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무슨 모순되는 상황이란 말인가.
육체의 주인은 현세대의 포인세티아인데, 그 육체에 깃들어 살 뿐인 구세대의 존재가 모든 것을 틀어쥐고 있었다.
포인세티아는 마치 몸이 마비된 것처럼 팔다리를 꿰뚫고 들어오는 얼음송곳에 무력하게 당하고 있었다.
“내게 기회를 줘!”
그녀는 전대가 아닌 날 향해 울분이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날 도와줘! 물론 네가 보기에도 난 자격이 없을지도 몰라. 하지만 난 아직 제대로 시작도 못 해 본 거잖아? 아직 제대로 증명해 보이지 않은 것뿐이잖아! 노력할 거야! 너마저 날 포기하지 마….”
쩌저적….
포인세티아의 얼음송곳에 꿰뚫린 부위가 천천히 새하얀 서리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가짜는 그녀가 했던 선고처럼 새하얀 눈 밑에 포인세티아를 완전히 묻어 버릴 셈이었다.
“처음엔 그저 떠맡은 거였지만 지금은 이 자리가 좋아. 스노우 필드에 사는 사람들도 좋고 꽃들도 좋아. 모든 게 좋아. 그러니 날 도와줘.”
“넌 오랫동안 많은 이들에게 도움을 줬으니까 이젠 그 보답을 받을 차례야.”
지금이야말로 그래프트를 발동할 때였다. 우선 상황을 살펴보고자 내내 현상만 유지하며 시간을 질질 끌었더니 머리에 다 쥐가 날 정도였다.
포인세티아는 동화 속 요정처럼 스노우 필드의 구성원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 왔다.
그녀의 애정이 지나치게 편향되어 정작 드라이어드들에겐 반발을 샀지만, 꽃들이 마음을 열어 준다면 그녀도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스노우 필드의 드라이어드들은 모두 겁이 많았다.
툰드라의 잔혹한 환경은 꽃들로 하여금 스스로 움츠리게 만들고 외로움을 당연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들을 대신하여 용기를 내 줄 수 있는 존재가 있었다.
비록 종의 태생은 따뜻한 땅이었을지언정, 염원 하나만 믿고 버틸 수 없는 추운 땅에 제 발로 걸어 들어온 꽃이 있었다. 눈밭에서 열리는 축제가 좋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좋아서, 눈의 땅에 뿌리를 내린 모든 것들이 행복해지길 바라는 염원.
“네가 무슨 술수를 써서 망령처럼 포인세티아를 붙들고 있는진 알 수 없지만.”
난 뻐근한 어깨를 온 힘을 다해 움직여 메스키트의 방패를 세웠다.
“어차피 알 필요도 없어. 날 방해하는 모든 것들은 내 곁에 선 방패가 전부 막아 줄 테니까. 이건 어떤 역경에도 헤쳐 나갈 수 있는 힘이 되어 주는 방패야!”
입김이 나올 정도로 냉랭한 공간에 이질적인 온기가 피어올랐다.
추운 겨울에도 아침을 열며 따사로운 볕을 내리는 해처럼.
쿠구궁!
겨울눈의 방을 제 영역 삼아 가득 채웠던 얼음송곳들이 열기에 못 이겨 무너지기 시작했다.
내 안을 가득 채웠던 한기가 일제히 물러나며 사막의 강렬한 열기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설령 그것이 모두가 이겨 내기 불가능하다고 여긴 시련일지라도, 세상 곳곳에 닿는 태양의 빛처럼. 사막의 수호신이 된 자, 강인한 마음으로 모든 것을 비호하리라.”
얼음 속을 파고든 열기는 무자비하게 사방을 녹여 내며 전대에게 닿았다.
“윽….”
하지만 전대가 과거의 망령일지언정 가디언이었다는 점은 변하지 않기에 결코 녹록한 상대가 아니었다.
내가 상대하는 이는 과거 눈의 대지를 호령했던 정상의 드라이어드였다.
빠져나오려고 안간힘을 쓰는 그녀를 붙들기 위해선 온 힘을 다해야만 했다.
그녀가 발버둥 치면 칠수록 내 기운이 뭉텅뭉텅 빠져나가며 겹겹이 벽을 쌓았다.
한 겹이 깨진다면 두 겹으로, 두 겹이 깨진다면 네 겹으로.
그래프트에 무한히 기운을 지불할 수 있는 내게는 결국 시간만이 관건이었다.
피이잉… 쿵!
마침내 찬란한 금빛의 모래벽이 그녀를 옴짝달싹도 못 하게 틀어막자 비로소 포인세티아가 휘청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모든 것을 차단하는 그래프트의 힘이 드디어 포인세티아를 붙들고 있던 지독한 냉기를 끊어 버리는 데 성공했다.
겨울을 위해 사는 꽃이었지만, 포인세티아는 그 누구보다도 봄이 필요했던 꽃이었다.
봄은 모든 것이 시작되는 계절.
누구나 새로 시작할 기회가 있으며 준비된 자에겐 그 기회가 더없이 따뜻하고 친절하게 등을 밀어 준다.
물론 오랫동안 기회를 외면한 만큼, 얼어붙었던 다리로 첫발을 내딛는 것조차 많은 힘을 들여야 하고 많은 고통이 따를 테지만. 그것조차 감내하지 못한다면 다시 꽁꽁 얼어 버릴 터였다.
봄은 영원하지 않으며 언젠간 다시 겨울이 온다.
그러나 포인세티아가 봄을 맞이해 겨울이 오기까지 충분히 준비한다면 과거처럼 마냥 춥기만 한 겨울은 아닐 것이다.
“난 이젠 네 말을 따르지 않을 거야!”
포인세티아의 품에서 전대의 것과 똑같은 크리스털 오브가 나타났다.
그녀는 그래프트의 힘으로 완전히 무력화된 전대를 향해 달려들었다. 전대는 끈 떨어진 인형처럼 자신에게 달려오는 포인세티아를 담담히 맞이했다.
오브에서 차가운 냉기를 품은 블레이드가 나타나 전대를 베어 버렸다.
눈부신 금빛이 포인세티아를 감싸는 것과 동시에 전대의 형체에서 뿜어져 나온 새하얀 눈꽃이 사방에 퍼져 나갔다.
그런데… 찰나의 순간이었으나 난 보고 말았다.
“웃고 있어?”
전대는 몹시 환하게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 웃음엔 기쁨과 환희, 그리고 열망과 성취감이 담겨 있었다.
그 어디에도 자신의 위업이 현세대에 의해 무너졌다는 좌절감과 패배감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망령의 형태로 꾸역꾸역 포인세티아의 내면을 비집고 들어가 버티면서까지 이루려고 했던 위업.
그건….
“안 돼!”
뭐가 잘못됐다는 걸 느꼈을 땐, 이미 포인세티아가 완전히 구세대의 망령을 해치워 버린 이후였다.
그건 위업이 무너졌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가 마침내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위업은 이루어졌다.
우우우우….
열기가 내몰았던 바람이 되돌아와 불길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가디언은 수호의 의무를 뒤로 한 채 스스로 죽음을 맞이할 수 없다.
내 곁에 있는 두 가디언이 전 주인을 따라 목숨을 끊으려 했어도 끊을 수 없었던 것처럼.
스노우 필드의 드라이어드들을 향해 아무렇지도 않게 가디언의 권능을 사용했던 모습, 오랜 시간 가디언의 자리를 지켰으나 권능을 발동해 본 적 없던 현대의 포인세티아, 자신만 가둘 수 있는 겨울눈의 방에 따로 존재했던 두 포인세티아 드라이어드.
전대 포인세티아는 누군가 자신을 죽여 주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염원을 담아 장식한 포인세티아라면 어디든 그녀가 깃들 수 있다.
현재의 포인세티아야말로 결국 전대가 염원을 담아 피워 냈던 꽃, 전대는 항상 깃들어 있었고 언제나 존재하고 있었다.
염원에서 태어난 꽃이 비로소 자아를 주장할 때 온전히 스스로의 영혼을 담는 그릇이 되었고.
더불어 현세대의 포인세티아는 지금 이 순간, 이제야 말로 가디언의 직위를 계승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건… 결코 명예로운 순간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모든 것이 전대 포인세티아가 계획한 그림이었다.
끼이이이익!
사방에 퍼져 있던 눈꽃들이 일제히 하얗게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공간이 일그러지고 사방에서 요동치던 불길한 기운이 금이 간 얼음벽의 틈을 통해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아직 해제하지 않은 그래프트로 막으려 해 봤지만 막을 수 없었다.
지금 태동하는 이 불길한 기운은 드라이어드의 힘이 아니었다. 좀 더 초월적인 존재가 가진 힘이었다.
“이게 대체 다 무슨 일이야!”
포인세티아에겐 봄의 시작이었으나 어딘가에서도 악운이 또다시 시작을 맞이했다.
“그대들이 주시해야 할 것은 오로지 뿌리 밑에 깔린 덧없는 비밀뿐이노라.”
먼 옛날 눈이 녹아 병해충과 역병이 창궐했던 것처럼, 얼음 속에 봉인되어 있던 만악이 지금 이 순간 깨어났음을 느낄 수 있었다.
겨울눈의 방을 구성하던 얼음벽이 와르르 무너지며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었지만 환한 빛이 전혀 반갑지 않았다.
“포인세티아, 그 드루이드를 찾아. 스노우 필드의 가디언이라면 느낄 수 있을 거야.”
“대체… 난…. 이게 다….”
“노력할 거라고 했잖아. 증명해 보이겠다며. 넌 이제 정식 가디언이야. 허울뿐인 가디언이 아니라 진짜라고. 이게 스노우 필드의 가디언으로서의 네 첫 임무야. 전대가 봉인을 풀어 버린 그 드루이드를 찾아야 해.”
정신이 아찔해지며 내게서 메스키트의 영혼이 분리되었다.
갑작스러운 탈력감에 주저앉을 뻔한 걸 그녀가 재빠르게 움직이며 날 부축했다.
실새삼이 우릴 보고 반가운 얼굴을 하다 굳어 버렸다.
“왜 그래? 그 망령을 해치운 것 아니었어? 분위기가 왜 이리 좋지 않은 게냐?”
나도 모르게 힘주어 깨물어 버린 입 안이 혈향으로 가득 찼다.
“그자가 깨어났어. 카수스, 네 전 주인 말이야.”
내 말에 실새삼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
“그게 다 무슨 소리지? 어째서 이미 죽은 이가 다시 깨어난단 말인가?”
“전대 포인세티아는 망령 따위가 아니었어. 만악을 봉인하고 있던 눈 그 자체였지. 그게 정말로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무언가의 봉인이 깨진 걸 느꼈어.”
그 불길한 기운은 나도 모르게 스며드는 한기처럼 온몸을 떨리게 만들었다.
“네가 그렇다고 하면 그런 거겠지. 후… 카수스. 대체… 그 짓을 또 반복하려는 것이냐.”
확실한 증거도 없이 오로지 내 직감뿐이었으나 실새삼은 바로 수긍해 주었다.
“카수스가 깨어났다면… 그가 할 일은 정해져 있다.”
실새삼은 아직까지 혼란스러워하는 포인세티아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는 과거의 길을 다시 밟으려 할 것이다.”
“과거의 길이라고 하면….”
“필드의 가디언을 다시 모으려고 하겠지. 그리고 또다시 영생을 얻기 위해 세상에 멸망을 부를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불이 서서히 세계를 좀먹어 오고 있는데 이젠 전직 멸망 원인마저 부활하고 말았다.
“제이, 너 역시 필드의 가디언들을 모으고 있으니 카수스는 너의 강력한 대적자가 될 것이다.”
그 말에 메스키트가 날 부축하고 있던 팔에 힘을 주었다.
“그는 이미 한 번 10그루를 모두 모았던 전적이 있으니 더 신속하고 빠르게 움직일 것이다. …더구나.”
실새삼이 포인세티아를 향해 호통치듯 말을 이었다.
“포인세티아의 능력을 잊은 건 아니겠지? 언제까지 그렇게 정신을 놓고 있을 테냐? 이 모든 일에 조금이라도 네가 죄책감을 가진다면 내 드루이드에게 짐만 될 뿐이니 각오해야 할 것이다.”
“윽… 아니야. 난 노력할 거야!”
이에 포인세티아가 화들짝 놀라 제 양 볼을 매섭게 손바닥으로 때리며 눈을 부릅떴다.
“설마 염원을 담아 장식한 포인세티아라면, 그것이 모조품이라 할지라도 어디든 깃들 수 있는 능력을 말하는 거야?”
“그래, 이 중 포인세티아의 기동성을 따라갈 드라이어드는 없다. 말 그대로 세상 곳곳에 분신을 둘 수 있는 능력이니까. 운이 나쁘다면 전대의 흩어진 분신들이 이미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을 필드의 가디언의 정보를 입수했겠지. 그리고 그것이 카수스에게 전해졌을 수도 있다.”
난 초조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으려 손톱이 살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자칫 잘못하다간 카수스가 남은 가디언들을 선점할 수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