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8화 (388/604)

눈산의 드라이어드들을 찾아 공략하느라 일주일을 다 보낸 것 같다.

선배 드루이드가 남긴 공략법은 정말 많은 도움이 됐었다.

이게 아니었다면 일주일은커녕 일 년으로도 모자랐을 거다.

난 드라이어드들로 북적거리는 마을을 뿌듯한 마음으로 바라봤다.

어린아이만큼 작은 드라이어드들이 뛰어다녀서 그런지 동화 속 난쟁이들의 마을 같기도 했다.

“새삼 진짜 많이 모였네.”

마을의 몇 없는 주민들이 모처럼 다같이 집 밖으로 나와 그 모습을 신기한 얼굴로 구경하고 있었다.

나야 대도시 테라리움만 가도 드라이어드들이 북적거리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지만 이들에겐 꽤나 진귀한 풍경이었을 것이다.

“다들 열심히 잘 해 주고 있네.”

모인 꽃들이 다양해 저마다 색을 얹다 보니 겨울 축제라기보단 봄 축제에 가까울 정도로 화려해졌다.

하얀 눈과 오래된 자재들로 무채색만 가득했던 마을은 알록달록 색이 칠해지며 다채로운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광장 전체에 녹갈빛의 카펫을 깔아 둔 이끼들, 가로등처럼 듬성듬성 일정 거리마다 피어난 자줏빛 항아리 꽃은 주위를 훈훈하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앉은부채들이 몰고 다니는 하얗고 작은 동물들이 그 안을 둥지처럼 사용하고 있는 게 문제였지만….

눈이 닿는 곳마다 새하얀 황새풀 꽃이 갈색 줄기에 엮여 전구처럼 걸려 있었다.

무슨 수를 쓴 건지 바람이 불 때마다 솜털 같은 꽃이 흔들리며 은은하게 빛을 내었는데, 날이 어두워지면 마치 커다란 반딧불들이 날아든 것처럼 아름다웠다.

지붕이 다 무너져 가던 폐가는 복수초들이 달라붙어 노랗게 옷을 입히고 있었고, 그 반대편 폐가에선 노랑만병초들이 경쟁하듯 울타리를 세우고 있었다.

하지만 둘은 알까…. 둘은 이 악물고 경쟁하고 있을 테지만 완성된 작품은 서로 힘을 모으듯 완벽히 조화를 이루는 합작이었다.

“그런데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크리스마스… 느낌은 아니지? 뭐… 숨뭄데이라는 다른 이름이 존재하긴 하지만.”

난 날이 밝을 땐 드라이어드들을 설득하고 밤엔 클로에와 버드의 집에서 그들의 도움을 받아 크리스마스 장식을 만들었다.

나름대로 콘셉트에 충실하게 빨강과 초록, 하얀색을 섞어 비교적 쉽게 만들 수 있는 가랜드를 제작했었다.

그런데 막상 내가 만든 장식물을 얹으려고 보니 드라이어드들이 꾸민 것과는 영 동떨어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더구나 생화로 꾸민 축제에 난데없이 내가 만든 인조 장식물을 끼얹자니 확 깨는 것 같기도 하고. 이걸 어쩐다….

“캡틴! 충성! 근무 이상 무!”

“충성! 일은 차질 없이 진행 중입니다!”

분명 이름에 나무는 들어가 있으나 다른 풀꽃들과 다를 바 없이 작은 담자리참꽃나무들이 날 보며 경례를 했다.

이 꽃들도 참 재밌는 꽃들이었지.

공략법이 말하길 의욕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가 없는 꽃이라고 했는데, 정말로 찾아가니 다들 이부자리를 깔고 늘어지게 잠을 자고 있더라고.

겨울잠을 자는 건 동물뿐인 줄 알았는데 드라이어드도 겨울잠을 잘 줄은 몰랐지.

물론 스노우 필드는 사시사철 겨울이니 이 꽃들은 온종일 잠만 자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 꽃들의 공략법은 다름 아닌 ‘퀘스트 내리고 완수에 따른 확실한 보상을 정해 주기’였다.

생각해 보면 담자리참꽃나무를 제외하곤, 축제에 참가하는 드라이어드들 중 보상이 요구되는 이들은 없었다.

어찌저찌 힘들게 모이긴 했어도 다들 보상 없이 자신의 기분대로 축제에 힘써 주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보상이란 개념이 당연하면서도 다소 생소했었다.

담자리참꽃나무들은 어찌 보면 게임 플레이어에 가까운 사고를 가진 꽃들이라고 볼 수 있었는데, 그렇다고 다짜고짜 퀘스트를 내린다고 해서 꽃들을 움직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단계적으로 쉬운 일부터 완수하게 만들며 천천히 꽃들의 내면에 잠든 성취감을 끌어내야 한다는 게 공략법의 요지였다.

처음엔 이불 밖으로 나오는 게 고작이었던 이들이 마지막에 다다랐을 땐 지금과도 같은 빠릿빠릿한 모습이 되어 마을을 전장처럼 뛰어다니게 되었다.

그들에게 약속한 보상은 별거 없었다. 내게 아주 많아서 아쉬울 것 없기도 했고.

‘설익은 열매’, 난 딱히 언급도 하지 않았는데 무려 그들이 먼저 이야기를 꺼냈던 보상이었다.

“이제 내일이면 드디어 숨뭄데이 주간에 들어서네. 포인세티아가 계획대로 낚여 줄까?”

“지금도 어디선가 지켜보며 끼고 싶어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지도 모른답니다.”

메스키트가 무언가 알고 있다는 눈빛으로 말했다.

“결국 항복하고 나와야 성공인데. 멀리서 지켜보기만 하면 헛수고잖아.”

“오래 버틸 순 없을 거예요.”

포인세티아가 그토록 함께 놀고 싶어 하던 스노우 필드의 드라이어드들이 죄다 몰려 있었고, 내일부터는 그녀가 사랑해 마지않는 마을의 주민들도 참여할 예정이었다.

기나긴 세월 끝에 다시 열리는 숨뭄데이 축제. 포인세티아들이 따뜻한 자생 필드를 벗어나 추운 스노우 필드로 구경 오게 만들었던 기쁨과 행복이 넘쳐 나는 축제.

그 축제를 다시 재현해야만 했다.

포인세티아, 못 찾겠다 꾀꼬리. 네 발로 날 찾아와라.

***

드디어 축제 시작일.

마을의 모든 집들이 이른 아침부터 굴뚝에 뿌옇게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집집마다 아껴 뒀던 음식들을 한껏 꺼내 축제에 걸맞은 특별한 요리를 만들고 있던 것이다.

이맘때쯤이면 1번째 테라리움에서 오는 지원 물품도 기념일을 생각해 보존 식품 외에도 훈제 햄이나 생과일이 잔뜩 들어 있기도 한다지만, 이번엔 좀 더 특별하고 색다른 요리들이 상 위에 올랐다.

마을의 중앙에 마련된 기다란 테이블엔 태피스트리를 닮은 거대한 테이블보가 펼쳐졌고, 그 위로 식용 꽃을 얹은 음식들이 자리를 채웠다.

스노우 필드 꽃 중엔 취급에 따라 약재가 될 수 있는 꽃들도 존재했으므로 축제를 위한 특별한 요리들론 부족함이 없었다.

“이런 근사한 축제는 처음이구먼.”

축제를 맞아 옷을 근사하게 차려입은 주민들이 음료수가 담긴 잔을 들고 돌아다니며 한껏 꾸며진 마을을 감상하고 있었다.

그들은 꽃들이 세심하게 장식한 구역 앞에 오래도록 머물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포인세티아는 아직까지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우리 왔어! 물론 네가 보고 싶어서 온 건 아니야! 그저 우리가 꾸며 놓은 장식이 밤사이 망가지지 않았을까 해서 점검차 왔을 뿐이야.”

“맞아. 기껏 장식해 놨는데 축제 때 망가지면 어떡해? 이건 단순히 우리 자존심 때문에 온 거야.”

이끼들을 시작으로 다른 드라이어드들도 속속들이 축제에 도착했다.

드라이어드들은 축제를 장식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친히 참가까지 해 주었다.

한산했던 마을이 금세 북적북적해졌다.

축제에 음악이 빠진 건 조금 아쉽긴 해도 재잘거리는 목소리가 충분히 빈 자리를 채워 주고 있었다.

“이제 뭘 하면 되는 거냥?”

“축제 땐 뭘 하는 거냥?”

“그래서 누가 가장 아름답게 축제를 장식한 꽃인 거냥? 당연히 우리 노랑만병초가 아니냥?”

노랑만병초 드라이어드들이 테이블에 놓인 음식들을 구경하다 말고 내게 몰려들었다.

“무슨 소리! 이 난잡한 공간 속에 황금처럼 빛나는 우리 복수초 꽃들이 보이지 않는 건가요?”

“그래요. 우리 덕에 이 축제가 빛이 나고 있잖아요.”

“당연히 가장 아름답게 축제를 장식한 꽃은 복수초가 맞아요!”

이에 복수초들이 득달같이 달려들며 거세게 반발하기 시작했다.

“그만, 그만. 축제 때 싸우는 꽃이 세상에서 가장 추한 꽃이란 말도 몰라?”

내 말에 두 꽃 모두 입을 꾹 다물었다.

“축제 장식은 단순히 앞으로의 행사에 참가하기 위한 사전 조건이야. 곧 있으면 진정한 꽃을 가려내기 위한 승부가 벌어질 테니 너무 보채지들 마.”

“행사?”

“승부?”

이번엔 두 꽃들 외에도 다른 꽃들이 내 말에 반응해 웅성웅성 몰려들었다.

사실 축제 때 뭘 할지는 축제를 계획하면서도 머리 빠지게 고민한 부분이었다.

단순히 마을을 아름답게 꾸민다고 축제인 것은 아니었다.

모두가 즐겨야 하고 기쁨과 행복이 넘쳐나야 한다는 것이 중요했다.

추운 겨울의 날씨도 잊고 즐거움으로 온몸을 따뜻하게 데울 수 있는 축제 말이다.

준비 기간과 사전 정보가 적어서 그 옛날 스노우 필드 가디언을 기원하며 벌였던 축제에 비하면 많이 부족할 테지만, 주어진 조건 내에서 충분히 일을 크게 벌여야만 했다.

더구나 스노우 필드의 드라이어드들을 한 자리에 모으는 데는 성공했지만 산만한 이들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도 필요했고.

그래서 생각한 것이….

“자, 모두 여기를 봐.”

드라이어드들은 내 손에서 널뛰기를 하는 푸른 다이아에 시선을 집중했다.

그 옛날 추운 날씨도 잊고 아이들을 놀이터와 운동장에서 뛰어다니게 만들었던 건 놀이였다.

그리고 여기, 놀이를 기다리는 아이들이 있었다.

“이거 보이지?”

“다이아? 다이아 아니냥?”

“다이아가 뭐 어쨌다는 거죠?”

“정확히 이걸 500개를 숨겨 뒀어. 산 전체에 말이야. 어쩌면 이 마을 어딘가에 있을 수도 있지.”

엘더가 들으면 기함할 소리긴 했다.

다이아를 아무데나 뿌려 놨다는 소리였으니까.

“너희를 찾으러 갈 때, 너희가 축제를 준비하고 있을 때, 틈틈이 이 다이아를 깊숙이 숨겨 놨단 말이지.”

내 말에 드라이어드들이 흥미롭다는 눈을 했다.

어떤 드라이어드는 벌써부터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이건 축제 때만 할 수 있는 보물찾기란 놀이야. 가장 많은 다이아를 찾은 꽃이 이기는 행사지. 숨겨진 다이아를 많이 찾기 위해선 순발력, 관찰력, 인내력 모든 것이 요구돼. 즉, 가장 많은 다이아를 찾은 드라이어드가 이들 중 가장 대단한 드라이어드라고 볼 수 있겠지?”

꽃들의 자존심을 걸고 벌이는 싸움.

설명이 이어질수록 드라이어드들은 더는 못 참겠다는 것처럼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숨뭄데이는 마지막 태양을 기념하는 날이야. 새로운 태양을 맞이하기 전, 지난날을 돌아보고 그동안 내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살펴볼 수 있지. 너희는 다이아를 찾으며 여태 지냈던 필드를 돌아보고 가지고 있던 기량을 최대한 선보여야 많은 다이아들을 취할 수 있을 거야.”

“그래서 언제부터 시작하는고?”

꼰대 황새풀들도 체통을 잊고 빨리 시작하고 싶어 안달이 난 상태였다.

난 잠시 말을 멈추고 주변을 쓱 둘러봤다.

포인세티아도 잘 들었겠지? 이래도 참여하지 않고 배길 수 있을까?

“잠깐만 기다려 봐. 이 축제는 너희만 참여하는 게 아니야.”

난 마을 주민들에게 다가가 앞으로 있을 행사에 대해 설명했다.

그러나 연로한 그들이 직접 보물찾기에 나설 순 없으니 다른 행사를 준비했다.

이름하여 과연 어떤 꽃이 승자가 될지를 점쳐 보는 행사였다.

다들 흔쾌히 참여해 준 덕에 잠시 뒤 마을 중앙에 거대한 패널이 세워졌다. 마을 주민들은 거기에 자신들이 점찍은, 응원하는 꽃들을 달아 놨다.

“오오 인간들이 보는 눈이 있군! 우릴 응원하다니!”

“말도 안 돼! 어째서 저 녀석들이 표가 더 많은 거야?”

색색의 꽃들이 패널 위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단 하나 이색적인 꽃이 자리하고 있었다.

내가 클로에에게 슬쩍 대리 응원을 부탁해 둔 포인세티아를 향한 표, 모조 포인세티아 장식이었다.

정말 이래도 참여하지 않고 배길 수 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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