시 그 품에 안겨 밖으로 나가는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포근한 품이더라도, 늦게까지 껍질 안에 웅크리고 있는 날 재촉하지 않고 마냥 보듬어 주기만 하는 게 심술이 나기도 했다.

차라리 어서 나가라고 등을 떠밀어 줬으면 좋겠다.

계속 이대로 있어도 좋겠다 싶을 정도로 포근하게 품어 주니 안주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되잖아!

내 탄생이 느린 건 다 착한 세계수 때문일지도 몰라.

그런 마음이 들어서일까? 난 갑자기 밀려오는 반항심을 표출하기 위해 마구 몸을 움직였다.

“그나저나 동종의 성목이 없다면 누가 이 묘목을 돌보죠? 이번엔 유달리 세계수의 품으로 돌아온 꽃들이 많아 버팀목들도 부족할 텐데.”

“아마 모습이 많이 닮은 샤스타데이지가 나서 주지 않을까요? 두 종은 오랫동안 좋은 인연을 유지해 왔으니까요.”

“하지만 그쪽도 동종의 묘목들을 더 우선시할 텐데….”

부스럭.

“어라? 방금 흙이 움직이지 않았나요?”

“세상에! 그렇게 애태우더니 드디어 발아하려고 하나 보네요! 다른 꽃들을 불러올게요!”

오로지 반항심을 원동력으로 주먹질도 하고 발길질도 했더니 의외로 주위를 감싼 껍질이 약하다는 걸 깨달았다.

어라? 이거… 제법 부숴 볼 만한데?

빠각, 와작.

“어머 태어난다, 태어난다!”

“옳지. 그렇게 더 힘을 주면 된단다. 껍질도 스스로 박살 내지 못한다면 험한 세계수 밖을 이겨 낼 수 없어요.”

“이리 와 봐! 이번 시기의 마지막 묘목이 발아하려고 한대!”

날 응원하는 소리에 몸부림은 관성을 얻어 더욱 격해졌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내 머리 위로 쏟아지는 환한 빛을 맞이할 수 있게 되었다.

오랫동안 날 꽁꽁 동여매던 껍질에서 벗어나니 무척이나 상쾌했다.

“세상에, 사랑스럽기도 하지.”

“그렇게나 속을 썩이더니 이렇게 어여쁘게 태어나려고 그랬구나.”

“아가, 세상으로 나온 걸 환영한단다. 부디 건강하게 자라 좋은 드라이어드가 되기를.”

난 가장 마지막에 씨앗을 틔운 만큼 수많은 꽃들의 환영을 받았다.

그리고 지금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휘말렸던 속설처럼, 수많은 꽃들의 이목을 끄는 말썽꾸러기 꽃으로 불리고 있었다.

“마거리트, 또 도망가게?”

내가 씨앗 속에 있을 때부터 매번 찾아와 이제는 친한 친구가 된 샤스타데이지.

그녀는 몰래 수업을 빠져나가려는 날 몸으로 가려 주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묘목들을 불러 모아 올바른 성목이 되는 길을 가르치는 수업은 너무 재미없었기에 오늘도 난 땡땡이를 택했다.

카네이션 선생님의 수업은 그의 고저 없는 잔잔한 목소리 때문에 수업을 더 지루하게 만들었다.

“난 이런 이론 수업 말고 실전을 원해. 얼른 세계수 밖으로 나가고 싶어.”

“하지만 우리 같은 묘목은 작은 세계수님께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걸. 다 자랄 때까지 열심히 배워야지.”

“난 다 배웠어.”

“또 도망간 걸 알면 메스키트 님이 혼내실 거야….”

“괜찮아. 내 예언에 따르면 오늘 메스키트 님께 혼나는 상황 따윈 없어.”

“네 예언은 항상 틀렸잖아.”

샤스타데이지의 걱정스러운 말을 뒤로 한 채 자리를 빠져나왔다.

“이럴 줄 알았지.”

“아씨, 네가 왜 여기 있어?”

그리고 마치 내가 땡땡이칠 거란 사실을 미리 알고 있던것처럼 나타난 엘더 플라워에게 바로 걸렸다.

“넌 어떻게 학습 능력이란 게 없냐? 메스키트가 네가 곧 땡땡이 칠 테니 지켜보라고 했어.”

저 재수 없는 녀석은 그대로 메스키트 님께 고자질하기 위해 달려가 버렸다.

난 엘더가 달려간 방향의 반대로 도망치며 이를 악물었다.

“고자질쟁이 자식. 얼굴만 하얀 쭉정이 같은 놈!”

메스키트 님께 또 걸리면 내 가지가 다 부러질 정도로 호된 훈련이 기다리고 있을 게 뻔했다.

내가 너무 늦게 태어난 바람에 내게 버팀목이 되어 줄 성목이 마땅히 없었다고 한다.

이미 대부분의 성목들에게 적당히 묘목들이 배분된 지 오래였기 때문인데.

그런 날 나서서 맡아 주려고 한 성목이 바로 그 유명한 벨벳 메스키트였다.

듣기론 그녀는 아주 특별한 드라이어드였고, 그녀 밑에서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꽃은 매우 행운이라고 했다.

물론 직접 메스키트 님께 보살핌을 받고 있으니 그녀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는 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엔 나도 아주 특별하고 대단한 꽃이야.”

물론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따로 있었다.

난 태어난 이후부터 지금까지 꿈을 꾸는 유일한 꽃이었다.

드라이어드들은 세계수 밖의 인간들처럼 잠을 잘 필요가 없다고 했지만, 난 이상하게도 항상 밤이 되면 잠에 들었다.

그리고 잠을 자지 않으니 꿈도 꾸지 않는 다른 꽃들과 다르게 난 꿈을 꿨다.

처음엔 내 예언 능력이 환각으로 나타나는 줄 알았지만, 마거리트에 대해 알고 있는 성목들에게 들은 결과 그 어떤 마거리트도 그런 식으로 예언을 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것 봐, 내가 얼마나 특별한 드라이어드면 그러겠어?

꿈속에서 난 항상 두 권의 책을 들고 있었다.

둘 모두 아무런 내용도 담지 않는 백지만 가득한 책이었다.

그리고 난 그 두 책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무언가를 고민만 하다 잠에서 깨어났다.

무얼 고민하는지는 나도 모른다.

그저 잠에서 깨어나면, 어쩌면 두 책 중 하나를 골라야 하는 고민이 아닐까 생각할 뿐이었다.

그래서 너무 답답했다.

매번 같은 장면만 되풀이되니 꿈에서 깨어날 때마다 가슴속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왠지 세계수 밖을 나가야만 그 고민에 대한 답을 얻을 것만 같다는 느낌이 계속해서 날 지배했다.

그러나 세계수의 꽃들은 하나같이 내가 아직 세계수 밖으로 나갈 준비가 안 되었다며 다독였다.

난 준비가 됐는데. 얼른 밖으로 나가서 내 고민에 대한 해답을 알고 싶은데! 하지만 아무도 이런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으니 세계수가 너무나 답답하게 느껴졌다.

***

“그래서 또 수업을 빼먹은 거니?”

“메스키트 님은 아무것도 몰라요. 전 정말 준비가 다 됐단 말이에요!”

아무리 도망쳐 봤자 결국 난 화분 안의 새싹이었다.

결국 엘더의 고자질에 출동한 메스키트님께 붙잡혀 하루 종일 손을 들고 반성하는 체벌을 받아야만 했다.

“아직도 그 꿈의 내용이 널 괴롭게 만드는 거니?”

“답답해 죽겠어요. 대체 그 책의 정체가 뭘까요? 왜 두 권이나 있는 거죠? 전 뭘 고민하는 걸까요?”

“꿈을 꾸는 드라이어드라….”

“그건 다 네가 모자라서 그래. 책이 두 권이란 건 공부 좀 하란 뜻이겠지.”

나보다 훨씬 먼저 태어났다고 성목 노릇을 하려는 엘더가 내 옆에서 똑같이 손을 들고 벌을 서며 짜증 나게 굴었다.

난 땡땡이, 쟤는 다른 꽃들을 노멀 등급이라고 놀리다가 다툼이 일어났던 일을 걸려서 벌을 받는 중이었다.

“넌 입 좀 다물어. 자기도 잘못해서 같이 벌 받는 주제에.”

“둘 다 그만. 꿈에 대해선 내가 좀 더 알아보마.”

그 후로 메스키트 님께선 세계수 안의 모든 꽃들을 만나 내가 겪는 일에 대해 조언을 구하셨다.

그리고 마침내, 어떠한 현명한 꽃이 답을 알려 주었다.

“아무래도 네가 꾸는 꿈은 마거리트 꽃들이 평생을 걸쳐 고민하는 ‘진리’에 대한 것이 아닌가 싶구나.”

“진리요?”

“그래, 마거리트 꽃은 예언을 할 수 있지?”

“물론 쟤가 하는 예언은 다 엉터리이지만요.”

또 엘더가 재수 없게 끼어들길래 주먹을 날렸다.

하지만 나보다 훨씬 성장이 빠른 녀석이라 가뿐하게 내 공격을 막았다.

“그만. 자꾸 싸우면 둘 다 벌을 주마.”

“…….”

“다시 설명하자면, 마거리트는 예언 능력을 가졌으며 동시에 예언을 통해 끊임없이 진리를 탐구하는 꽃이라고 하더구나. 하지만 각자 예언의 능력이 다르듯 탐구하는 진리도 다 다르지. 그런데 딱 하나, 모든 마거리트들이 공통적으로 갈망하게 되는 진리가 있는데 그게 바로 ‘궁극의 진리’라고 했단다.”

“그게 뭐예요?”

“글쎄, 나도 알 수 없단다. 난 마거리트가 아니니까. 그리고 그 궁극의 진리에 도달한 마거리트도 아직 없다고 했고. 어쨌든 네가 꾸는 꿈은 너만이 할 수 있는 진리를 탐구하는 방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단다. 두 권의 책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민하던 것. 어쩌면 네가 추구할 진리의 방향을 계속 고민하던 게 아닐까?”

메스키트 님의 조언은 어려웠지만, 그날 이후 내가 꾸는 꿈에도 변화가 생겼다.

난 마침내 내가 든 두 권의 책이 무얼 의미하는지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그건 앞으로 내가 살아가는 매 순간마다 하게 될 고민을 양자택일로 나눈 것이었다.

두 권의 책은 절대 양립할 수 없고 결국 두 권 중 한 권만이 나를 궁극의 진리로 이끌게 될 것이다.

그리고 두 권의 책은 각각 내가 선택한 고민에 따라 내용이 달라지게 될 것이다.

꿈은 점점 또렷해져 어느 순간부터는 꿈과 현실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내 생활을 침범하기 시작했다.

메스키트 님이 드디어 세계수의 밖으로 나가고 그런 그녀가 열매의 형태로 다시 돌아왔을 때, 난 텅 빈 손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두 권의 책을 들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 살 정도가 되었다.

또다시 메스키트 님과 엘더가 함께 세계수의 밖으로 나갔을 정도로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엔, 난 모든 생활을 포기하고 잠에 빠져 매일을 꿈만 꿨다.

날 보살펴 주던 메스키트 님이 없으니 날 말릴 꽃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내가 추구하는 두 개의 갈림길이 대체 뭘까?

계속 책을 들여다보면 답을 알 것 같은데도 확실하게 답을 알 수 없는 갑갑한 상황만 계속되어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내 책이 내게 답을 했다.

세계수 안에 있던 모든 꽃들이 한 날 동시에 어떤 드루이드에 대한 존재를 알아차리게 되었다.

어느 날 갑자기 알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는 태어나기 전부터 그 드루이드를 알고 지낸 것처럼 매우 친근하게 여겼다.

마치 또 다른 세계수가 존재하는 것처럼 그 존재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우린 영혼이 더욱 풍족해짐을 느꼈다.

그리고 어떤 꽃들은 마치 오랫동안 그 존재를 기다려 왔다는 듯 굴기도 했다.

어쩌면 나 역시 그들과 같을지도 모른다.

마침내 책이 스스로 제목을 말하는 걸 보면, 어쩌면 내 진리는 그 존재가 있기에 추구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마지막으로 꿈을 꾸게 된 날, 나는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책을 읽고 또 읽었다.

텅 빈 페이지지만 난 분명 무언가를 읽고 있었다.

마침내 오랫동안 날 괴롭혀 오던 꿈을 끝내기 전, 비로소 책을 덮고 제목을 확인했다.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

<가장 소중한 존재가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

이제야말로 두 권 중 한 권의 책을 골라야 하는 순간이 온 것이다.

난 내 가장 소중한 존재 역시 ‘모두’에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했기에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의 제목을 가진 책을 골랐다.

그리고 꿈에서 깨어났을 때, 내 손엔 어느새 그 책이 들려 있었다.

이 책이야말로 내가 추구해야 할 궁극의 진리 그리고 앞으로 살아가는 동안 탐구하여 채워야 할 진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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