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3화 (393/604)

난 타깃을 바꾸어 주위를 둘러싼 다른 드라이어드들을 바라봤다.

“오랫동안 스노우 필드에서 가디언을 맡겠다고 나선 드라이어드가 없다고 들었어. 그게 숨뭄데이 축제의 원인이 되었고.”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드라이어드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전혀 몰랐다는 눈치였다.

“물론 이것도 전해 내려오던 이야기를 빌린 것이니 확실치 않을 수도 있지. 그래서 말인데, 혹시 여기서 스노우 필드의 가디언을 맡고 싶은 드라이어드 있어? 다른 필드 태생이 아닌 자신의 필드 드라이어드가 가디언을 맡아야 된다고 생각했던 거 아냐?”

내 질문에 좀 전까지 열심히 쫑알대던 드라이어드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가디언에 대해 모르는 드라이어드도 있었던 것 같은데. 설명하자면 여기 두 드라이어드 같은 존재야. 각각 데저트 필드와 바이오 필드의 가디언이야. 그리고 포인세티아가 바로 이들과 같은 스노우 필드의 가디언이고. 가디언은 필드의 규율을 수호하는 존재야.”

메스키트와 실새삼을 소개하니 전혀 몰랐다는 드라이어드가 대다수였지만, 앉은부채를 비롯하면 몇몇 드라이어드들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눈꽃들에게 필드의 가디언에 대해 내가 아는 정보를 설명해 주자 더욱 침묵이 내려앉았다.

필드를 대표하고 수호하고 다스리는 존재. 엄청난 명예만큼 책임이 뒤따르는 지위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포인세티아에게 반감을 갖는 만큼 차라리 자기가 나서서 가디언을 하겠다는 드라이어드가 나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의외로 호전적인 노랑만병초 같은 드라이어드 말이다. 명예를 중요시 여길 법한 황새풀도 혹할 듯하고.

하지만 당장 나선다고 덥석 떠맡기는 것도 아닌데, 그 누구도, 단 한 그루도 가디언을 맡고 싶다며 나서는 드라이어드가 없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모두 내 시선을 피하며 명백히 가디언의 자리에 관심이 없음을 표했다.

이쯤 되면 아무리 옛날 이야기라도, 아무도 나서지 않는 바람에 포인세티아가 나섰다는 이야기의 신뢰도가 올라가게 된다.

“뭐… 그럴 수도 있지. 그렇다면 왜 가디언을 맡기 싫은지는 이야기해 줄 수 있어? 아무도 나서지 않았으니까 하기 싫다는 거잖아. 그렇다면 다들 이유를 갖고 있겠지? 이건 빠짐없이 전부 이야기해 보자. 물론 굳이 비판적으로만 이야기하자는 건 아냐. 각자가 생각하는 가디언에 대한 이미지와 바람이 있겠지. 그걸 토대로 이야기해도 돼.”

다시 한번 침묵이 내리깔렸다.

누구 하나를 지목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와중에 앉은부채가 말문을 열었다.

“가디언은 전 스노우 필드를 두루 살피며 드라이어드들이 잘 활동하고 있는지 감시하는 역할이지요? 하지만 저는 자리를 뜰 수 없습니다. 제 모체는 따뜻한 열을 발산하여 주위의 눈을 녹이는 꽃. 또한 따스한 날이 찾아오기 전까지 굶주린 작은 짐승들을 열매로 먹여 살리지요. 제가 떠나게 된다면 이곳의 작은 생명들은 견뎌 낼 수 없을 겁니다.”

앉은부채의 답변은 어느 정도 예상했던 것이었다. 저 드라이어드는 말투며 몸가짐, 그리고 인자한 웃음이 부처를 떠오르게 했다.

“저 역시 포인세티아를 탓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그녀가 인간들을 먼저 위하듯, 저 또한 결국 이 필드의 드라이어드들이 아닌 들짐승들을 위해 행동하니까요. 하지만 이것이 제가 규율의 협약자로서 반드시 해야 되는 임무라고 생각합니다.”

앉은부채가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유도해서일까. 곧바로 복수초가 끼어들었다.

“우리 역시 자리를 떠날 수 없어요. 사방이 트여 찬바람이 들이닥치는 곳에 누가 뿌리를 내리고 눈을 녹여 줄 수 있겠어요. 우리가 떠나면 그곳엔 아무것도 없게 돼요. 이런 곳이라도 날이 풀리면 곤충이 드나드는데 산은 험하고 바람은 거세서 조그마한 날갯짓에도 금방 지치게 되지요. 우리가 휴식처가 되어 주지 않으면 곤충들은 더 위까지 드나들지 못해요.”

노랑만병초도 질세라 복수초를 견제하며 나름의 이유를 설명했다.

이끼들은 대표하여 나서는 이가 없었지만 서로 재잘거리며 모두가 들리도록 의견을 표출했다.

“우린 열은 못 내도 모여 피면 따뜻하게 지낼 수 있지.”

“미끄러운 길을 방지해.”

“우리도 나름대로 동물들이 잠을 자고 간다고.”

“기는 곤충들의 쉼터가 되어 줄 수 있지.”

모든 드라이어드들이 저마다 있는 자리를 떠날 수 없음을 이유로 들고 있었다.

그들의 말도 모두 일리가 있었다.

그 모든 이유는 낮은 거목에게 들었던 것처럼, 혹한의 대지에서 힘겹게 피어나 자기 자신만을 생각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들은 스노우 필드의 일원으로서 나름의 역할을 맡아 생명을 사이클을 돌리는 데 열심히 임하고 있었다.

“아니지, 아니지.”

갑자기 가만히 듣고 있던 포인세티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입을 열었다.

그녀의 말투엔 약간의 경멸과 냉소적인 웃음이 섞여 있었는데, 어딘가 낯선 느낌이 들었다.

“스노우 필드의 꽃들은 겁이 많아. 온갖 이유를 들이대도 결국 자리를 떠나선 안 된다는 본능이 강하게 지배하고 있는 거지.”

드라이어드들을 내려다보는 시선, 여유가 묻어 나오는 몸짓, 그 모든 것이 그녀가 평소의 포인세티아가 아니라고 말해 주고 있었다.

“너! 누구야? 설마 전대 포인세티아야?”

외형은 그대로지만 그 어디에도 기가 죽어 축 처져 있던 포인세티아의 모습은 없었다.

내 외침에 낯선 그녀는 눈짓만 보낼 뿐 별다른 행동을 취하진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옆에서 메스키트가 허튼짓을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식으로 투지를 활활 태우고 있었다.

한참을 기 싸움을 벌이던 포인세티아 비로소 몸을 돌려 이쪽을 바라봤다.

“이번 대의 데저트도 벨벳 메스키트인가 보구나. 좀 더 용맹한 느낌이네. 난 그 누구지… 가시 돋친 녀석들 말이야. 그중에서 나올 줄 알았는데.”

포인세티아가 메스키트를 대하는 태도를 보자니 어쩐지 실새삼이 꼰대 짓을 할 때와 다를 바 없다는 느낌을 받았다.

“과거의 망령 따위가 무슨 미련으로 남아 있는 게냐?”

실새삼은 원수라도 만난 것처럼 굴었다.

“넌 젊어진 것 같네? 죽기라도 했니? 꼴이 그게 다 뭐야. 귀엽기도 하지. 비행기 태워 줄까?”

“천박한 말투 하고는.”

“후후후…. 내가 보기엔 스노우 필드의 가디언은 실새삼 네가 되었어야 했다고 봐. 별난 놈들만 있는 곳인데 그중 으뜸으로 네가 가장 적합하지 않니?”

“자리를 가볍게 여기는 건 너처럼 근본 없는 녀석들이나 하는 짓이다.”

“후후, 난 근본이 없는 게 아니라 특별한 거란다. 그건 그렇고 우리 이런 식의 대화 불과 얼마 전에 하지 않았니?”

포인세티아는 나지막이 웃는 애매한 의문을 남겨 뒀다.

얼마 전에 했다고? 대체 언제?

그녀의 존재를 처음 느꼈던 건 겨울눈의 방에서였는데.

둘이 이렇게 날이 선 대화를 주고받은 적이라곤 1번째 테라리움에서….

“너… 겨울눈의 방에서만 존재하는 게 아니구나? 종종 이런 식으로 포인세티아의 의식을 지배해 튀어나오는 거지?”

그녀는 내 질문을 완전히 무시했다. 아니, 내 존재 자체를 완전히 무시하고 있었다.

그런 태도가 은둔자의 정원에서 내 존재 자체를 격렬히 거부하던 과거 실새삼의 모습을 떠오르게 만들었다.

“저…저… 재수 없는!”

“후후후, 겁쟁이들.”

포인세티아는 이젠 아예 내게서 등을 돌린 채 눈꽃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자신들이 자리를 비우면 그사이 눈 속에 잠들어 있던 악이 깨어나 버릴까 전전긍긍하지. 아주 오래전부터 그랬어. 이 혹한의 땅을 누가 반길까? 뿌리가 뚫기 힘든 영구 동토와 햇빛마저 자주 찾지 않는 외로운 땅에 누가 피어나고 싶었겠어?”

그녀는 눈꽃들을 위로라도 하는 것처럼 말했지만.

“그 누구도 피어나지 않으려 했던 추운 곳에서 꿋꿋하게 싹을 틔워 자리를 지키는 모습이 누구보다도 용감했지만, 사실은 겁쟁이였던 거지. 그 모습이 누군가의 눈엔 어리석고 이기적이라 비춰지겠지만.”

말투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조롱에 가까웠다.

“사실은 그 누구보다 외로움을 많이 타면서. 안간힘을 써가며 날을 세웠지. 어찌나 외로움을 많이 타는지 길목이 훤히 보이는 절벽 위에서 목을 빼고 소식을 기다리다 굳어 버린 모체 신화를 가진 녀석도 있을 정돈데 말이야. 그럼에도 그 누구도 언 땅에 발을 디디는 걸 용납하지 않았지. 추위에 얼어 죽어 버릴까 봐, 행여 눈 속에 묻힌 것들로부터 해를 입을까 걱정했으니까.”

“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잠자코 이야기를 들어 주던 복수초가 퉁명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그런 너희들이라. 내 뿌리가 얼어붙도록, 이파리가 얼어 찢어지도록 눈밭을 뛰어다녔는데도 누구 하나 나서 주지 않았지. 스노우 필드의 가디언을 바란 건 비단 인간뿐만이 아니었단다. 눈밭에 사는 모든 생명들이 애타게 기다렸지. 그런데 어째서 아무도 용기를 내지 않았을까?”

이내 포인세티아가 자조적인 웃음을 지으며 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세찬 바람이 불어오며 몰려 있는 이들을 해산시키려는 것처럼 사이를 거칠게 휘젓기 시작했다.

“돌아가렴. 사랑스러운 눈의 꽃들아. 늘 그랬던 것처럼 제자리를 지키렴.”

나는 메스키트의 등 뒤로 숨어 바람을 피한 채 포인세티아에게 소리쳤다.

“허튼 수작 부리지 마! 너야말로 가디언 자리를 뺏길까 봐 겁먹은 거잖아! 네 후대를 조종하려 들지 마! 이 자리는 진짜 포인세티아에 대한 오해를 풀고 그녀의 마음을 알아보기 위한 자리야. 지금의 스노우 필드 가디언은….”

그녀는 내 말에 명백한 비웃음을 내보이며 크게 소리쳤다.

“스노우 필드의 규율 협약자들은 들으라!”

갑자기 주위에 엄청난 기운이 내리깔렸다.

바람 소리마저 멈추고 일대에 눈이 어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고요해졌다.

휘이잉….

하지만 그 정적이 마치 폭풍 전의 고요였던 것처럼 고막을 터뜨릴 것 같은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우릴 향해 휘몰아쳤다.

우우우웅….

뒤이어 자리에 있던 모든 스노우 필드의 드라이어드 주변에 회전하는 은빛 고리가 생기며 환하게 빛을 낸다.

“저… 저건!”

포인세티아가 벌이는 행동은 일전에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에서 두 가디언이 행했던 것과 같은 것이었다.

“내 부름에 응답을 받은 규율 협약자들이여, 진정한 비밀은 침묵 속에서 빛을 발하노라. 비록 아래에 깔린 토양의 색이 제각기 다 다르더라도 공평하게 하얗게 뒤덮는 새하얀 눈처럼, 오랜 세월이 지나도 언제나처럼 순백을 간직한 눈처럼. 그대들 역시 언제나 변하지 않는 마음을 유지하라.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외면하라. 그대들이 주시해야 할 것은 오로지 뿌리 밑에 깔린 덧없는 비밀뿐이노라.”

그건 마치 저주와도 같은 포고였다.

전장에서 자신의 필드 드라이어드들의 용기와 투지를 북돋아 주던 메스키트와 실새삼의 포고와는 완전히 결이 달랐다.

그 아무리 저주와 같더라도 규율의 수호자인 가디언이 호령하니 무게가 달랐다.

그건 자칫 잘못하다간 스노우 필드의 ‘규율’이 될 수도 있었다.

그때였다.

퍽!

갑작스러운 이변은 포인세티아 스스로에게서 일어났다.

괴이한 소리와 함께 포인세티아의 가슴팍을 뚫고 겹겹이 꽃잎을 세운 얼음꽃이 피어났다.

저건 겨울눈의 방에서 본 얼음꽃이었다.

“지금 세대의 가디언은 네가 아니야….”

울음이 섞인 목소리가 불러온 거센 눈보라가 포인세티아 주위를 회오리치더니 이내 주먹만 한 겨울눈만 남긴 채 그녀의 모습은 사라져 버렸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